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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올라서 방으로 걸어가던 라이칸은 마침 밖으로 나오던 하녀와 마주쳤다.
칸을 보자 얼른 고개를 숙이는 하녀의 손에는 음식 쟁반이 들려 있었다. 손도 대지 않은 음식들 그대로.
라이칸은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왜 도로 가지고 나오는 거지?”
“네? 아, 마님께서 안 드시겠다고 해서…….”
그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이리 줘.”
하녀에게서 쟁반을 낚아채다시피 한 라이칸은 그대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창가에 앉아 있던 그녀가 그를 보자 벌떡, 일어서는 게 보였다.
굳은 얼굴을 보자 라이칸의 입술 끝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는 방 가운데에 있는 테이블로 가서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검을 벽에 세워놓고 갑옷을 벗기 시작했다. 검은색 셔츠와 바지 하나만 입은 채 흘깃, 돌아보자 그녀가 아직도 서 있는 게 보였다.
마치,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굳어 있었다.
잔에 맥주를 따르고 한 잔을 벌컥, 들이켠 다음 다시 가득 따르는 동안에도 그녀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라이칸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서 있을 거지?”
“……언제 알 수 있죠?”
되돌아온 질문에 라이칸은 인상을 썼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내게 어떤 벌을 내릴 거죠?”
라이칸의 짙은 눈썹이 좀 더 깊이 모아졌다.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차가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을 속인 건 미안해요. 하지만 내가 의도했던 게 아니에요. 백작이…….”
“당사자가 동조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지.”
그가 핵심을 짚어주자 그녀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그래요. 그건 맞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지하 감옥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그가 갑자기 물었다.
“수녀원엔 언제 들어갔지?”
“여덟 살…….”
“그 전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모르다니? 어디서 살았는지 모른다는 건가?”
“그래요. 난…… 기억이 안 나요. 어떤 남자의 손을 잡고 수녀원에 갔던 기억밖에는……. 그 전의 기억이 전혀 없어요.”
라이칸은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량을 베풀어주세요.”
“뭐?”
라이칸은 자신이 뭘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캘리는 턱을 들고 당당히 말했다.
“나를 놓아주세요.”
“하.”
기가 차서 묵묵히 서 있는데 그녀가 다시 뻔뻔하게 말했다.
“하찮은 여자에게 속아서 자존심에 생채기가 난 건 알아요. 하지만 자존심 같은 건 금방 회복될 거예요. 당신에겐 남는 장사였잖아요.”
라이칸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장사?”
“그래요. 당신은 결혼을 대가로 왕에게 금을 받았어요. 당신 잘못으로 결혼이 잘못된 것도 아니니까 왕이 금을 돌려달라고 하지도 않겠죠.”
“그러니까…… 나는 금을 남겼으니 너는 곱게 떠나게 놓아 달라?”
“…….”
그녀가 가만히 있자 라이칸은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왕을 기만하고 나를 속였는데도 불구하고 놓아 달라, 이건가?”
“아니면…….”
“아니면?”
“날 죽일 건가요?”
라이칸의 눈빛이 흔들렸다. 검은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캘리는 그런 그를 보면서 어째서 무섭지 않은 건지 이상했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희망이 없어진 지금, 난 빈껍데기다.
목표가 없어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지금의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두려움마저 없어져 버렸다.
멋대로 되라지. 아무렇게나 돼버리라지. 죽일 테면 죽이라지.
어차피 이젠 이 남자의 부인도 아니다.
철저히 혼자라는 외로움과 서러움이 회오리를 만들었다.
왜 난 이렇게 혼자일 수밖에 없는 건지 억울함이 치솟아서 누구에게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비록, 그 상대가 죄 없는 당신일지라도.
“당신은 날 놓아주든지, 죽이든지 해야죠. 하지만, 나같이 하찮은 목숨 하나 죽여서 이득 될 것도 없잖아요. 그냥 놓아주고 잊어버리면 되잖아요.”
“누구…… 좋으라고.”
비릿한 미소가 감도는 눈빛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난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당신의 명성에 약간의 생채기를 내긴 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잊어버릴 거예요. 그러니까…… 넓은 아량을 베풀어 놔주세요.”
그의 눈빛은 냉기가 흐르다 못해 차가운 얼음처럼 푸른 기가 느껴졌다.
“정말…… 그걸 원해? 내가 널 놔주기만을 바란다고?”
“…….”
라이칸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그렇다는 말이지.”
그가 한 발 다가섰다. 그 한 걸음이 너무나 위협적이어서 그녀를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놔주지 않을 거면, 죽여 달라. 이 말이지.”
한 발 더, 그가 가까워졌다. 보폭이 큰 그가 두 걸음 만에 코앞에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얼굴을 쥐었다가 이내 목을 감싸 쥐었다.
“널 죽이는 건 간단해.”
마치 당장이라도 실행할 것처럼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자 그녀의 목이 살짝 위로 들렸다. 그가 고개를 숙여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어쩌나. 난 널 놔줄 수 없는데. 그럼…… 죽여야 하나?”
그녀는 시선을 피했다. 입술을 깨물고 몸을 움츠렸다.
“겁을 내는군.”
가소롭다는 듯 웃던 그가 목을 놓더니 한 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은 핏기가 없었다. 덕분에 머리색이 하얀 피부와 대조되면서 금빛 머리칼은 더욱더 찬란하게 빛났다.
그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칼을 한 줌 잡았다.
“아름답군.”
흠칫, 그녀가 놀라서 시선을 들고 라이칸을 보았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는 건 딱 하나. 그녀의 운명은 이제 이 남자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는 것뿐이었다.
***
“떠날 때와는 분위기가 너무 다른데요?”
길스는 옆에 와서 중얼거리는 기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불과 열흘도 안 됐는데, 활기찼던 벨만 백작의 성은 어둡고 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마구간 쪽에서 집사가 달려 나왔다.
“나리. 왜 다시 오신 겁니까? 무슨, 다른 볼일이라도…….”
길스는 당황하는 집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백작은 어디 계신가?”
집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뭔가?”
“돌아가셨습니다.”
순간, 길스의 얼굴이 굳었다.
“뭐? 언제?”
“나리께서 떠나신 직후에 침입자가 있었습니다.”
“잡았나?”
집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잡지 못했습니다. 근데, 나리. 저는 지금 좀 바쁜 일이 있어서…….”
길스는 훌쩍, 말에서 뛰어내렸다. 집사가 놀라며 뒷걸음질 친다.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길스는 집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넌 왜 마구간에서 나오는 거지? 주인이 죽었으니, 도망이라도 치려고?”
“아, 아닙니다.”
“아니라면, 말에 왜 짐이 한가득 올려져 있는지 설명해 봐.”
겁에 질린 집사가 울먹였다.
“모두가 떠났습니다. 백작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허락을 하셨던 일이고요.”
“떠났다고? 백작이 그걸 허락했고?”
“예.”
“왜?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닌가!”
길스가 벼락처럼 사납게 놈을 다그치던 그때였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웬 여자가 걸어왔다. 길스가 쳐다보자 여자가 허리를 숙이며 절을 한다.
“하녀들을 관리하던 마가렛이라고 합니다.”
“네가 설명할 수 있다고?”
“예. 제가 모든 걸 목격했습니다.”
“뭘 봤다는 거지?”
“백작님이 하신 일, 그리고 백작님을 죽인 남자의 얼굴.”
순간, 길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백작이 무슨 일을 했다는 건가?”
길스는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
‘백작님은 신부를 바꿨습니다. 아가씨는 사랑하는 이가 따로 있었고, 그래서 워렌 공작과 결혼하느니 죽겠다고 했죠. 그래서 다른 여자를 결혼식에 대신 세웠습니다. 나리께서 찾아다니시던, 그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 그 소녀는 지금 워렌 공작의 부인이 되어 베아투름으로 가고 있을 겁니다.’
이런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있다니.
듣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여자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백작님을 죽인 자도 황금 소녀를 찾고 있었죠. 우리 아가씨를 인질로 삼아 백작님께 그 소녀의 행방을 물었고, 결국 백작님이 가짜 결혼을 실토했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그 자리에서 우리 아가씨와 백작님을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길스는 말을 더 몰아쳤다.
‘저는 분명히 봤습니다. 그자의 얼굴에 난 긴 흉터, 그리고 갑옷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그건 디콘스 왕궁을 상징하는 문양이었습니다.’
얼굴의 흉터. 그리고 왕궁을 상징하는 문양…… 왕세자의 그림자가 틀림없다.
왕세자가 또 다른 일을 더 벌이기 전에 이 충격적인 전말을 왕에게 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