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무슨 일이야?”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단검이 침대로…….”
뒤에 서 있던 와이엇과 오웬이 그들을 지나서 방으로 돌진했다.
뒤늦게 달려온 테드와 제프리에게 캘리를 데려가라고 지시한 라이칸도 곧바로 방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도망쳤습니다.”
와이엇이 중얼거리더니 창가로 다가갔다.
“여기, 발자국은 남았네요.”
와이엇이 가리킨 곳에 흔적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오웬이 발자국의 크기를 유심히 보고 벽을 짚었을 것이 뻔한 손자국까지 살피더니 라이칸을 보았다.
“엘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엘프와 사람은 키 차이만큼 손과 발의 크기도 차이가 난다. 엘프는 아니라는 건, 여왕이 보낸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기.”
와이엇이 침대를 향해 턱짓을 했다.
라이칸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단검이 침대 한가운데에 꽂혀 있었다. 라이칸은 성큼 다가가 침대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이불 아래에 묻혀 있던 베개에서 뽑혀 나온 단검에 하얀 솜이 붙어 있었다.
침입자는 이 베개가 목표물이라고 착각하고 칼을 던졌을 것이다. 이 안에 그녀가 있었다면…….
라이칸의 턱이 굳었다.
칼자루는 둥글게 휜 형태였고, 거미 문양이 새겨져 있는 단검이었다.
라이칸은 방 밖으로 나가 소리를 질렀다.
“시타!”
잠시 후, 밖에 있던 시타가 재빨리 계단을 뛰어올랐다. 라이칸은 시타에게 단검을 내밀었다.
“이 문양, 아는 건가?”
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리우습니다.”
뒤에 있던 와이엇이 놀라서 물었다.
“카리우스? 자객?”
시타가 고개를 끄덕인다.
“살인청부업자들 중 가장 규모가 큰 조직입니다. 그들을 상징하는 문양이 거밉니다.”
오웬이 나섰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조직을 구성하고 있어서 대륙 곳곳에, 놈들이 없는 곳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베아투름에는 없어.”
와이엇이 장담하듯 말하자 오웬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놈들은 항상 정체를 숨긴 채 선량한 백성들 틈에서 섞여 살다가 지시를 하달받으면 살인자로 변하니까.”
“우리 백성들 중에도 있다고?”
와이엇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묻자 오웬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백성들 중에 없다고 해도, 상인들이나 시인들로 가장할 수도 있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은?”
라이칸이 차갑게 묻자 오웬이 엄숙한 목소리로 답했다.
“활동을 개시할 때입니다. 오늘처럼.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뿐입니다. 목표를 제거했거나, 먼저 죽임을 당했거나.”
“빌어먹을.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 끝난다는 거잖아. 어느 육시랄 놈이 이런 살인청부를 해? 그것도 감히 공작부인을.”
라이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누군가 그녀의 목숨을 노린다.
라이칸의 눈길이 계단 아래로 향했다. 그녀가 보였다.
왕과 왕세자, 이래인 여왕까지 그녀를 쫓고 있다. 청부자가 그들 중 하나일지, 아니면 또 다른 인물일지, 그들이 왜 캘리를 원하는지, 그 무엇도 명확하지 않다.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기 전에는 섣불리 맞설 수 없다. 특히…… 적이 원하는 목표물이 이쪽에선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중요한 존재라면…….
차갑게 얼굴을 굳힌 라이칸은 와이엇을 향해 명령했다.
“말을 준비해.”
***
“세상에. 진짜 널 데려갈 건가 봐.”
쉴라의 얼굴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새의 얼굴이 어떻게 하면 겁먹은 표정이 되는지, 캘리는 그 전에는 전혀 몰랐다.
지금 딱 이 얼굴.
눈 위에 있는 작은 털이 파르르 떨리고, 부리는 살짝 벌어진 채, 검은색 눈동자는 점처럼 작아지고 흰자가 확대된, 바로 이 얼굴이었다.
“우린 죽을 거야.”
쉴라가 목소리까지 떨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난 못 가. 절대 못 가. 차라리 여기서 자객을 상대하는 게 낫지. 얼어 죽긴 싫다고.”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라이칸이 나타났다.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이 서늘했다. 그러자 쉴라가 벌떡 일어나더니 얼른 중얼거린다.
“공작한테 확실히 말해. 절대 못 간다고. 알았지?”
그래놓고 휘리릭, 날아가 버렸다.
캘리는 라이칸을 향해 돌아섰다. 그가 뒤따라온 제프리를 향해 말했다.
“가서 털 망토를 가지고 와.”
“예. 칸.”
제프리가 나가고 넓은 홀에는 이제 라이칸과 그녀만이 남았다.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타는 불꽃이 밀폐된 공간을 따스한 공기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캘리는 재빨리 물었다.
“정말, 날 데려갈 건가요?”
“그 점에 대해선 이미 말했을 텐데?”
“다시 생각해 봐요.”
“생각할 필요 없어.”
“이게 벌이라면, 너무 가혹해요. 난 베아투름에서 못 살아요. 나를 얼려 죽일 생각이에요?”
라이칸의 미간이 좁혀졌다.
“베아투름이 마치 사람은 살 수 없는 곳이라도 되는 듯 말하는군. 나와 기사들. 모두,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야.”
“당신들은 거기서 태어나서 자랐으니까, 가능하죠. 나처럼 따뜻한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과는 다르잖아요.”
“추위는 익숙해져. 베아투름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게 된다면…….”
“익숙해지지 않을 거예요. 난 추운 건 질색이라고요. 남부에서 살 때도, 찬 바람만 불어도 옷을 껴입던 사람이에요. 내 피부는 얇아서 서늘한 기후에는 버티지 못해요.”
“털옷을 껴입으면 돼. 장담하는데, 거기에 가면 벌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게 될 거야.”
그가 왜 이렇게 확신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니, 듣기에 따라선, 그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캘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난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얼어 죽을 거예요.”
제프리가 다시 돌아왔다. 부드러워 보이는 털가죽을 안고.
“말씀하신 털 망톱니다.”
라이칸이 손을 내밀자 제프리가 재빨리 다가와서 망토를 건네주고 돌아서서 나갔다.
그가 그녀의 어깨에 망토를 걸쳐주며 중얼거린다.
“최고급 담비로 만든 망토야. 지금은 이 정도로 괜찮겠지만, 더 추워지면 이걸로 부족하겠지. 그땐 더 껴입을 수 있는 벨벳 가운과 모직을 준비했어.”
“난 얼어 죽을 거예요.”
캘리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는 말없이 후드를 그녀의 머리 위로 씌웠다. 캘리는 다시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동상에 걸리면 손과 발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대요. 손가락과 발가락부터 잘리겠죠. 그렇게 차츰 피부가 얼어서 괴사가 일어나고, 결국엔 몸속의 피까지 얼어버린대요.”
후드를 깊이 눌러주고, 양쪽에 달려 있는 끈을 그녀의 턱 아래에서 묶고 있는 그에게선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난 그렇게 흉측한 모습으로 죽고 싶지 않아요. 손발이 잘려나가고, 눈알이 돌아가고, 피부가 까맣게 썩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느니…….”
결국,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대체 누가 그런 소릴 해?”
캘리가 커다란 눈으로 쳐다보자 라이칸이 창 쪽을 쳐다보더니 중얼거렸다.
“그 망할, 새로군.”
정확히 사실을 짚어내는 그를 보며 캘리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쉴라예요.”
그가 쳐다보자 다시 말했다.
“그 새 이름이요. 알고 있겠지만, 말하는 새예요.”
“어디서 구했어?”
“그냥…… 쉴라와 난 숲에서 만났어요. 우연히 지나가던 쉴라가 내가 던진 단검에 맞을 뻔했거든요. 그 애가 날 공격하려고 날아왔는데 갑자기 멈추더라고요. 그러더니 혼자 털썩, 바닥에 쓰러지더니 날 보면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을 하는 거예요.”
“…….”
“너였어.”
라이칸이 인상을 쓰자 캘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가 내가 찾던 주인이구나. 그러더라고요. 그 애 말론, 날 처음 보는 순간 각인됐대요. 자긴 일생에 딱 한 명의 주인만 섬긴다면서, 내가 죽으면 걔도 죽는대요. 그때부터 우린 늘 함께였어요.”
“친구군.”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한텐 유일한 친구죠.”
“혹시 그 새가 죽으면 너도 죽는 건가?”
그가 인상을 쓰며 묻자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아닌 것 같아요. 난 그 애한테 아무것도 못 느꼈으니까. 걘 날 보자마자 번개에 맞은 것처럼 머릿속에서 섬광이 번쩍였대요.”
“각인이 그런 거라면…… 비슷하군.”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캘리는 그 말뜻을 몰라서 다시 물었다.
“뭐라고요?”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출발해야지.”
캘리는 돌아서려는 그의 팔을 얼른 움켜잡았다.
“정말, 날 데려갈 건가요? 내가 얼어 죽을 수도 있는데?”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넌 안 죽어.”
“하지만…….”
“네 몸을 꽁꽁 싸매서라도 반드시 살려서 데려갈 거야.”
캘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깊고 깊은, 검은 눈동자.
“정말 왜 이래요? 난 당신을 속였잖아요. 차라리 채찍으로 실컷 때리고 쫓아버려요!”
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리고 묻는다.
“달거리를 하나?”
간단하고 짧은 질문에 그녀는 얼어붙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 가능성에 대해서는.
자신이 하프 엘프라고 생각했을 땐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라이칸이 비웃는 듯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넌 나와 같이 가야 돼. 적어도 네가 내 아이를 가진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