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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칸 (66)화 (66/159)

66

흠칫, 놀란 그녀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머리 위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꼭, 내 벗은 몸을 처음 보는 사람 같군.”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탕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몸이 들어가자 물이 출렁이며 넘쳐흐른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물속으로 몸을 담근 그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들어오든지.”

하. 목욕을 같이 하자고?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저 남잔 나와 같이 목욕을 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걸까?

그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아니면, 나가든지.”

왠지 비웃음이 섞인 말투였다. 왠지 상대방의 오기를 자극하는 듯한 표정이고.

캘리는 하녀가 걸쳐준 천을 지그시 움켜잡았다.

그가 한다면, 나라고 못 할 것 없지.

그녀는 라이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걸어갔다. 그리고 연못 앞에 멈춰 서서 잡고 있던 천을 놓았다. 스륵, 몸을 타고 아래로 흐른 천이 바닥에 고였다. 따뜻한 열기가 그녀의 몸을 가만히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몇 개의 횃불만으로는 어둠에 잠긴 그 눈빛도 읽을 수가 없었다.

캘리는 천천히 걸어가서 물에 발 하나를 넣었다. 뜨거운 온도가 발끝을 통해 심장까지 단숨에 치고 오른다. 그녀는 한 발을 더 집어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숙여서 앉았다.

다행히, 연못은 아주 컸고, 그와의 거리도 충분히 멀었다.

쭉 뻗은 그의 다리에 닿지 않아도 된다는 게 기뻤다.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자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랜 시간 말을 타고 달리느라 뭉친 근육들과 언데드를 맞닥트리고 늑대를 보고 자객까지 겪느라 긴장했던 몸이 급격히 이완되며 풀어진다.

조금 더 깊이 몸을 담가서 목까지 차오르게 만들었다. 그러자 거의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이 물이 어떤 의미에선 치료약으로도 쓰일 수 있다더군.”

그의 굵은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나른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그렇게 울리니 뭔가 웅장한 느낌이다.

캘리는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치료약이요?”

“염증이나 두드러기 같은 피부병에도 효과가 있고, 여자들의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것에도 탁월하고……. 뭐, 어쨌든 여러 가지 병에 좋은 효과가 있다고 하던데.”

캘리는 살짝 탁한 듯 보이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옥빛을 띠는 물색이 특이하다.

“색이 예뻐요. 몸에도 좋다니.”

“베아투름에 내린 신의 선물이지.”

그의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여졌다.

인간의 힘으로는 이런 걸 만들 수 없다. 이건, 정말 신의 선물이라고 할 만했다.

그의 눈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캘리는 뺨에 와 닿는 강한 눈빛을 느꼈지만 애써 외면했다.

“나중에 뒤뜰에 있는 정원을 보여주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정원도 있어요?”

“온천에서 나는 열기를 이용해 꽃과 약초를 재배하는 곳이지. 겨울이 지나면 특이한 꽃들이 색색별로 피고.”

“베아투름에선 꽃구경 따윈 못할 줄 알았어요.”

그가 피식, 웃었다.

“여기에도 꽃은 펴. 봄이 되면 성 밖에도 꽃들이 무성하게 필걸?”

“왜, 그럴 거라고 예상하는 말투예요? 여기서 자란 사람이.”

라이칸이 넓은 어깨를 으쓱했다.

“난 꽃 따위 관심 없었으니까.”

웃음이 나왔다.

하긴. 검은 늑대가 꽃에 관심이 있다고 해도 웃긴 일일 것이다.

“성 밖으로 나가면 황색의 뜨거운 물이 솟구치는 땅도 있어. 말리 말로는 그 물도 치료 효과가 있다더군.”

“말리라면…… 뜨거운 호숫가에 혼자 산다는 노파죠?”

“맞아.”

“제프리가 말해 줬어요.”

“뜨거운 호수에 가보면 여기도 그저 아이들 장난처럼 여겨질 거야.”

이상하다. 왠지 그가 이곳의 자랑을 늘어놓는 것 같았다.

내 기분 탓인가?

“어때?”

갑자기 그가 묻는다. 그녀가 빤히 쳐다보자 그가 다시 물었다.

“생각하던 대로, 베아투름이 그렇게 끔찍한 곳인가?”

대답을 이미 알면서 저렇게 묻는 그가 얄밉다.

“아뇨.”

캘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그가 집요하게 묻는다. 캘리는 한숨을 내쉬고 그가 원하는 답을 내주었다.

“베아투름은 좋은 곳이에요. 당신과 기사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한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겠어요.”

마주친 그의 눈길이 길게 느껴졌다.

“그럼, 있어.”

그녀는 눈을 들었다. 강렬한 눈빛이 기다리고 있었다. 실금 같은 미소가 어린 입술이 담담하게 속삭인다.

“베아투름에서…….”

그의 말은 끝을 제대로 맺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려던 말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말을 좋을 대로 상상해 버렸다.

‘베아투름에서 나와 같이 살아.’

정말 그렇게 말했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마주친 그의 눈빛이 점점 짙어지고 열감이 느껴진다. 캘리는 그 눈빛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가 움직이자 물이 소용돌이쳤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고 캘리는 시선을 돌려버렸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그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물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렇게 잠시 시간조차 멈춘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물이 크게 출렁였다. 그가 일어선 거였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라이칸이 물 밖으로 나가더니 천을 집어 들었다.

“우리가…… 아니, 내가 계속 이런 상태라면 널 안 보는 게 낫겠지.”

뭐?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너도 내가 없는 게 편할 거고.”

일방적으로 말을 마친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는 그녀의 눈빛이 어둡게 흔들리고 있었다.

***

목욕을 하고 침실로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잠들 수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캘리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꿈 한번 꾸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개운하지 않았다.

몸이 무겁고 불편했다. 기운이 없었지만 라일라가 들어와서 아침 식사 시간을 알리자 더 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안녕하세요, 부인. 빅토리아 고든입니다.”

옷을 갖춰 입고 1층의 홀로 나오자 여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캘리는 갑옷을 입은 여자를 처음 봤다. 게다가.

“고든이라고요?”

캘리가 놀라자 여자가 미소를 짓는다.

“와이엇의 쌍둥이 여동생입니다.”

“쌍둥이.”

캘리는 저도 모르게 놀라서 중얼거렸다.

“안 닮았나요?”

“아뇨…… 눈매가 닮긴 했네요. 와이엇보다 훨씬 예쁜 눈이지만.”

빅토리아가 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부인. 하지만 전 예쁜 것보다 검술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더 좋아한답니다.”

그러더니, 눈을 찡긋했다.

“혹시 그 눈치 없는 곰이 나에 대해 말했나요? 그렇다 하더라도 싹 잊으세요. 와이엇이 저에 대해 좋게 얘기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캘리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동생이 참…… 용감하다고 말했어요.”

빅토리아가 다시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가 웃는 것처럼, 크게.

“그럴 리가요. 용감하다고 한 게 아니라 왈가닥이라고 했겠죠.”

캘리는 결국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그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동생을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더군요.”

“흠. 그건 그랬을 것 같네요. 사실, 제가 와이엇보다 검술은 한 수 위거든요. 물론 와이엇은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요. 실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데, 여자라는 이유로 그러지도 못하니……. 안 그래도 칸에게 마상시합에 여전사도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긴 합니다. 앞뒤 꽉 막힌 장로들이 절대 허락하지 않겠지만요.”

“장로요?”

“예. 저희 베아투름은 넓은 영지를 두고 오랫동안 왕의 간섭 없이 살아와서 따로 장로회가 있습니다. 칸이 영지를 비울 때는 장로회를 중심으로 영지를 다스리게 되죠.”

“그렇군요.”

“어쨌든, 제 실력은 와이엇이나 오웬을 넘어선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제가 부인의 호위 기사가 된 것이고요.”

“호위 기사요?”

“예. 부인의 호위 기사가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제야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근데, 고든 양. 제가 호위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베아투름은 안전하다고 들었어요.”

“아뇨. 베아투름이라도 불손한 이들은 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오가는 여행자들과 상인들이 많아졌거든요. 곧 완전한 겨울이 되면 베아투름은 폐쇄됩니다. 하지만 그때까진 들고 나는 이들이 있다는 거죠.”

“폐쇄라면?”

“아, 뭐 저희가 억지로 문을 닫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따뜻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북풍의 추위가 밀려오면 오가고 싶어도 오갈 수가 없게 되거든요. 그때부터 베아투름의 진짜 겨울이 시작되는 거죠. 이제 얼마 남지 않았고요.”

“그럼 지금도 오가는 사람은 있다는 건가요?”

“예. 많지는 않지만 있습니다. 오는 사람보다 나가는 사람이 훨씬 많고요. 그래도 제가 잘 지켜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아, 그리고 절 부르실 땐, 빅토라고 해주세요. 다들 그렇게 부른답니다.”

“네. 그럴게요. 빅토.”

“그럼,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좀 들어볼까요? 부인의 일정을 알아야 호위하기가 수월하거든요.”

“글쎄요. 마을 구경이나 가볼까 하는데…….”

빅토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안 됩니다. 부인.”

“왜요?”

캘리가 의아한 눈빛으로 묻자 빅토가 강경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칸의 명이 있었습니다. 당분간 부인을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

“칸은 부인을 보호하려고 하시는 겁니다. 베아투름으로 오는 길에 자객의 공격을 받았다더군요. 혹시라도 놈들이 여행자나 상인으로 가장해 침투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경계하는 것이 나으니까요.”

“그는…… 칸은 어디 있죠?”

빅토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그걸 몰라? 하는 듯 머쓱한 표정이었다.

“빙벽에 가셨습니다. 오랫동안 비웠으니 살피러 가신 거죠.”

캘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럼, 난 성안을 좀 구경할게요. 다른 일정은 없어요.”

“예. 부인.”

빅토도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캘리가 돌아서자 순식간에 미소가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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