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69)화 (69/159)

69

“스리디오.”

“예. 영주님.”

“공작부인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

“예?”

“내 허락 없인 절대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스리디오가 대답하자마자 칸이 말 허리를 차고 달려가 버렸다. 황당한 얼굴로 남은 빅토는 스리디오를 향해 물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건가? 경계 강화는 그렇다 치고, 부인에 대해선 왜 저렇게……. 꼭 가둬두라는 것 같잖아.”

스리디오의 얼굴에도 짙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칸은 밤길을 달렸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거칠게 말을 몰았다.

정말로 아이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잡기 위한 핑계였을 뿐.

그런데…… 실제로 있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심장이 아렸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상실감이 뼈를 훑어 내린다.

그리고.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

그녀가 한 말이 귓가를 울리고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심장을 파헤치고, 거기서 흐르는 검붉은 피가 강물을 이루며 흘러내린다.

어둠을 노려보는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하!”

다시 말 허리를 찼다. 벤투스가 속도를 높인다.

사나운 바람이 그의 얼굴을 칼날처럼 따갑게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

“부인. 바람이 찹니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세요.”

라일라가 다가와 말하자 캘리는 그제야 먼 곳에 두었던 시선을 거뒀다.

“점점 더 추워지는 것 같아.”

“예. 앞으로는 더 추워질 겁니다.”

몸을 돌려 성벽 아래로 향했다. 계단을 몇 걸음 내려가는데 갑자기 앞뜰이 분주하다. 캘리는 걸음을 멈추고 라일라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영주님이 오신 것 같습니다.”

순간, 캘리의 얼굴이 굳었다. 라일라가 다시 말한다.

“오늘이 장로회의가 있는 날이거든요. 한 달에 한 번 있는 회읜데, 영지 내에서 일어나는 굵직한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보고를 듣고, 죄인들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책을 세우기도 합니다. 영주님을 비롯해서 장로들과 수석기사들까지 모두 참여하는 회의라 아침부터 그 준비로 분주하답니다.”

라일라가 설명했지만 캘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라이칸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들은 것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은 비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열흘이나 됐다. 그를 못 본 지.

그는 계속 빙벽에만 있는 건 아니라고 들었다. 베아투름은 생각보다 영지가 꽤 넓었고, 그 경계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한다.

‘영지를 오래 비웠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꼼꼼히 점검하느라 늦어지는 겁니다.’

빅토가 해준 말은 왠지 라이칸을 대신해서 변명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아이를 잃은 걸 그는 안다.

그런데도 그는 내 곁에 없다. 오지 않는다.

캘리는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라일라가 따라왔다.

묻고 싶었다. 이제 그가 나를 어떻게 할 건지.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

“영주님.”

창밖을 쳐다보고 있던 라이칸은 고개를 돌려 집무실 입구에 서 있는 스리디오를 보았다.

“회의실에 장로들과 수석기사들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몸을 돌려 커다란 나무 테이블 앞에 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가시겠습니까?”

“그래.”

칸의 대답을 듣자마자 스리디오는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그녀는 어떤가?”

다시 몸을 돌린 스리디오는 칸을 보며 대답했다.

“지금은 괜찮으십니다. 몸도 많이 회복되셨고.”

칸이 가만히 있자 스리디오는 덧붙여 말했다.

“처음에 소식을 들으시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혼자 있고 싶으시다며 내내 혼자 방 안에만 계셔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고든 부인이 오셔서 부인과 시간을 보내면서 나아지셨습니다. 요즘은 빅토와 농담을 하며 웃기도 하십니다. 다만.”

라이칸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스리디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는 제게 베아투름의 바깥 성문이 언제 닫히느냐고 물으시기에, 이달 말에는 떠날 자가 모두 떠나고 성문이 완전히 닫힐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순간, 칸의 얼굴이 굳어졌다. 스리디오가 다시 말했다.

“지금 가셔야 회의에 늦지 않습니다.”

“알았네.”

툭, 내뱉듯 대답한 칸이 다시 창밖으로 몸을 돌리자 스리디오는 그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갔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문득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을 본 스리디오의 걸음이 멈췄다.

성큼성큼, 걸어온 공작부인이 스리디오의 앞에 섰다.

“공작님께선 집무실에 계신가?”

“예? 아, 예…….”

그녀의 눈길이 복도 끝 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스리디오.”

“예. 부인.”

“회의가 언제 시작하지?”

“지금…….”

“좀 미뤄주게.”

“예?”

캘리는 스리디오를 보았다.

“미룰 수 있을까?”

그 진지한 눈빛을 본 스리디오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금 미루어졌다고 알리겠습니다.”

“고마워.”

그리고 캘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스리디오가 방금 나왔던 그 문을 향해서.

캘리는 노크를 한 번 하고 문을 열었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자 창가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지금 가…….”

무뚝뚝한 목소리가 이쪽을 돌아보다가 멈췄다.

굳은 얼굴의 그를 보는 순간, 다 잊었던 서러움이 다시 밀려든다.

캘리는 몇 걸음 더 걸어가서 멈춰 섰다.

“스리디오에게 회의를 조금 미뤄달라고 했어요.”

“…….”

“회의가 끝나면 당신이 또 바로 떠나버릴 것 같아서.”

“내게 할 말이 있나?”

라이칸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다정한 눈빛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안쓰럽게 여기는 기색조차 없었다.

캘리는 마주 잡은 두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당신은 없나요?”

내가 슬프고 아팠던 만큼은 아니라도 좋아. 그저, 아이를 잃어서 아쉽다는 말만이라도……. 됐다. 다 부질없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뜬 캘리는 말 없는 그를 올려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옳았어요. 내가…… 임신을 했더군요.”

다행히 목소리가 담담하게 나와주었다.

캘리는 자조하듯 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자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스스로 하프 엘프라고 단정 짓고 그렇게 내 운명을 받아들였죠. 그래서 당신이 임신했을지도 모른다고, 날 보내주지 않을 때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캘리는 마주 잡은 손을 비틀었다.

“그런데 이젠 없죠. 있는 걸 알지도 못했는데, 그냥 사라졌죠.”

잠시 시선을 내렸던 캘리는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어땠어요?

기뻤나요? 후련했어요?

당신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는 내가 아이까지 낳으면 상황은 복잡해지죠. 이젠 안 그래도 되니까…….

“이대로 살 수는 없어요.”

그녀가 겨우 말을 뱉어내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가늘게 지은 미소의 끝이 그녀를 향해 날아와 심장에 박혔다.

“그래서…… 뭘 원해?”

차갑고 매정하다. 한때 뜨거웠던 열정은 사라지고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얼굴.

“난…….”

“아니, 네가 뭘 원하든 상관없어.”

라이칸의 눈은 섬뜩할 정도로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겨울 동안은 여기 있어.”

그럼, 겨울이 끝나면…… 떠나라는 말이다.

내가 원했던 말이었음에도, 내 심장은 힘없이 쪼그라들고 갈라졌다.

“난 베아투름의 영주야. 갑자기 부인을 보내려면 백성들에게 설명할 명분이 있어야지.”

“그 명분은 충분하잖아요.”

내가 가짜니까.

그가 피식, 웃었다.

“내가 한낱 여자에게 속았다는 걸 만천하에 알리라는 건가?”

웃음거리. 영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존경심마저 땅바닥에 처박혀 지나가는 개에게나 밟히는 꼴이 되겠지. 저녁 먹는 테이블 위에서 우스운 이야깃거리로 전락할 것이고, 검은 늑대도 별수 없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떠돌겠지.

‘검은 늑대니, 지옥의 사자니. 그런 명성이 전쟁터에선 적에게 공포를 심어준대. 그래서 전쟁에서 우위를 점령하는 거지.’

언젠가 쉴라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만약 그가 하찮은 여자에게 속았다는 게 알려지면 세상은 그를 비웃을 것이다. 적들은 그를 만만하게 보고 사기를 북돋울 것이고.

손끝이 떨린다. 이 대화를 주도하는 건 내가 될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이 방에 들어와 말 몇 마디 나눈 게 전분데, 난 그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골칫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그럼…….”

목이 막힌다. 숨을 가다듬고 다시 말을 잇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럼…… 어떻게…….”

“겨울은 여기서 지내. 그 후에…….”

방법을 생각해 본다고?

날 치워버릴 방법을 고안해 내겠다고?

그래, 결국 이렇게 되는 거였지.

화가 치민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무정한 당신에게.

“그럼, 진작 죽이지 그랬어요. 여기 오기 전에 죽여서 묻어버리지 그랬어요. 그리고 부인이 병들어 죽었다고 하면 그만이지. 왜 여기까지 부득부득 끌고 왔어요?”

남자의 까만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조금의 동정이나 자비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독한 마음이 솟는다. 주제도 모르고 뻔뻔한 마음이 솟아서 가시가 된다.

“아, 그땐 내가 당신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해서 그러지 못했겠군요. 그 잘난 기사도가 아이 가진 여자를 죽이는 짓은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은 가시가 되고 화살이 되어 날아갔다. 하지만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할 상대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무심한 눈동자에 생채기를 내고 싶다. 흔들림 없는 그의 얼굴을 긁어버리고 싶다.

“그런데 이젠 아이가 없으니…… 죽이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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