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혹시, 라이칸이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요?”
리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요. 공작님은 원래 자기 얘길 하지도 않고, 한다고 해도 와이엇이나 오웬에게 가끔 하죠. 그것도 정말 드문 일이에요. 그래서 와이엇과 오웬도 그저 눈치로 짐작할 뿐이에요. 그런데 집 안에만 있는 제가 뭘 알겠어요. 다만.”
말을 멈춘 리안나가 캘리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저, 저도 짐작을 해보는 거예요. 그동안 공작님이 성에 있지 않고 빙벽에서 지냈던 일, 이젠 성에 계시다는 것, 그리고 부인의 얼굴이 조금 편안해 보인다는 것, 이런 것들을 가지고 짐작하는 거죠. 두 분 사이에 뭔가 풀지 못한 것이 있구나.”
“점쟁이예요?”
리안나가 호호, 웃었다.
“아뇨. 그냥 경험자라고 해두죠. 와이엇과 제가 그냥 편안하기만 한 사이는 아니거든요. 결혼 전엔 정말 많이 싸우고 헤어지기도 많이 했죠. 우리가 집안끼리 협의해서 한 정략결혼이 아니라 서로 좋아서 만나다 결혼한 경우라서 그래요. 부인은 정략결혼을 한 거지만, 뭔가 더 복잡한 게 있는 것 같거든요.”
와이엇은 내가 가짜 신부라는 걸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베아투름에 들어오기 전에 라이칸이 함구령을 내렸다고 했다.
리안나에게 가짜 결혼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캘리는 가만히 있었다.
“남자다움이 넘치는 전사의 경우엔 여자에 대해 더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지위가 높은 신분의 남자는 여자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죠. 워렌 공작님처럼 매력적인 남자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요. 그래서 자기 맘대로 안 되는 게 있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거예요. 한 번도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건 없었을 테니까요.”
“리안나. 난…….”
막상 입을 열었는데 말이 안 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골라지지가 않는다.
리안나가 생긋 웃었다.
“제게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부인이 알아주셨으면 해서요.”
“뭘요?”
“공작님이 여자를 다루는 일에 미숙하다는 걸. 자기 마음 표현도 할 줄 몰라 큰소리만 치는 어린 소년쯤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부인이 도리어 공작님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아시게 될 거예요.”
캘리는 미소를 지었다. 라이칸을 어린애 다루듯 하라니.
“이것도 리안나의 경험담인가요?”
“맞아요. 저도 와이엇을 그렇게 다뤘고, 지금도 그렇게 다루고 있답니다. 솔직히, 와이엇은 진짜 어린아이 같잖아요. 못 말리는 악동이죠.”
결국 캘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두 여자는 깔깔, 오랜만에 소녀처럼 웃음을 터트리며 각자의 남편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
리안나를 배웅하고 안으로 들어온 캘리는 이 층으로 가려다가 문득 탑 안이 오늘따라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지나가는 하인을 불러 세웠다.
“이보게.”
“예. 마님.”
“라일라는 어디 있지?”
“아, 라일라는 과일을 구하러 마을에 나갔습니다.”
“과일?”
“예. 신선한 과일이 다 떨어져서.”
“그래? 그럼, 다른 하녀들은?”
“방에서 겨울에 쓸 침구를 만들고 있을 겁니다. 얼마 전에 상인들이 가져다준 모포로 이불을 만든다고 합니다.”
“어느 방이지?”
“부엌이 있는 복도 끝방입니다.”
“그래. 알았어. 일보게.”
하인을 보낸 캘리는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할 일도 없는데 바느질이라도 도울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게 정말이야?”
문이 열려 있었다. 좁은 문틈으로 하녀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 앞에는 모포가 잔뜩 쌓여 있었다.
“공작님의 말이 그 여자 집 마당에 서 있다고?”
캘리는 문을 밀려다가 흠칫, 멈췄다.
“그래. 나만 본 게 아니라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본 자들이 있대.”
“뭐야? 그럼, 공작님이 나탈리 아가씨의 집에 드나든다는 거야?”
캘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런 거겠지? 공작님의 말이 거기 있으면 공작님도 거기 있는 거겠지.”
“세상에. 공작님은 안 그러실 줄 알았는데…….”
“안 그런 남자가 어딨어? 다들 그런 거지. 사실.”
갑자기 하녀가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열려 있는 문틈으로 다 새어나갔다.
“공작님은 부인과 잠자리를 하지 않는 것 같아.”
다른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공작님은 매일 밤, 집무실 뒤쪽 방에서 주무셔. 내가 그 방을 치우거든.”
“대체 왜? 두 분, 사이가 좋은 거 아니었어?”
“모르지. 어쩌면 부인이 밤일에는 소질이 없는 걸 수도 있고, 보기보단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고. 사실, 나탈리 아가씨는 여자가 보기에도 감탄스러운 몸이잖아. 가슴도 크고, 엉덩이도 크고.”
“하긴. 어떤 목석같은 남자라도 그런 여자를 안고 싶을 거야.”
“우리끼리 하는 얘기지만, 내 생각엔, 나탈리 아가씨가 그동안 쭈욱 공작님의 침대를 데워준 게 아닌가 싶어. 부인이 오기 전에도 말이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난 아가씨가 공작님 방에서 나오는 걸 한 번도 못 봤어.”
“보지 않았다고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지. 나탈리 아가씨는 언젠간 자기가 공작부인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잖아. 그렇게 확신하면서 믿었던 이유가 뭐겠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지.”
“공작님이 밤마다 나탈리 아가씨를 불렀다?”
“그냥 내 생각이야. 그러니까 지금도 나탈리 아가씨 집을 드나드는 거지.”
“부인은 알고 있을까?”
“당연히 모르겠지. 부인은 성안에만 있는데 어떻게 알겠어? 누가 전해준다면 모를까.”
“누가 전해주겠어? 입 함부로 놀렸다간 채찍질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렇지. 근데, 나탈리 아가씨는 어디에 사는 거야?”
“광장 옆에 있는 저택이래. 그것도 공작님이 마련해 준 거라잖아.”
“그럼, 저번에 공작님이 귀한 모포를 가져가신 것도…….”
“아가씨 가져다주려고?”
“그렇지.”
“아이고, 우리 공작부인, 불쌍하다.”
“그래. 같은 여자로서 안됐어. 하지만 어쩌겠어. 여자 팔자가 그런걸. 귀한 신분이든 뭐든, 남편이 다른 여자 보는 건 뭐라 할 수가 없어. 그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
“그럼, 오늘도 부인은 혼자 밤을 지새우겠다.”
“왜?”
“아까 잠깐 들었는데, 오늘 공작님이 안 들어오신대. 스리디오 님이 말하기로는, 마을에서 기사들과 같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밤새 술을 마실 거라고 하셨거든. 근데, 내 생각엔, 그렇게 말씀만 하시고 나탈리 아가씨의 집으로 가신 것 같아. 아까 마을에 다녀온 안나가 그러는데, 나탈리 아가씨가 와인을 사는 걸 봤대. 오늘따라 굉장히 예쁘게 치장을 했다더라.”
“아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부인만 불쌍하게 됐네.”
캘리는 조용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런데 치맛자락이 문에 걸려 소리가 났다. 순간, 하녀들이 동시에 이쪽을 본다.
“마님!”
캘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라일라를 찾고 있어.”
“아, 저기…… 라일라는 마을에 나갔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럼, 라일라가 오면 내 방으로 오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당황한 그들의 눈빛을 외면하고 몸을 돌렸다. 방으로 가는 그녀의 심장이 둥둥, 거칠게 날뛰고 있었다.
***
“이봐.”
빨래 바구니를 들고 걸어가던 사라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마님.”
캘리는 다가가서 물었다.
“네가 사라니?”
“예. 마님.”
“네가 나탈리 아가씨와 꽤 친했다던데.”
“예? 아, 예…… 조금…….”
“혹시 나탈리가 살고 있는 집이 어딘지 알아?”
“예?”
“날 거기로 안내해 줘.”
“지, 지금요?”
“그래. 지금.”
“날이 어두운데……. 정 가시려면, 빅토리아 님을 불러서…….”
“아니. 너와 단둘만 갈 거야.”
“하지만, 성을 지키는 위병들이 있습니다.”
“성 밖으로 나가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밖에 마차를 준비해 줘.”
“몰래 나가시려고요?”
“그래.”
“마님. 영주님이 아시면…….”
“모를 거야. 잠깐만 갔다가 바로 돌아올 거니까.”
캘리는 은돌 하나를 내밀었다.
“마부를 깨워서 마차를 대기시켜.”
사라의 눈이 반짝였다.
“예. 알겠습니다.”
***
“자, 자. 한 잔 하십시오. 칸.”
와이엇이 다시 맥주가 가득 든 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걸 본 오웬이 인상을 썼다.
“이봐. 그만해. 칸은 오늘 탑으로 들어가셔야 한다고.”
“거참. 결혼도 못 한 총각은 빠져. 사내가 술을 마시다 보면, 외박도 하고 그러는 거지. 뭘 꼬박꼬박 들어가?”
“네가 이렇게 칸을 붙잡고 있는 게 더 도움이 안 될 것 같은데.”
“모르는 소리. 부부간엔 조금씩 긴장감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자네는 맨날 아내에게 쩔쩔매나? 싸울 때마다 잘못했다고 하는 쪽은 자네잖아.”
“그건 당연한 거지. 여자와 싸우고 길게 가봐야 남자만 손해라고. 때로는 자존심을 굽히고 숙이는 것이 실속을 차리는 거야. 여자는 아무리 화가 나도 남자가 잘못했다, 숙이고 들어가면 풀어지게 돼 있어.”
라이칸이 못 미더운 듯 쳐다보자 와이엇이 인상을 팍, 썼다.
“진짭니다. 리안나에게 물어보세요. 내 말이 거짓인가.”
“그래서? 자네 말은 아무리 풀리지 않는 여자의 화도 남자가 숙이고 들어가면 다 해결된다?”
“예. 대신 진심이어야 합니다. 여자들은 남자가 잘못했다고 하면 뭘 잘못했냐, 따지길 좋아합니다. 그때 말을 잘못하면 더 큰 싸움으로 번지죠. 그러니, 말을 잘해야 합니다.”
“어떻게?”
라이칸이 묻자 오웬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라이칸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여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줘야 합니다. 그걸 잘 알아내는 게 중요하죠. 대부분의 경우, 여자가 말하는 걸 새겨들으면 거기에 답이 있어요.”
라이칸이 인상을 쓰자 와이엇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여자가 원하는 답을 해주고, 잘못했다, 내가 더 잘하겠다,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다, 너 없인 못 산다.”
우웩, 옆에 있던 제프리가 토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와이엇이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칸. 결혼 안 한 놈들과는 상종을 마십시오. 이놈들은 절대 이해 못 하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오웬이 라이칸의 옆으로 와서 섰다.
“칸. 입구 쪽을 보십시오.”
와이엇과 칸이 동시에 선술집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칸의 눈빛이 가늘어지고 와이엇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나탈리 아가씨잖아. 저 아가씨가 여길 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