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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가 재빨리 경계했지만 그들이 내내 자신을 도와주던 마을 여자들이라는 걸 알고 얼른 검을 내렸다. 여자들 중 하나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밀었다.
“마님. 이거 좀 드셔보라고 가져왔습니다.”
주황색으로 동글동글하고 작은 것이 바구니에 잔뜩 쌓여 있었다. 처음 보는 거였다.
“저희 베아투름에서만 나는 과일인데, 즙이 새콤하고 맛있습니다. 오늘 마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셔서 마을 주민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준비했습니다.”
“마님. 이것도 드셔보세요. 저희 집에서 만든 빵인데, 부드럽고 쫄깃합니다.”
“이것도요. 마님. 어제 잡은 돼지의 넓적다리인데, 요리사에게 가져다주시면 잘 구워줄 겁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빅토와 기사들이 그들을 막아서야 할 정도였다.
“마님 덕에 저희 남편이 살았습니다.”
“예. 공작부인께서 빠르게 조치를 해주시고, 몸소 저희를 보살펴 주셔서 죽은 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동조하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캘리는 심장이 찌릿하게 울리는 걸 느꼈다. 목이 메고 코끝이 찡했다.
빅토가 웃으며 묻는다.
“전부 받아서 챙길까요?”
캘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주민들의 정성이니, 다 받아야겠어요.”
사람들이 앞다투어 가져온 물건들을 기사에게 전했다. 말에 올라탄 캘리는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미소를 보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빅토.”
“예. 부인.”
“나, 정말 나오길 잘한 것 같아요.”
어둠 속에서 빅토가 웃는 것이 느껴졌다.
“예. 부인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오늘 일로 사람들이 모두 부인을 사랑하게 될 겁니다.”
다음 날, 아침. 캘리는 성의 창고를 열어 비축해 둔 식량의 일부를 꺼냈다. 잠에서 덜 깬 요리사를 닦달해 많은 양의 음식을 만들어서 캠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밤을 새우다시피 한 주민들과 부상자들에게 부드러운 빵과 고기 스튜를 배급하자, 또 한 번의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들을 수 있었다.
캘리는 그날 하루를 온통 부상자들을 돌보는 일에 몰두했다.
지금만큼은 그녀도 진정한 베아투름의 사람이었다.
***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쏟아져 나온다. 밖의 기온도 차기는 마찬가지지만 이곳, 지하 미궁은 한겨울처럼 서늘한 냉기가 가득했다. 녹아서 흘러내리던 물줄기는 그대로 얼어붙어 기이한 형태를 이루며 사방이 뾰족한 송곳처럼 솟아 있었다.
이제 겨울의 초입. 아직 혹한은 아니었다. 하지만 얼음산을 지척에 둔 빙벽, 그것도 해가 들어오지 않는 땅 아래는 이미 한겨울이나 마찬가지였다.
빙벽은 원래 존재하던 얼음산과 연장해서 쌓았다. 그래서 안쪽에서 밖으로 통하는 미궁은 반은 얼음이고 반은 돌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얼음산은 사시사철 미끄러운 절벽으로 이루어져서 어떤 종족도 감히 타고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연의 방벽.
거기에 인위적으로 돌을 쌓아 만든 빙벽을 연결함으로써, 마물들이 사는 디아르고와 베아투름을 철저히 구분 짓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칸.”
먼저 앞서가던 와이엇이 심각한 목소리로 불렀다. 라이칸은 빠르게 그쪽으로 걸었다. 와이엇이 서 있는 아래쪽 물가에 머리통 하나가 떠 있었다.
“고블린입니다.”
와이엇이 말하자, 뒤따라온 오웬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벌써 세 번쨉니다. 디콘스 전역에서 고블린이 사라진 지가 언젠데…….”
“디콘스뿐만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사라졌지. 마녀와 같이. 근데, 그 전에도 추운 지역엔 고블린이 없었잖습니까. 난 이렇게 추운 곳에서 고블린이 살 수 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와이엇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오웬은 몸을 낮춰서 머리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예전 고블린과는 좀 다른 것도 같습니다. 피부가 두껍습니다. 털도 많고. 마치, 추위에 적응하기 위해 변한 고블린 같습니다.”
“뭐야? 또 돌연변이라고?”
와이엇이 놀라서 묻자 오웬이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라이칸의 얼굴도 심각했다. 오스피아에서부터 지금까지 꽤 여러 번의 돌연변이를 목격했다. 들개는 사람이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라 해도, 다른 것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게다가 들개도 처음의 목적과 다르게 더 공격적으로 변했고.
“이렇게 한꺼번에, 대륙 전체에서, 돌연변이들이 막 생길 수가 있나?”
와이엇이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오웬이 대꾸했다.
“불가능하지.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오랫동안 계획한 게 아니라면.”
그러자 와이엇이 인상을 썼다.
“계획했다고? 누가?”
“나도 모르지. 그런데, 고블린이 나타난 걸 보면…….”
오웬이 칸을 보았다. 그 줄인 말이 뭔지 안다는 듯, 라이칸의 얼굴도 어두웠다.
“설마, 그들의 짓이라고?”
와이엇이 놀라서 물었다.
마녀.
고블린은 마녀가 부리는 마물이었다. 아니,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마녀를 몰아낼 때, 고블린도 같이 몰살시켰다. 사이탄의 숲에 마녀를 몰아넣으면서 고블린도 따라갔다는 소리가 있긴 하지만, 그것도 확실치는 않았다. 어쨌든, 고블린이 다시 나타난 건, 그것도 이런 추운 지역에 나타난 건, 의외의 일이긴 했다.
“밖을 살펴봐야겠어.”
라이칸이 나직하게 말하자 와이엇이 눈을 크게 떴다.
“빙벽 밖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이칸의 눈은 미궁 끝을 향해 있었다. 지금은 굳게 닫혀서 빛 한 줄기 보이지 않지만 저기로 나가면 디아르고였다.
“겨울입니다. 오우거 놈들이 나와서 설치고 있을 게 뻔한데…….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 나가보시죠.”
와이엇이 진지하게 충언했지만 라이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떤 상황인지 파악해야지. 고블린이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면, 어딘가에 통로가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린 고블린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또 어떤 돌연변이가 있는지 몰라. 그렇게 겨울을 맞을 순 없어.”
단호하게 말한 라이칸은 고개를 돌렸다.
“오웬.”
“예. 칸.”
“성의 사고에 대한 소식은 왔나?”
“예. 방금 내려오기 전에 소식을 받았습니다. 사고 현장은 빠르게 잘 수습됐다고 합니다.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고 부상자들도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답니다. 그리고…….”
오웬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백성들 사이에서 공작부인에 대한 칭송이 대단하답니다.”
순간, 라이칸의 짙은 눈썹이 휙, 올라갔다. 놀란 와이엇이 먼저 물었다.
“공작부인이 왜?”
오웬은 칸을 향해 말했다.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부인께서 달려가셨는데…….”
“성 밖으로 나갔다고?”
칸이 인상을 쓰며 묻자 오웬이 얼른 설명했다.
“예. 호위대장이 말렸지만 부인이 반드시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호위대를 두 배로 늘려서 나갔답니다. 사고 수습은 부인의 공이 아주 컸답니다. 캠프를 설치하게 하고 부상의 중하고 경한 자를 나누어 빠르게 치료를 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인이 직접 나서니 주민들도 너나없이 나서서 도왔고, 치료사들도 부인의 명을 따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답니다. 모두들, 부인의 훌륭한 대처와 몸을 사리지 않고 부상자를 돌보는 모습을 보고 대단히 감탄을 했다고 합니다.”
아주 미세하게, 라이칸의 입꼬리가 움직였다. 와이엇이 그걸 보고 뭐라고 하려 하자 오웬이 재빨리 팔꿈치로 찔렀다. 그래도 와이엇은 입이 근질거리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이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부인께서 아주 적절한 조치를 하셨네요. 공작부인답게.”
칸을 보는 와이엇 표정은 ‘그리 좋으십니까?’ 하며 놀리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칸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웬을 보았다.
“자넨 지금 성으로 가.”
“예? 사고 처리가 잘되고 있다는데, 왜…….”
“가서 나머지 정리를 지휘해. 그리고 내 아내는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공작부인이 훌륭하게 일 처리를 하긴 했지만 칸은 부인의 안위가 더 걱정되는 거였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오웬이 대답하자 칸은 와이엇을 보았다.
“고블린이 들어온 틈을 찾아서 막아. 그리고 정예 기사, 스무 명을 모아. 우린 빙벽 밖으로 나간다.”
휙, 몸을 돌린 라이칸은 들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
천막 안으로 엘프 전사가 들어오자, 캘리는 깜짝 놀랐다.
“오웬.”
반가움이 일었다.
“벌써 돌아온 거예요? 내일쯤이나 돌아올 줄 알았는데.”
뒤로 눈길을 주는 캘리를 보며 오웬이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온 겁니다. 칸께선 며칠 더 빙벽에 머무르실 겁니다.”
캘리의 얼굴이 실망으로 흐려졌다.
“며칠 더요? 왜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아닙니다. 조사해 볼 것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나저나, 부인의 활약상을 들은 칸께서 무척 대견해 하셨습니다.”
순간, 캘리의 눈빛이 반짝이며 볼이 발그레해졌다.
“별것도 아닌데요, 뭘.”
“아니요. 훌륭한 일을 하신 겁니다. 오다가 들으니, 주민들 칭송도 대단하더군요.”
“정말 전, 별로 한 게 없어요. 말리와 치료사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서 도와준 덕분이에요.”
그녀가 한사코 손을 내젓자 오웬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빅토가 슬며시 끼어들어 말했다.
“칸께서 걱정하고 계시답니다.”
빅토의 말에 오웬까지 거들었다.
“예. 칸께선 부인이 외벽에 있다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십니다. 여긴 외부인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곳이니까요. 아시다시피, 베아투름으로 오는 길에 습격이 있었고, 그건 부인을 노리는 자들 짓이었기에 칸의 걱정은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 칸이 돌아오기 전까진 안전한 곳에 계셔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 일이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는데…….”
“그래서 저를 보내신 겁니다. 지금부턴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정, 걱정이 되시면 스리디오를 아침저녁으로 보내셔서 상황을 보시지요. 제가 영 일 처리를 못 하면 그때 나오셔도 되고요.”
“아뇨. 오웬을 못 믿는 건 아니에요.”
“예. 압니다. 그리고 사실, 오면서 잠깐 둘러봤는데, 뭐 처리할 것도 없더군요. 부인께서 다 잘해놓으셔서.”
“그렇지. 그냥 다 차린 식탁에 숟가락 하나 들고 나타난 거지.”
빅토가 이죽거리자 오웬이 인상을 썼다.
“호위대장. 그대는 칸의 명령을 지키지 못한 벌을 받게 될 거야. 부인이 주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을 지키지 못했잖아.”
“난 명을 지키려고 했어. 근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래?”
“그래도 호위 기사의 임무는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건 인정해야지.”
“젠장. 그래. 인정해. 하지만 난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부인을 막지 못했을 거야. 부인이 사고 현장에 나온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일이니까.”
빅토가 어깨를 펴고 단호하게 말하자 캘리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빅토.”
“아닙니다. 부인. 전 정말 부인께 감명받았는걸요.”
둘이 미소를 짓는데 오웬이 찬물을 끼얹었다.
“어쨌든 명을 어겼으니 벌을 받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