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90)화 (90/159)

90

그가 몸을 반듯하게 하고 누우면서 동시에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캘리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품 안에 안겼다. 단단하면서도 매끄러운 근육에 여린 뺨을 문지르자 냄새가 난다.

라이칸의 냄새.

캘리는 그 냄새를 더 깊게 들이마셨다. 기분 좋게 나른하게 늘어져 그의 품에 안긴 지금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때였다.

문득, 머릿속으로 스리디오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칸에겐 특별한 늑댑니다.’

캘리의 손가락이 그의 갈비뼈 언저리를 부드럽게 배회했다. 그러다가.

“라이칸.”

“음?”

그녀의 머리칼에 입술을 묻고 있던 그가 웅얼거리듯 대꾸했다.

“루센 말이에요.”

“루센?”

“늑대 아기.”

그가 쿡, 웃었다.

“너에겐 짐승의 새끼도 그냥 아기군.”

그녀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그래서?”

“스리디오가 그러던데, 루센의 아비가 당신과 특별한 관계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캘리는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이칸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현재가 아닌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날아간 것 같았다.

혹시…… 당신이 늑대 무리에서 태어난 것과 관련이 있어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기다렸다. 그동안 내내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던 건, 그가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위험한 곳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건 분명, 아픈 기억일 테니까.

묵직한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봄이 되면 겨우내 설쳐대던 오우거나 설인들도 번식을 하거나 무리를 단속하느라 바쁘고. 덕분에 피 튀기는 영역 싸움은 잠시 멈추지.”

“일시적인 평화네요.”

“디아르고 안만 보면 그렇지. 그런데 우린 더 긴장해야 될 때야.”

“왜요?”

“디아르고 북쪽에는 야만인들이 살고, 놈들은 디아르고를 손쉽게 넘어서 우릴 공격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니까.”

“아.”

“오래전에, 아르 왕의 출전 명령으로 동부의 귀족을 치러 갔던 내 아버지는 베아투름으로 돌아오고 있었어. 겨울바람이 채 가시지도 않았던 때였는데, 야만족 몇몇이 디아르고를 넘었지.”

캘리의 눈에 두려움이 일었다.

야만인들에 대해선 지옥의 사자만큼이나 공포스러운 소문만 들었다. 검은 늑대라고 불리며 대륙의 전사로 알려졌던 라이칸은 그래도 실체가 있는 사람이었고 아르 왕의 가신이었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었고, 실체를 본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야만인들에 대한 상상은 두려움의 극치였다.

“당신, 야만인들을 본 적 있어요?”

그가 희미하게 웃는다.

“당연하지. 디아르고에서 몇 번 마주치기도 했는데.”

캘리의 눈이 커졌다.

“소문처럼 그렇게 잔인한가요?”

“소문이란 건 부풀려지기 마련이라는 걸 알 텐데?”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그 자신에 대한 소문이 어떠했는지 떠올려보면 답은 나온다.

“그렇게 무서운 놈들은 아닌 모양이죠?”

“아니. 위험한 놈들이야. 놈들은 짐승처럼 빨라. 목표를 정하면 목숨을 걸고 달려들지.”

“그들은 갑옷을 입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그래. 놈들은 전투에서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몸은 가볍게, 검은 무겁게 들지.”

“당신은 마물들보다 야만인들을 더 경계하는군요.”

그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놈들에겐 체계가 있어. 마물들처럼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조직을 갖추고 있다는 거지. 그건 전략과 전술을 펼친다는 거야. 그래서 내 어머니를 납치했던 거고.”

“당신 아버지에게 치명타를 입히려고?”

“그래. 어머니는 그때 만삭이었어. 때를 맞춰서 아버지가 도착했지만 놈들은 어머니를 끌고 디아르고로 도망친 뒤였어. 아버지는 놈들을 쫓기 시작했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오우거까지 달려들자, 놈들은 결국 어머니를 버렸지.”

아주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어머니는 늑대 숲으로 도망쳤어. 무거운 몸으로 오랫동안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숨을 곳이 많은 숲이 낫다고 판단했겠지. 나중에 어머니께서 그러시더군. 며칠 동안 숲을 헤매던 어느 날, 출산을 하고 있는 늑대를 만났다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나를 낳았어. 그리고 갓 태어난 늑대 새끼들 틈에 나를 끼워 넣었다더군.”

알 것 같았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뭐라도 해보고 싶었을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나는 생긴지도 몰랐던 아이를 잃었을 때도 그토록 마음이 쓰렸는데, 그분은 열 달 동안 배 속에 품고 있었을 아이를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절박했을까.

“암컷 늑대는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그 틈에 내가 끼어 있었지만 밀어내지 않았어. 마치, 자기 새끼인 양 품고 젖을 먹였다더군. 수컷은 나와 어머니를 보고 죽이려 했지만 암컷이 내가 자기 새끼인 줄 알고 도리어 수컷에게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지.”

캘리는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게 가능해요?”

“글쎄. 가능했으니까 내가 지금껏 살아 있는 거겠지.”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그럼, 당신은 늑대의 젖을 먹고 살았어요?”

“그랬지. 다른 새끼 두 마리와 함께 지내면서. 나중에 알았지만, 내게 젖을 먹인 암컷은 다이아울프였고, 그 짝은 은빛 늑대였어. 개체 수가 적고 다이아울프보다 포악하고 큰 종족이지. 그 은빛 늑대는 어머니와 나를 자신이 이끄는 무리 속에 넣어주었고, 우린 그렇게 늑대와 함께 살았지.”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니는 내게 인간의 말을 쓰게 했고, 예절을 가르쳤고, 내가 워렌 공작의 유일한 핏줄이며 베아투름의 영주라고 끊임없이 가르쳤어. 늑대인 동시에 워렌 공작의 후계자였지. 비록, 난 늑대로 사는 게 더 좋았지만.”

“더 좋았다고요?”

캘리는 그 삶이 어떤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 어떻게 늑대와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지도.

그가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이는 거라곤 늑대뿐이었으니까. 네 살이 될 때까지 난 내가 늑대인 줄 알았거든.”

그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캘리는 웃을 수 없었다. 거긴 위험했을 것이다. 아무리 다이아울프 수장의 보호를 받았다고 해도.

왜 더 일찍 성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려는 찰나, 그가 답을 내놓았다.

“날 낳은 순간부터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았어. 움직이는 시간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더 많았지.”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었군요.”

은빛 늑대 무리를 떠나는 즉시 다른 늑대의 공격을 받았을 테니까. 야생에서 짐승들은 약해진 사냥감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니까. 놈들에게 병든 워렌 공작부인은 손쉬운 먹잇감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것도 있었지만, 은빛 늑대가 사는 은신처는 찾기가 힘들어. 숲속에서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이니까.”

그래서, 돌아가신 워렌 공작도 부인을 찾을 수 없었던 거였다. 만삭의 아내를 찾으려고 디아르고를 헤집으며 거친 괴물들과 맞서 싸웠을 그분의 심정이 얼마나 암담했을까.

“아버님도 몹시 힘들었겠어요.”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이젠 나도 그 심정을 완벽히 이해하지.”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나를 아끼고 있다는 걸 이젠 안다.

다시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같이 태어난 수컷 늑대와 같이 어울리면서 컸어. 어머니와 난 녀석을 샤라고 불렀지만 그건 우리끼리만 통하는 이름이었지. 아, 물론 녀석도 내가 샤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건 알았을 거야. 가끔 내가 불렀을 때, 돌아보기도 했으니까.”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난 녀석과 다니면서 빠르게 달리는 법과 위험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법, 숲을 통과하고 적에게 맞서는 법을 터득했지.”

“스리디오 말로는 은빛 늑대가 자가 치유 능력이 있대요.”

“그래. 중상을 입지만 않으면.”

“중상을 입으면, 치유가 되지 않아요?”

“그렇다더군.”

“라이칸.”

“음?”

“은빛 늑대와 함께 살아서 당신도 자가 치유력이 있는 걸까요?”

“글쎄……. 난 은빛 늑대가 살던 그곳의 기운이 내게 스며든 게 아닌가, 생각해.”

“그곳은 어떤 곳인데요?”

“늘 안개가 자욱했고 공기는 서늘했지. 어머니는 신비로운 기운이 흐르는 곳이라고 했어. 안개 때문에 다른 무리의 늑대들이 침범하지 못했고. 물론 감히 은빛 늑대의 은신처를 노리는 늑대는 없었지만. 은빛 늑대는 디아르고 숲의 제왕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름대로 꽤 안전하게 잘 살았지. 성으로 돌아가라는 어머니의 유언만 아니었다면 난 아직도 그 숲에서 살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다른 종족과 싸우다 죽었거나.”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라이칸이 없다니. 그가 없는 삶은…… 이제 상상할 수가 없다.

“루센의 아비가 샤군요.”

“그래.”

그에겐 형제였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형제.

“내가 알아봤듯이, 녀석도 나를 알아봤어.”

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당신에게 새끼를 맡긴 거군요.”

그 은빛 늑대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인간이니까.

라이칸은 늑대의 새끼를 반드시 살리고 싶을 것이다. 이젠 캘리에게도 루센은 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내가 잘 보살필게요.”

당신을 위해서.

캘리의 눈은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다시 품 안으로 꼭 당겨 안았다.

***

루센은 정말 놀라웠다. 크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하룻밤 자고 나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정도였다. 빙벽에서 온 지, 겨우 삼 주가 지났을 뿐인데, 루센은 방 안이 좁다는 듯 에너지가 넘쳤고, 덕분에 쉴라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똥오줌을 아무 데나 싸는 건 그럭저럭 봐주겠는데, 쉴라가 아끼는 그물 침대라든지,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는 나뭇가지를 잘근잘근 씹어서 못쓰게 만들었고 벽마다 발톱 자국을 새기다 못해 닥치는 대로 부수고 망가트렸다.

“저 늑대 새끼를 당장 내 방에서 내보내!”

쉴라가 깃털을 곤두세우며 소리를 질렀고, 결국 루센은 쉴라의 방에서 쫓겨났다.

“스리디오. 이제 어쩌지?”

캘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지금도 루센은 드넓은 홀을 마구 뛰어다니고 있었다.

“호기심이 어찌나 강한지, 안 가는 데가 없어. 게다가 똑똑해. 벌써 자기 이름을 알아듣고 부르면 온다니까.”

게다가 다니는 곳마다 온통 긁어대고, 이도 나려고 그러는지, 닥치는 대로 물어뜯는다.

“한 달도 안 된 녀석인데, 정말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하네요. 겨울이 지나고 나면, 여느 늑대만큼이나 크겠어요.”

뒤에 서 있던 빅토가 중얼거리자 스리디오가 미소를 지었다.

“예. 웬만한 늑대만큼은 클 겁니다. 다이아울프니까 한참 더 클 거고, 은빛 늑대만큼 크려면 4년은 걸리겠죠.”

“4년이나? 제가 보기엔 몇 달 내로 다 커버릴 것 같은데요?”

빅토가 말하자 스리디오가 고개를 저었다.

“다이아울프만큼 크는 속도는 빠르지만, 그 후로는 크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듭니다. 제가 알기론, 은빛 늑대는 다 크는 데까지 4년은 걸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은빛 갈기도 그때쯤 돼야 진짜 멋지게 자라고.”

“그건 그런 것 같아. 갓 태어났을 때 보였던 은빛 갈기가 지금은 없어졌거든.”

캘리가 말하자 스리디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분간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은빛 늑대는 무리의 첫 우두머리가 되기까지 4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어요.”

“은빛 갈기가 나오면서 리더로 부상하는 건가?”

“예. 부인.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스리디오는 참 아는 것도 많아요.”

빅토가 웃으며 말하던 그때였다. 와장창, 커다란 소리가 울리자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