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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장창, 커다란 소리가 울리자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루센이었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또 사고를 친 거였다.
“맙소사. 저건 바다 건너 서역에서 온 은잔인데! 이놈!”
절대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던 스리디오가 얼굴이 벌게져서 루센을 쫓기 시작했다. 놀라서 그걸 보던 빅토가 쿡, 웃었고 캘리도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늙은 스리디오는 루센을 잡을 수 없었다. 도망가던 루센이 다시 비싼 장식품을 떨어트리자 스리디오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부인. 저 말썽쟁이 놈을 잡아주십시오!”
***
“자, 먹어.”
닭고기를 잘게 찢어서 푹 끓인 스튜를 내려놓자 루센이 와락 달려들어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캘리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식탐이 이렇게 좋으니까, 잘 자라는 거겠지. 근데, 루센. 너무 빨리 자라진 마. 네가 커버리면 난 너를 보내야 된다고.”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녀석은 나무 그릇까지 먹어버릴 기세로 요란하게 핥아대고 있었다. 꽤 많은 양을 가지고 왔는데 벌써 바닥이 보일 지경이었다. 결국, 순식간에 다 먹어치운 녀석이 그녀를 쳐다본다. 더 달라는 듯 애처로워 보였다.
캘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안 돼. 그만 먹어. 저녁에 또 줄게. 대신, 착하게 굴어야 돼. 넌 벌써 쉴라에게 쫓겨나서 갈 곳도 없단 말이야.”
“결국 쫓겨났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캘리는 놀라서 몸을 홱, 돌렸다.
칸.
그를 보자 그녀의 눈이 반짝거렸다.
라이칸이 다가와 빈 그릇을 핥고 있는 루센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어제보다 더 컸군.”
“나날이 커요. 조금 전엔 귀한 은잔을 떨어트리고 장식품을 깼어요. 스리디오가 절망에 빠졌고, 쉴라는 다신 자기 방에 데리고 오지 말래요. 완전 말썽꾼에 불청객이 돼버렸어요.”
말을 그렇게 하지만 캘리의 목소리에는 애정이 넘쳤다.
“정원으로 데려가.”
“네?”
“빛의 정원.”
순간,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거기라면 이 애를 안전하게 가둬둬도 되고, 넓으니까 갇힌 기분도 안 들 거예요.”
캘리는 폴짝 뛰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당장 루센의 침실을 만들어야겠어요.”
휙, 몸을 돌리려는 그녀를 그가 재빨리 낚아채서 당겼다. 놀라는 그녀의 입술로 고개를 숙이며 그가 속삭였다.
“하던 건 마저 하고 가야지.”
“라이칸.”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며 밀었지만 소용없었다.
***
말리의 오두막에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물론 조건은 있었다. 마차를 타야 하고, 호위대를 반드시 대동할 것. 그리고 오두막 밖으로 다니지 말 것.
그래도 성 밖에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캘리는 마차의 작은 창을 통해 눈이 내린 들판을 바라보았다. 베아투름을 둘러싸고 있는 높고 낮은 산들도 며칠 동안 계속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네가 진짜 마녀라고 생각해?”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캘리는 고개를 돌렸다. 쉴라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역시 저 애는 직설적이다. 물론, 난 이게 편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하지 못하는 말도 쉴라에겐 할 수 있으니까.
“잘 모르겠어. 하지만 불을 다룰 줄 아는 건 마녀로 몰린다고 하니까……!”
마차가 크게 덜컹거리는 바람에 캘리의 몸이 공중으로 훌쩍, 뛰었다가 내려왔다. 밖에서 빅토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마부! 말, 제대로 몰아!”
버럭, 소리를 지른 후, 마차 옆으로 다가온 빅토가 말 위에서 자세를 낮추더니 안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캘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커다란 돌이 있는 걸 마부가 미처 못 본 모양입니다.”
“난 괜찮으니 마부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요.”
빅토가 웃는다.
“예. 부인.”
그러더니 마부에게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좀 더 신중하게 말을 몰아.”
“예. 대장님.”
마부의 목소리도 경쾌했다.
“저 여잔, 여자 같지가 않아.”
쉴라가 부리를 삐죽이며 중얼거리자 캘리는 눈을 흘겼다.
“그렇게 말하지 마. 빅토도 여자야.”
“저게 어디로 봐서 여자야? 키도 크고 사납고 성질머리도 더러운 것 같던데. 사람들이 그러더라. 호위대장은 평생 혼자 살 거라고. 데리고 살 남자가 없을 거래.”
“빅토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
“물론 있겠지. 하지만 저렇게 거친데, 어떤 남자가 감히 호의를 보이겠어?”
“글쎄…… 어딘가엔 그런 용감한 사내가 있겠지.”
캘리는 오웬의 늠름한 모습을 떠올렸다. 빅토와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는데, 어째 그 모습이 어린아이들이 서로 관심이 있을 때, 괜히 건드리고 티격태격하는 것과 같아 보였다.
둘이 참 잘 어울린다. 하지만…….
캘리는 쉴라를 보았다.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쉴라가 시큰둥하게 대꾸했지만 캘리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마법으로 돌연변이도 만들어내잖아. 그럼, 하프 엘프도 아이를 낳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마법도 한계가 있어. 돌연변이는 존재하는 걸 변형시키는 거지만, 아이는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거잖아. 그건 신의 영역이야.”
쉴라가 단호하게 말하자 캘리는 눈을 흘겼다.
“그냥 해본 말이야.”
“넌 이제 하프 엘프도 아닌데 그런 건 왜 걱정하는데?”
“그냥. 다들 행복했으면 해서.”
“왜? 네가 마녀고, 마녀는 아이를 못 낳을까 봐?”
캘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난 이미 아이를 가져본 적이 있어. 게다가 내가 마녀라면, 그건 심각한 문제야.”
“네가 마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불을 만들어내는 건 심각하다고 생각해. 여기가 베아투름이고, 공작이 여길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으니까 네가 살아 있는 거야. 넌 베아투름 밖으로 나가면 바로 화형당할걸?”
정말 밉다.
“넌 정말 말을 막 해.”
“사실인데 뭘. 너랑 나 사이에 숨기고 아닌 척하고 그러는 게 나아? 적어도 하나쯤은 널 위해 현실을 말해 줄 이가 필요하잖아.”
미운데 맞는 말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뭐, 여기에만 있으면 괜찮아. 공작이 널 지켜줄 거잖아.”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다. 봄이 오면 왕이 움직일 것이다.
하아.
캘리가 긴 한숨을 쉬자 쉴라가 쯧쯧, 혀를 찼다.
“넌 그냥 불 다루는 방법이나 익혀. 아무 데서나 막 불 만들어서 너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지 말고. 네가 위험해지면 공작도 곤란해지잖아.”
“알아. 그래서 말리에게 의논하러 가는 거야.”
“그 오드아이 노파가 그런 쪽으로 뭘 좀 아나?”
“내 생각인데…….”
“그 노파가 마녀구나!”
쉴라가 끼어들어 소리쳤다. 캘리는 화들짝 놀라서 속삭였다.
“조용히 해. 그리고 난 말리가 마녀라고 한 적 없어.”
“그래. 하지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 난 말리가 그보다 더 비밀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해.”
“뭐? 어째서?”
“모르겠어. 나이를 아는 이도 없고,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말리가 만든 기록지는 사람이 일평생 만들어도 만들 수 없는 양이야. 몇 대를 걸쳐서라면 모를까.”
“그 노파가 불멸의 존재라고?”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난 말리가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
“뭐, 너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익히는 것도 좋지.”
“그래.”
“정 안 되겠으면 그냥 평생 베아투름 밖으로 나가지 마. 공작이 널 지켜줄 거야. 그러는 게 나도 편하고. 어쨌든, 공작은 좀 괜찮은 인간이야. 내가 인간을 이렇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너의 공작은 살짝 인정해 줄게. 검은 늑대는 종족을 불문하고, 가장 뛰어난 전사인 건 확실해.”
***
“이건 독근이라는 겁니다.”
말리의 말에 캘리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독근?”
“예. 사리풀처럼 최상위급의 맹독이지요.”
“사리풀은 고통을 잊게 해주는 약초로도 쓰이잖아.”
“예. 이건 좀 더 치명적입니다. 소리 없는 살인자이죠.”
“소리 없는 살인자?”
“이걸 달인 물은 색도 없고 냄새도 없습니다. 게다가 바로 어떤 현상이 일어나지도 않죠.”
“그럼?”
“서서히, 아주 천천히 스며듭니다. 내 몸이 이 독에 취해서 죽음에 가까이 간다는 걸 느끼지도 못합니다.”
“증상이 전혀 없다고?”
“아뇨. 증상은 있습니다. 기운이 없고 혈색이 안 좋아지죠.”
“평범하군.”
“예. 독으로 인한 증상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죠. 그러다가 독이 온몸에 퍼지면 기침과 마비 증상이 일어납니다. 그땐 이미 손을 쓰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거죠.”
“그럼, 그 전에 발견하면 살릴 수 있나?”
“예. 마비 증상이 일어나기 전에 해독제를 쓰면 치유가 가능하긴 하지만 수명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캘리는 말리가 들고 있는 식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약초와 모양이 비슷했다.
“다른 약초와 섞여 있으면 구분이 안 되겠어.”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죠.”
“그래?”
“이 약초의 주변에 있는 풀을 보면 압니다.”
“어떻게?”
“뿌리까지 독을 품고 있는 약초라 근처에 있는 식물들도 죽이죠. 뿌리로 전해진 독이 줄기를 타고 올라 잎끝에서부터 갈색으로 타기 시작하죠.”
“그럼, 잎끝이 갈색으로 변한 풀이 있으면 근처엔 이 독근이 있는 거겠네.”
“예. 그렇습니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은 전혀 모릅니다. 웬만한 치료사들도 잘 모르는 독초지요.”
“치료사들도 모르는 약초가 사람을 그렇게 서서히 죽이는 거라니, 무섭네.”
“예. 그래서 소리 없는 살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오랫동안 중독시켜 죽이는 거라, 누가 한 짓인지 알아내기도 힘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