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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읽을 수 있지?”
오두막 안으로 들어온 말리가 귀퉁이가 찢어진 양피지 하나를 내밀었다. 불에 탄 것 같은 흔적이 있고 찢어졌던 걸 도로 꿰맨 흔적도 있었다.
넝마같이 후줄근한 양피지를 보며 제프리는 의아한 듯 물었다.
“이게 뭡니까?”
“한번 봐.”
말리의 재촉에 제프리는 양피지를 받아서 조심스럽게 펼쳤다. 순간, 제프리의 눈이 화악 떠졌다.
“이건……?”
제프리는 얼른 고개를 들어서 말리를 보았다.
“이거, 어디서 나셨습니까?”
“우연히 손에 넣었어. 읽을 수 있는 거야?”
“예. 대충.”
“그럴 줄 알았다. 예전에 네가 고대어에 빠져서 한창 공부하던 게 생각났거든.”
말리가 웃으며 말했지만 제프리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이건 세상에 나와선 안 되는 문자입니다.”
옆에 서 있던 라이칸이 눈살을 찌푸리자 제프리가 얼른 설명했다.
“예전에 마녀들이 쓰던 고대어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마녀들이 쓰던 것이 아니라 마법사들이 쓰던 것이지.”
말리가 끼어들었다. 제프리가 눈을 끔벅거렸다.
“그런가요?”
“그래. 마녀들은 마법사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그 문자를 배웠을 뿐이야. 주술을 외우고 마법을 행하는 공통된 능력이 있으니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의미였지.”
말리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더니 덧붙였다.
“물론, 잘되지 않았지만…….”
잘되지 않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마녀들은 해를 끼치는 종족으로 몰렸다. 사이탄의 숲에는 마녀들이 있지만, 살아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제프리는 다시 양피지로 눈길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사아치파타카오피리…….”
***
“어때요? 따뜻하죠?”
“네. 좋네요.”
빅토가 얼굴을 붉히자 캘리는 웃었다.
“예전에 절 돌보던 아리안 수녀님이 그러셨거든요. 북부에서도 더 위로 올라가면 자연 온천이 있는데 그 뜨거운 온천은 평생 잊을 수 없다고, 살아 있는 동안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땐 그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곳이라 생각했는데…….”
“상상 속 세상을 와보신 거네요?”
“그렇죠. 그리고 이젠 아리안 수녀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완벽히 알게 됐어요. 나도 만약 이곳을 떠나게 되더라도 이 뜨거운 온천만은 절대 못 잊을 거예요.”
“부인이 이곳을 떠날 일은 없을 겁니다.”
“그건 모르죠.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네. 그렇긴 하죠. 근데, 온천만 그립다고요? 서운한데요? 리안나도 이 얘길 들으면 서운할 겁니다.”
캘리는 놀라서 얼른 손을 내저었다.
“오, 물론 아니죠. 당연히 사람들도 그리울 거예요.”
“네, 압니다.”
빅토가 웃었다. 그러다가 중얼거린다.
“전 베아투름의 겨울이 좋습니다. 밤하늘에 오색찬란한 물결이 출렁이는 것도 사랑하고, 거리마다 쌓이는 눈도 좋고요. 아이들이 그 눈을 가지고 눈싸움을 하면서 떠드는 소리도 좋고…….”
“맞아요. 베아투름은 온통 좋은 것뿐이네요.”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동조했다.
이런 곳을 떠난다면, 그거야말로 인생 최대의 불행일 것이다. 그럴 일이 없다면,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라이칸의 옆에서 평온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리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겨울을 지내는 동안, 베아투름인이 다 되어버렸다.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이방인이라는 어색함도 라이칸과 함께 지내면서 완벽히 떨쳐버리고 이젠 원래 이곳에서 살던 사람처럼 정이 들어버렸다.
시간이 더디 가길 바랐다. 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영원히 모른 채, 외면하고 살고 싶었는데…… 봄은 오고 있다. 그것도 아주 빨리.
잠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캘리는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빅토도 이제 짝을 맺어야죠. 와이엇과 리안나가 늘 걱정하던데. 빅토가 언제까지나 혼자 지내게 될까 봐.”
빅토가 인상을 썼다.
“혼자가 어때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전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
“그래도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둘이 되는 게 좋죠. 이렇게 예쁜데.”
캘리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빅토의 가슴을 보았다. 크진 않지만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탱탱하게 물 위로 솟아 있었다. 순간, 빅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보지 마세요. 부인.”
두 손으로 얼른 가슴을 가리는 걸 보며 캘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호위대장으로는 용맹하기 그지없고, 거친 사내들 앞에서도 주눅은커녕, 오히려 더 당당하게 호령하는 빅토가 이럴 땐 천생 여자였다. 그것도 예쁘고 순진한 여자.
신기하다. 내 눈에만 이렇게 보이는 걸까? 적어도 오웬의 눈에는 보석처럼 예쁜 존재로 보일 것 같은데…….
캘리는 슬쩍 눈빛을 흐렸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불꽃이 튄다. 하지만 그들은 겨울을 지내는 동안에도 진전이 없는 듯했다.
커다란 장벽.
둘 사이가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
하프 엘프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 그건 여자 하프 엘프에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남자 하프 엘프도 자손을 보지 못한다.
어쩌면 그것 때문일 것이다. 오웬이 빅토에게 끌리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이유는.
그럼, 빅토는? 빅토도 그럴까? 그래, 여자라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고 싶은 게 당연한 거니까.
주저하는 마음이 이해가 돼서 선뜻, 둘 사이를 붙여줄 수도 없었다.
캘리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도 붉은 비단이 물결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갑자기 으르렁 소리가 났다. 캘리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루센이 벌떡 일어나 언덕 아래를 향해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호위병들을 보고 루센이 저럴 리 없었다.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순간, 빅토가 눈 깜짝할 새에 몸을 일으켜 바위에 올려뒀던 검을 집어 들었다.
캘리는 얼어붙었다. 남자 하나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키가 크고 은발의…….
맙소사. 오웬이다.
루센도 으르렁거리는 걸 멈췄다. 아마도, 자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우선 경계부터 했던 모양이다.
“오웬! 놀랐잖아!”
빅토도 그를 알아보고 욕설을 뱉었다. 오웬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무래도, 빅토는 아직 사태 파악을 못 한 듯했다.
캘리는 빅토의 손을 잡아당기며 강하게 말했다.
“빅토.”
“네. 부인.”
“앉아요.”
“네?”
“물속으로 들어오라고요.”
캘리가 말하자 빅토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으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함께 철퍼덕, 물속에 주저앉은 빅토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 망할 엘프 놈! 네 눈알을 파버릴 거야!”
***
“검은 어둠이…… 세상을 공격할 것이다…….”
제프리는 중간에 비워지고 삐뚤어진 것들을 피해서 겨우겨우 글을 읽어나갔고 해석을 했다.
“황금 소녀와 함께 어둠이 찾아오고 또다시 불길에 휩싸일 것이니…….”
양피지의 끝이 불에 타버린 바람에 글은 여기서 끊겨 있었다.
제프리는 라이칸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았다.
황금 소녀.
누구를 지칭하는 건지는 여기 모인 세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말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틀 전, 베아투름으로 들어온 여행자들이 가지고 있던 겁니다.”
순간, 라이칸의 눈이 서늘한 빛을 머금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긴긴 겨울 동안 외부인의 발걸음이 뚝 멈췄던 이곳에 올해 처음으로 들어온 여행자들이 있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던 건 아닌 것 같았으나, 혹시 몰라서 양피지는 뺏고, 여행자가 묵고 있는 곳을 알아뒀습니다.”
라이칸이 굳을 얼굴로 물었다.
“어딘가?”
“외벽 너머 마을에 브레디라는 자가 운영하고 있는 여관입니다. 이 양피지를 가지고 있던 이는 여행자들 중에 섞여 있던 음유시인이었습니다.”
말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라이칸은 밖으로 나갔다.
“테드!”
테드가 재빨리 뛰어왔다.
“예. 칸.”
“지금 당장 기사들을 데리고 가서 브레디의 여관에 묵고 있는 음유시인을 데려와라. 탑에서 그자를 만나겠다.”
“예!”
테드가 곧바로 지시를 따랐다. 테드가 기사 하나를 데리고 떠나자마자 라이칸은 언덕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쪽으로 갈 필요도 없이 오웬을 선두로 캘리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라이칸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
“떠난다고?”
오늘 캐온 약초를 종류별로 분류해 양피지에 하나씩 기록하고 있던 캘리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차를 끓이고 있던 말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봄이 오고 있습니다. 저도 슬슬, 몸이 근질거려서요.”
캘리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어디로 가려고?”
말리가 미소를 지으며 캘리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대도시 쪽으로 가볼까, 합니다. 우선 펠리키에 들렀다가 길을 따라서 남쪽으로 가려고요. 오랫동안 가보지 못해서 거기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하고.”
“거긴 변한 거, 없어. 내가 거기서 왔잖아.”
“제가 보는 것과 부인이 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수녀원과 백작의 영지에만 있었다면서요?”
캘리는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가.
“다들 떠나네.”
무심코 흘러나온 혼잣말엔 진한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루센을 보낼 날이 이제 얼마 남지 남았다. 그런데 말리까지 간다니…….
“난 아직 여기 기록지를 다 보지도 못했어.”
“제가 가는 것이지, 이곳이 없어지는 건 아닙니다. 언제든 와서 보세요. 혼자만의 공간으로 누리면 더 좋죠. 잔소리하는 노파도 없고.”
말리가 웃으며 중얼거리자 캘리는 입술을 툭, 내밀었다.
“난 잔소리하는 자네가 있는 게 더 좋아. 자네가 하는 말엔 늘 배울 게 있거든.”
“영영 떠나는 건 아닙니다. 돌아올 거예요. 언제나 그랬듯.”
“언제 갈 거지?”
“글쎄요…… 그건 정하지 않았습니다. 내일이 될 수도 있고, 한 달 후가 될 수도 있어요.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 오늘이구나, 하는 그날 갈 겁니다.”
“작별인사도 없이?”
“그래서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인사를 미리 하는 거죠. 하지만, 가능하다면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연통을 넣겠습니다.”
“약 조제법 기록지는 완성하지 않았잖아.”
“거의 완성했습니다.”
말리가 다시 웃는다. 말려도 소용없을 듯했다.
캘리는 애써 웃어 보였다.
“세상 구경 많이 하고 더 많은 걸 배우고 와서 가르쳐줘.”
“그럼요. 그건 걱정 마십시오.”
말리가 캘리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그러다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캘리는 눈을 깜박였다.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