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01)화 (155/159)

101

열두 명의 호위 기사들을 이끌고 캘리는 빅토와 함께 뜨거운 호수로 달렸다. 나른한 햇살은 느긋하게 숲을 에워싸고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안개처럼 사방에 퍼져 있는 늦은 오후였다.

“부인.”

갑자기 빅토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캘리는 고삐를 죄어서 말을 멈췄다. 빅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말에서 내리십시오.”

빅토가 먼저 뛰어내리더니 다급하게 다가와 캘리가 말에서 내리도록 도왔다.

“왜 그래요?”

굽어지는 길 끝에 말리의 오두막이 보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빅토가 중얼거리며 수신호를 보내자 호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빅토는 숲 안쪽을 보고 있었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누가 매복하고 있다고 해도 모를 정도였다.

그때였다.

슈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퍽,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윽!”

빅토의 옆에 있는 병사 하나가 날아온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부인을 모셔라! 나무 뒤로!”

빅토가 천둥 같은 소리를 지르며 캘리의 손목을 잡고 뛰었다. 호위 기사들이 캘리를 에워싸며 달렸다. 그 순간,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캘리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옆에 있던 기사가 또 쓰러졌다.

빅토가 커다란 나무 뒤로 캘리를 밀치고 몸으로 막아섰다. 그제야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열둘 중에 벌써 반을 잃었다.

화살을 맞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전사들을 보자 캘리의 분노가 끓어올랐다.

“검이 필요해요.”

캘리가 중얼거리자 빅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신호하면, 기어가서 한나의 검을 집으십시오.”

한나는 그들이 서 있는 나무 바로 옆의 바닥에서 가슴에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보기엔, 죽은 것 같았다. 쓰러진 다른 이들도 죽거나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어내고 있었다.

“지금입니다!”

숲 안쪽을 살피던 빅토가 말하며 나무 옆으로 쑥 튀어 나갔다. 화살이 날아왔다. 하지만 빅토가 검으로 날아오는 것들을 마구 쳐냈다. 그 틈에 캘리는 재빨리 몸을 던져서 한나의 검을 잡았다. 화살 하나가 날아와 땅에 푹, 박히자 캘리는 이를 악물었다. 얼른 다시 뒤로 기어서 나무 뒤로 돌아오자 빅토도 돌아와서 몸을 숨겼다. 그런데.

캘리의 눈이 커졌다.

“빅토!”

빅토의 허벅지에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괜찮습니다.”

빅토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숲 안쪽에서 침입자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나무 뒤에 있던 호위 기사들이 달려와서 캘리의 앞에 섰다. 놈들은 복면을 쓰고 있었고 열 명이 넘었다.

“제 뒤에 붙어 계십시오.”

빅토가 캘리를 뒤로 밀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안 돼요. 나도 싸우겠어요.”

캘리는 빅토의 옆에 서서 검을 꽉 쥐었다. 이미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아는지, 빅토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베아투름 최고의 여전사지만, 화살을 맞았고,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았다.

“뭐 하는 놈들이냐?”

빅토가 차갑게 물었지만 놈들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공작부인만 살리고 나머진 다 죽여라!”

한 놈이 소리를 지르자 놈들이 달려들었다. 빅토와 호위 기사들이 그들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캘리도 검을 세웠다. 자신을 잡으려고 달려드는 놈을 향해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이 물러섰지만 또 다른 놈이 달려들었다.

빠르고 정확하게.

그녀는 겨울 내내 배웠던 대로 검을 움직였다. 하지만, 놈들은 훈련받은 자들이었다. 남은 호위 기사들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전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놈들이 호위 기사 하나를 더 죽이자 캘리는 결국 소리를 질렀다.

“그만! 모두 멈춰!”

그녀의 명령에 호위 기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캘리는 놈들이 보란 듯이 검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빅토에게 명령했다.

“검을 버려요.”

“부인…….”

허벅지에서 흐르는 피와, 땀범벅이 된 얼굴.

빅토는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대로 두면…… 내 호위 기사들은 전부 죽을 것이다.

캘리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서 버려요!”

빅토에게 단호하게 명령하고 다른 호위 기사들에게도 말했다.

“검을 버려. 명령이다.”

캘리는 놈들을 향해 턱을 들어 올렸다.

“내가 목적이라면, 날 데려가라. 대신, 이들은 살려줘.”

그때였다.

“그건 안 되죠.”

뒤쪽 커다란 나무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순간, 빅토와 캘리는 놀라서 얼어붙었다.

“나탈리…….”

빅토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캘리의 눈빛도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나탈리는 미소를 지으며 걸어와 낯선 놈들과 함께 서서 죽은 전사들과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전사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캘리를 보며 혀를 찼다.

“결국 그쪽이 문제야. 평화로운 베아투름에 네가 들어오면서 모든 게 망가졌어.”

캘리가 서슬 퍼런 눈으로 쳐다보자 나탈리가 쿡쿡, 나지막하게 웃었다.

“이걸 보라고, 공작부인. 그쪽 때문에 죄 없는 여전사들이 죽었어. 그리고 나머지들도 다 죽을 거고.”

“이러는 이유가 뭐냐?”

캘리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탈리가 비릿하게 미소를 머금는다.

“당연히 복수지.”

바스락, 나탈리가 캘리를 향해 한 걸음을 다가서자 빅토가 얼른 막아섰다. 하지만 나탈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죽을 목숨이 애를 쓰는구나. 역시 베아투름 최고의 여전사야.”

“나탈리. 칸이 알면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나탈리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휘었다.

“죽이겠지. 그 남잔…… 날 베는 걸 망설이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이미 그 부분에 있어선 희망 같은 게 없어. 라이칸이 날 버렸던 그 순간부터 내 인생은 이미 끝났으니까.”

“부인을 건드리면 내가 널 죽일 것이다.”

“글쎄. 고든 양. 넌 날 죽일 기회가 없을 거야. 넌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

“넌 죽을 거야. 반드시.”

“오, 그래. 네 쌍둥이 오빠와 그 엘프 전사가 있었지. 물론 칸도 있고. 하지만 그들도 날 죽일 순 없어. 그들이 알 때쯤이면 난 이곳에 없을 테니까.”

“우릴 죽여서 네가 얻는 게 고작 복수라고?”

캘리가 묻자 나탈리가 피식, 웃었다.

“오, 물론 공작부인은 죽이지 않습니다. 이 남자들은 부인을 산 채로 데려가야 대가를 받을 수 있거든.”

캘리가 나탈리의 뒤에 서 있는 놈들을 쳐다보았다.

현상금 사냥꾼이구나.

놈들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고 날 데려가려는 것이다.

“누구지? 대체 누가 날 원하는 거지?”

하지만 놈들은 말이 없었다. 캘리는 다시 나탈리를 보았다. 우리가 올 걸 알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로이에게 술을 먹인 사람이 당신이군.”

나탈리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로이는 참 다루기가 쉬운 주정뱅이지.”

캘리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말리를…… 죽였어?”

나탈리가 고개를 저었다.

“말리는 우리와 함께 갈 거야. 그 노파는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치료사로 꽤 쓸모가 있을 거거든. 물론,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죽이겠지만.”

“이런다고, 넌 뭘 얻어? 쓸모없는 복수를 한다고 해서 네가 진정 얻는 게 뭐냐고.”

나탈리가 피식, 다시 웃었다.

“그저 작은 만족이지. 라이칸…… 평생 그 남자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는데…… 이젠 다 끝났어. 그런데 이대로 그냥 물러난다면 난 평생 고통 속에 살게 될 거야. 그 남자가 내게 한 짓은…… 절대 잊지 못할 테니까. 내 등엔 절대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았어. 그가 한 짓이지. 난 그 사람을 죽도록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네가 먼저 날 위험에 빠트렸어.”

“너만 아니었으면 칸은 날 떠나지 않았을 거야!”

흥분한 나탈리가 고함을 질렀다.

씩씩거리던 나탈리가 숨을 가다듬더니 캘리를 다시 보았다.

“다 지나간 일이야. 하지만 칸이 내게 한 짓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지. 날 절망에 빠트리고 삶을 망가트린 죄. 내 몸에 끔찍한 흉터를 남겼으니 그가 가장 아끼는 여자를 빼앗을 거야. 비록, 괴로워하는 칸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말이야.”

“다른 이들은 살려줘.”

캘리는 간절하게 말했다.

“오, 그건 안 되지. 여기 있는 것들 중 누구도 살 수 없어.”

“그러면 나도 못 데려가.”

캘리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빼내어 자신의 목에 댔다. 그 동작이 너무나 빨라서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빅토조차.

“부인!”

빅토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캘리는 현상금 사냥꾼들을 보았다.

“이들을 살려줘. 그러면 내가 순순히 따라가 줄 테니까.”

나탈리가 이를 갈았다.

“웃기지 마. 절대…….”

“좋습니다.”

갑자기 놈들 중 하나가 나섰다. 얼굴과 목에 긴 흉터가 여러 개 있는 남자였다.

“이봐요!”

나탈리가 소리를 지르자 놈이 한 손을 들어 저지했다. 놈이 이 무리의 수장인 듯했다.

나탈리를 쳐다보는 눈빛이 서늘했다.

“내가 대장이야. 우리와 함께 가고 싶으면 너도 내 명을 따라야 한다.”

놈의 차가운 대꾸에 나탈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탈리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놈들과 함께 떠나지 못하면 결국 죽임을 당할 거라는 걸.

대장이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호위 기사들을 모두 오두막으로 데려가서 묶어.”

“상처를 치료해야 돼.”

캘리가 나서자 대장이 눈을 치떴다.

“부인. 난 기사가 아니오. 여차하면 나탈리의 말처럼 다 죽이고 부인을 기절시켜서 데려갈 수도 있소. 그것도 아니면 부하를 남겨서 이들을 죽이라고 할 수도 있고. 부인을 기절시키지 않는 이유는 말을 타게 하려는 것뿐, 다른 이유가 없어. 만약, 그게 여의치 않으면 나로선 다른 방법이 없지.”

캘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놈이 다시 차갑게 말을 잇는다.

“상처를 치료하라는 둥, 헛소리 집어치우고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요. 그래야 나도 약속을 지킬 마음이 생기니까.”

“…….”

“개소리하지 마! 날 먼저 죽이기 전에는 부인을 절대 데려갈 수 없다!”

빅토가 바닥에 떨어트렸던 검을 집으려 하자 캘리는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요! 빅토!”

흠칫, 빅토가 멈춰서 쳐다본다. 그 눈빛이 흐렸다. 좌절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은 호위 기사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절망이 어려 있었다.

캘리는 대장을 쳐다보았다.

“내 기사와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줘요.”

대장이 눈살을 찌푸리자 캘리가 다시 말했다.

“잠깐이면 돼요.”

대장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시오.”

말이 떨어지자마자 캘리는 빅토에게 달려갔다.

“빅토.”

“부인.”

빅토가 입술을 악물었다. 눈빛에 두려움이 어렸다. 처음이다. 빅토가 저런 표정을 보인 건. 늘 강해 보이기만 하던 나의 호위 기사였는데…….

캘리는 눈물을 꾹, 삼키고 빅토를 향해 흐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난 무사할 거예요. 내게 검술을 가르쳤잖아요. 난 활도 잘 쏴요.”

“놈들은 여럿입니다.”

“내가 불을 다룰 줄 안다는 거 알잖아요.”

“놈들에게 그 능력을 들키면 안 됩니다. 생각보다 더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 부인을 놓치지 않으려고 꽁꽁 묶어서 가둘 겁니다.”

“알아요. 반드시 필요할 때, 적절한 때를 기다릴게요. 그러니까 빅토. 살아서 칸에게 이 상황을 전해줘요.”

캘리는 진심으로 말했다.

“빅토의 잘못이 아니에요. 알죠?”

사력을 다해, 진심으로 나를 지켜준 당신의 충정에 감사하는 이 마음을 그대가 알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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