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02)화 (156/159)

102

빅토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무사하셔야 합니다. 칸이 부인을 구하러 갈 겁니다. 그때까지 꼭…….”

빅토가 캘리의 손을 움켜잡았다.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그러니 빅토도 살아야 해요.”

대장이 다가왔다.

“이제 갑시다. 부인은 말을 타시오.”

대장이 캘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거친 손놀림에 몸이 비틀렸다.

“부인을 공손히 대해라! 함부로 다루지 말란 말이다!”

빅토가 놈들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렀다.

캘리를 뒤를 돌아보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난 괜찮아요. 반드시 살아서 칸에게 가요!

***

“너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빅토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중얼거렸다. 앞에 서 있던 나탈리가 피식, 웃었다.

“훗. 이런 상황에서도 기세는 등등하구나.”

“내가 아니어도 너는 죽어.”

순간, 나탈리의 미소가 흐려졌다.

“그래. 나도 알아. 언젠가…… 난 칸에게 죽임을 당할 거야.”

“그런데 왜 이런 짓을 해? 남자에게 버림받았다고 해서, 목숨을 던져?”

“그래. 내 인생은 끝났으니까.”

“나탈리. 애초에 당신은 칸과 맺어질 수 없었어. 그분에게 당신은 여자가 아니었다고.”

나탈리가 창고 밖에 서 있는 캘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증오의 핏발을 세웠다.

“아니! 저 황금색 머리칼의 여자만 아니었다면 칸은 나를 돌아봐줬을 거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됐어. 결국 칸은 내 것이 됐을 거라고!”

“멍청한 나탈리 아가씨.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고귀한 신분으로 칸의 지원을 받으며 좋은 남자를 만나서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늦지 않았어. 나를 풀어줘. 부인을 구할 수 있게 도와줘.”

쫙!

나탈리의 손이 빅토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화살이 꽂혀 있는 허벅지를 발로 밟았다.

“윽.”

빅토가 신음을 흘리는 순간, 상처에서 피가 울컥 솟았다.

“난 이미 끝났어. 내 인생은 끝났다고. 그러니 우리 모두 함께 죽는 거야. 빅토리아 고든 양. 너도 곧 죽을 거고. 이렇게 피를 흘리면서 천천히 세상과 작별인사나 해.”

나탈리가 홱 돌아서자 나머지 놈들도 창고를 나섰다. 쿵, 소리가 나며 문이 닫혔다. 어둠이 내려앉았다. 곧이어 말들이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멀어져 가는 말발굽 소리는 공작부인이 멀어지는 소리였다.

빅토는 눈물을 흘렸다. 아니, 이렇게 있을 수 없었다. 밧줄에 묶일 때, 최대한 몸에 힘을 주었었다. 그 힘을 이제 빼자 밧줄이 살짝 헐거워진다.

빅토는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약간의 틈이 생긴 밧줄이 점점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에서 피가 더 솟구쳤지만 그런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죽어도…… 공작부인이 납치된 것을 알리고 죽을 것이다!

***

두두두두두.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얼어붙은 빙벽을 두드렸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사위에 횃불이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누군가 오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파수꾼 사령관, 조는 황급히 망토를 입고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거의 동시에 말 하나가 문을 통과해 달려와 섰다.

검은 말 위에 올라탄 사내가 후드를 벗자 조는 놀라서 소리쳤다.

“제프리.”

말에서 뛰어내린 제프리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칸은? 칸은 어딨습니까?”

그 목소리가 몹시 다급했다.

“마물 지역에 들어가셨네.”

“언제요?”

“아침에.”

“칸이 돌아오셔야 합니다.”

제프리가 차갑게 말하자 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해. 알잖아. 디아르고는 넓어. 고블린의 흔적을 찾는다고 나가셔서 어디로 가셨는지도 몰라.”

“방법이 없겠습니까?”

“정찰병을 보내는 것도 위험해. 지금 마물 지역은 정체불명의 돌연변이들뿐만 아니라 고블린까지 있을지 몰라. 칸도 중무장을 하고 나갔단 말일세.”

하지만 제프리는 단호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칸과 연락해야 합니다!”

제프리가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자 조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제프리는 험악한 얼굴로 대답했다.

“부인이, 부인이 납치됐습니다.”

순간, 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빌어먹을…… 언제?”

“오늘 아침에 납치를 당했고, 조금 전에 살아남은 빅토가 와서 전해줬습니다. 테드 경이 기사들을 이끌고 추적을 시작했지만,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나버린 상탭니다. 놈들이 언데드 지역을 넘어가버리면 거리는 더 벌어질 겁니다.”

“오, 젠장. 빌어먹을……. 그러면 내가 직접 마물 지역으로 나가겠네. 당장 채비를…….”

“아니, 그건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면서요? 무작정 찾아 헤매는 것도 그렇고…….”

제프리가 조를 제지했다. 제프리는 어두운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성벽 위에서 타고 있는 횃불이 눈에 들어왔다.

조를 돌아보는 제프리의 눈이 번뜩였다.

“불을 피워야겠습니다.”

조가 놀라서 쳐다본다. 제프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큰 불을 여러 개 피우는 겁니다. 멀리서도 볼 수 있게.”

조의 눈이 커졌다.

“좋은 생각이야. 연기라도 보게 되면 여기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의심을 하고 돌아오실 거야. 당장 불을 피우겠네.”

조가 돌아서서 병사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가장 높은 곳에, 여러 개의 불을, 되도록 많이!

***

“아무래도 다 죽었거나, 떠난 것 같은데요?”

와이엇이 입을 열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껏 발자국도 하나 못 봤고, 고블린이 서식한 흔적도 없는 걸 보면.”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던 놈들이 북부의 추위에 기겁을 한 거지. 모조리 얼어 죽었거나 재빨리 남쪽으로 달아난 거야.”

와이엇이 큭큭, 웃으며 중얼거리자 오웬도 피식, 웃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어쨌든 주의 깊게 살펴봐야 돼. 이번 한 번의 조사로 고블린이 완벽히 사라졌다고 판단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그때 왜 고블린이 여기에 나타난 건지에 대한 의문도 남아 있고.”

“그렇지. 게다가 돌연변이잖아. 그놈들이 어떻게 생겨난 건지 알아내야 할 텐데…….”

와이엇이 라이칸을 보았다. 무심한 얼굴에선 아무런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돌연변이에 대해 알아보려면 베아투름 밖의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것도 왕궁도시, 펠리키로. 거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다 집약되는 곳이니까. 하지만 펠리키로 가면 왕을 만나야 하는 문제가 있다. 공작부인의 문제도 있는데…….

와이엇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분명 뭔가 계획을 세우고 있을 텐데…….

‘기다려봐. 계획이 구체화되면 우리에게도 알리실 거야.’

오웬의 말처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도 없었다. 묻는다고 대답해 줄 위인도 아니고.

속으로 혀를 차면서 고개를 돌리던 와이엇의 눈이 문득 찌푸려졌다. 처음엔 구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칸. 저기 좀 보십시오.”

와이엇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 저편을 가리키자 오웬도 눈을 크게 떴다.

“뭐지?”

“저긴…… 빙벽 쪽입니다.”

연기였다. 하얀 연기가 사방으로 번졌다.

“불이 났나?”

와이엇이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리자 오웬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빙벽에 어떻게 불이 나? 불이 난다고 해도 저렇게 번질 순 없어.”

“그럼, 저건 뭔데? 불이 나지 않고서야 저렇게 많은 연기가 날 수가 있어?”

“누가 일부러 불을 태우고 있는 것 같은데……. 아! 이런. 뭔가를 알리려는 거야! 우리에게 급하게! 칸.”

오웬이 고개를 돌렸을 때 칸은 이미 말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러자 나머지 기사들도 일제히 말 위로 뛰어올랐다.

잠시 후, 말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며 지축을 흔들었다.

***

“어떻게 됐나?”

침대에 누워 있던 빅토는 스리디오가 들어오자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리안나가 재빨리 제지한다.

“가만있어요. 상처가 덧나요.”

“상관없어요.”

빅토는 리안나의 손을 치우고 절박한 눈으로 스리디오를 보았다.

“테드 경에게서 소식이 왔나?”

고개를 젓는 스리디오의 얼굴은 전에 없이 어두웠다. 빅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칸은?”

“제프리가 갔습니다. 빙벽 쪽에 큰 연기가 나는 걸로 봐서, 칸에게 이쪽의 급박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불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먼 거리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연기가 많습니다. 분명히 칸이 확인을 하고 돌아올…….”

그때였다. 바깥에서 소란한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문이 쾅 하며 열렸다. 밖의 한기가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지옥의 사자가 서 있었다.

“칸…….”

빅토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서늘한 눈빛이 묻는다.

“어떤 놈들이지?”

“현상군 사냥꾼인 것 같았습니다. 누구의 의뢰를 받은 건진 모르겠습니다. 나탈리가 일을 꾸며서 부인을 불렀던 것 같습니다. 놈들이 매복해 있다가 저희를 덮쳤습니다.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빅토의 눈은 어두운 절망감으로 가득했다. 그걸 보는 와이엇과 오웬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스리디오가 나섰다.

“고든 양이 오두막에서 가까스로 탈출해서 여기로 왔을 땐 이미 시간이 꽤 경과된 후였습니다. 테드 경이 바로 쫓아갔지만…… 따라잡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라이칸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지옥처럼 검게 타오르는 불길이.

그는 더 이상 워렌 공작이 아니었다. 베아투름의 영주도 아니었다.

적이 눈앞에 있다면 저 검은 눈빛에 벌벌 떨며 무릎을 꿇었으리라.

대륙의 검은 사자, 지옥의 사령관.

전장에서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르는 검은 늑대였다.

라이칸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홱 몸을 돌려 나가는 걸 보고 스리디오가 따라 나갔다.

와이엇은 동생을 보고 짧게 말했다.

“몸조리 잘해.”

빅토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와이엇도 재빨리 나갔다. 이제 남은 사람은 오웬이었다.

빅토는 진심으로 말했다.

“부디…… 부인을 무사히 모셔 와.”

“그래.”

“기다릴게.”

빙벽에서 했던 말.

‘깊이 생각한 끝에…… 그 끝에도 내가 있다면…… 그땐 내게 와라.’

그 말에 대한 대답이었다.

오웬의 눈빛이 짙어졌다. 두 사람의 눈길이 부딪쳤다. 성큼, 다가온 오웬이 몸을 숙여 이마에 빠르게 키스하고 속삭였다.

“반드시 부인을 구해서 돌아올 거야.”

이제 막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남녀에겐 너무 짧은 키스였다. 하지만 그건, 엘프 전사가 진심으로 하는 맹세였다.

오웬의 뒷모습을 보며 빅토는 간절히 빌었다.

신이시여. 제발…… 부인을 무사히 구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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