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05)화 (159/159)

105

불길하다. 칸은…… 워렌 공작은 결코 뭔가에 가로막힐 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는 불사신이다. 검은 늑대는 자신의 것을 훔친 자들을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린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못마땅하지만 여기 대장은 저 멍청한 놈이다.

나탈리는 치솟아 오르는 불안감을 안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흠칫.

갑자기 땅이 울린다. 혼자만 느낀 게 아니었다. 대장을 비롯한 남자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그들의 눈이 숲으로 향했다. 고요했던 숲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뭔가 오고 있다.

“말도 안 돼…….”

누군가 굳은 채 중얼거렸다.

이젠 명확히 들렸다. 말발굽 소리가 하늘과 땅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지축이 흔들리며 숲이 발광을 한다. 사냥꾼들이 하나둘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약하게 흔들리던 숲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파앗!

어두운 숲 안에서 검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맑고 청아했던 새벽이슬은 핏빛으로 물들고, 찬란하게 빛나던 햇살은 검은 먹구름에 휩싸인 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탈리는 공포가 얼룩진 눈으로 달려오는 말을 멍하니 보았다.

벤투스…….

눈길이 움직여 검은 말 위에 올라타 있는 거대한 기사를 향했다.

그는 검붉은 피로 뒤덮여 있었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나운 분노는 천지를 뒤흔들었다. 잔잔했던 들판에 거친 바람을 일으키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발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검은 눈빛에 드리워진 붉은 선혈이 사방으로 뻗어 나와 자신의 몸을 옥죄는 것 같았다.

으아아!

남자 둘이 겁 없이 달려들었다. 거대한 검이 놈들을 사정없이 쳐냈다. 여린 나뭇가지처럼 맥없이 잘려나간 현상금 사냥꾼들이 바닥에 투툭, 쓰러져갔다.

거칠고 잔혹한 늑대.

그는…… 지옥의 사자, 워렌 공작이었다!

***

팍.

와이엇이 잡고 있던 어깨를 홱, 밀치자 나탈리는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돌부리에 걸려 찢어진 치마 사이로 붉은 핏물이 새어 나오는 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탈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칸.

싸늘한 눈을 본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공포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공작님.”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죽을 각오를 하고 저지른 일임에도, 막상 닥치니 지독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아!

“살려주세요!”

소리치며 바닥에 엎드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제 잘못이 아닙니다. 저들이 저를 겁박하고 강요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망할 년!”

이미 잡혀온 대장이 나탈리를 향해 욕설을 뇌까렸다. 나탈리는 홱, 고개를 쳐들어 표독스러운 눈으로 놈을 보았다.

“네놈이 날 찾아와서 부인을 납치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강요했잖아!”

“공작에게 복수할 기회를 잡았다고 기뻐할 땐 언제고?”

“아니야! 난 그냥 부인이 미웠을 뿐이야.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어!”

나탈리는 재빨리 워렌을 보았다.

“공작님. 아닙니다. 저자의 말을 믿지 마세요.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리고 다시 대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가 부인에게 독이 묻은 화살을 쏘았습니다.”

순간, 라이칸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었다.

와이엇이 날카로운 숨을 들이켜며 대장의 멱살을 잡았다.

“활을 쏘았다고? 그래서? 부인이 맞았어?”

대장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한 얼굴로 피식, 웃었다.

“맞았지. 그 여잔…… 죽을 거야.”

“망할!”

와이엇이 놈을 내팽개치더니 검을 빼 들었다.

“칸. 제게 이놈을 죽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

라이칸의 목소리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한 발, 놈에게 다가선 라이칸의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화살을 맞았다고?”

“그, 그래. 그 여잔 죽을 거야.”

으득, 라이칸의 턱이 각지고 입술 끝에 힘이 들어갔다. 검을 쥔 손은 푸른 힘줄이 돋고 팔의 근육은 거칠게 불거졌다.

“의뢰인이 누구냐?”

놈이 입술을 꾹 다문다. 와이엇이 옆에서 이를 갈았다.

“말해. 아니면, 너의 다리 하나를 찔러서 황야에 던져놓을 것이다. 와일더니스의 늑대들은 영리해서 너를 한 번에 죽이지 않을 것이고, 너는 매일매일 살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서서히 죽게 되겠지.”

놈의 얼굴이 그제야 공포로 얼룩졌다.

“지금 죽여라.”

와이엇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죽여줄 거야. 그 방식에 대해선 네 대답에 달렸지. 의뢰인이 누구냐?”

놈이 라이칸을 보더니 무겁게 입을 놀렸다.

“부인을 살려서 잡아오라고 의뢰한 이는 엘프 여왕이오.”

와이엇의 입이 벌어졌다. 오웬이 재빨리 물었다.

“왜?”

놈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우린 의뢰인이 하려는 일까지 알지 못하오.”

“죽이라고 한 자는?”

라이칸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놈이 시선을 깔며 중얼거리듯 대답한다.

“그건 나도 모르오. 검은 망토를 입은 자가 찾아와서 상당히 많은 양의 금을 선불로 주었소. 부인을 죽여서 목을 가져오면 그만큼의 양을 더 준다고……!”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칸의 검이 움직였다.

눈 깜짝할 새였다. 햇빛에 잠깐 번뜩였을 뿐인데, 피가 튀어 오르고 놈의 대가리가 몸에서 분리돼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본 나탈리는 뒤로 엉덩이를 쿵, 찧으며 넋을 놓았다. 이미 피로 얼룩져 있던 칸의 얼굴은 새로운 피가 한 줄기 더해졌을 뿐이었다. 그 얼굴이 이쪽을 향하는 순간, 나탈리는 죽음을 예감했다.

절망 어린 눈은 이제 다 끝났다는 듯 허망하게 뜨여 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껏 오직 한 남자만을 보며 살아온 죄밖에 없다. 그 남자의 여인이 되고자 했던 욕심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 온 마음을 다 바친 그 남자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라는 것이 억울하고 분하고…… 아니, 이렇게 끝내기 싫다. 이럴 순 없어!

나탈리는 황급히 엎드려 벌벌 떨면서 말했다.

“사, 살려주세요. 공작님. 살려만 주시면, 다시는 베아투름 근처에도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평생, 공작님 눈앞에 띄는 일이 없을 겁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돌아가신 제 어머니를 봐서라도 부디…… 컥!”

목이 잘려 나간 대장처럼 나탈리도 말을 끝맺지 못했다. 등에 꽂힌 검이 서걱 소리를 내며 뼈를 가르고 깊숙이 몸을 관통하자 나탈리는 비명 소리도 내지 못했다.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그녀의 눈은 비어 있었다. 헛되게 살고 가는 삶에 대한 미련조차 없는 공허함이 눈동자를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황야의 바람이 피비린내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나탈리의 시체 앞에서 휙, 돌아선 칸은 벤투스에 훌쩍, 뛰어올랐다. 기사들도 일제히 말에 올라탔다.

칸은 고삐를 쥐고 벤투스의 허리를 찼다. 먼지가 이는 황야를 칸이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하나였다.

가장 가까운 강가 마을.

그녀를 데려간 이들이 배를 타고 향할 곳은 가장 가까운 마을일 것이다.

‘여자는 죽을 거요.’

아니, 죽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것이다.

“하아, 하아!”

라이칸은 말을 사납게 몰아치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

쾅쾅쾅쾅.

깊은 밤, 모두가 잠든 밤을 울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여관 주인은 잠이 덜 깬 얼굴로 걸어 나가서 문에 대고 물었다.

“누구쇼?”

“방이 필요하오.”

문 너머의 여자 목소리가 제법 다급하다. 주인장은 인상을 쓰며 문을 열었다.

“아니, 밤이 이렇게 깊었는데……!”

투덜거리던 주인장은 문이 열리자마자 들이닥치는 방문자들을 보고 놀라서 얼어붙었다. 난쟁이 여자가 황급히 다가서며 물었다.

“방, 있소?”

주인장은 남자가 안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혈색이 하나도 없는 것이 죽은 시체 같았다.

“빈방이 있냐니까!”

난쟁이 여자가 다시 묻자 주인장은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층에 방이 있긴 한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오드아이 노파가 먼저 계단을 오르며 뒤따라오는 남자를 재촉한다.

“서두르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주인장은 인상을 썼다. 그때였다. 남자의 품 안에 축 늘어져 있던 여자의 후드가 벗겨졌다. 순간, 눈부시게 화려한 금빛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걸 본 주인장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난쟁이 여자가 다가와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우린 조용히 머물다 갈 걸세.”

입을 다물라는 소리다.

주인장은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 들고 입술 끝을 올렸다.

“예. 걱정 마십시오. 그런데, 저희 여관에서 사람이 죽으면…….”

“걱정 말게. 우린 잠시만 있다가 바로 갈 거니까.”

시체 처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앤.”

위층 계단에서 말리가 이름을 부르자 난쟁이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뜨거운 물이 필요해. 깨끗한 수건도.”

앤이라고 불린 난쟁이 여자는 재빨리 주인장을 보고 말했다.

“들었지? 어서 준비해 주게. 협조를 잘하면 은을 더 주겠네.”

그 소리에 주인장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방을 밝히는 작은 횃불이 달빛과 어우러져 기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런 그림자 아래에서 열에 들떠 헛소리를 내뱉는 여자가 있었다.

앤이 침대로 다가가 누워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공작부인은 위중해 보였다.

“살겠습니까?”

앤이 묻자 말리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지금 상태로 봐선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앤은 말끝을 흐렸다. 화살을 맞은 것도 위험한데, 독이 묻은 화살이라니. 살 희망이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견뎌내실 거야.”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게 정말 가능한 걸까요?”

앤은 말리의 치료법을 불신하고 있었다. 하긴, 누구라도 불신할 것이다. 독을 이기기 위해 또 다른 독을 투입하다니, 그건 불길에 기름을 붓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말리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살아나는 자를 보았어.”

“건장한 사내였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이분은…….”

앤은 하얀 피부의 공작부인을 보았다. 작은 키의 난쟁이 눈으로 보기에도 작고 여리게 보였다.

“강한 분이야.”

말리가 중얼거리자 앤은 눈살을 찌푸렸다.

“강하다고요?”

“그래. 보기엔 약해 보이지만 속은 여리고 강단 있는 분이셔.”

그리고.

“이겨내실 거야. 죽을 운명이었으면, 벌써 죽었겠지. 온갖 역경을 다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쉽게 죽진 않을 거야.”

말리가 강하게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렇게 믿고 싶어서 나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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