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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칸 (109)화 (103/159)

109

‘너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야. 너만이 절망에 빠진 마녀들을 구할 수 있어.’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쏟아낸 다미아라는 여자에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한 후 내보냈다. 하지만 여자가 남긴 혼란은 사라지지 않았다.

캘리는 결국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더 들어요.”

말리가 걱정하며 말했지만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어.”

“독이 아직 몸에 남아 있어서 그래요. 완전히 내보낼 수 있는 약초를 구해와야겠어요.”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게 있어?”

“있죠. 예전부터 쓰고 싶었는데, 혼수상태에서는 함부로 쓸 수가 없는 약이라서 쓸 수가 없었죠.”

“자네 덕에 살았어. 고마워.”

“아뇨. 저 때문에 죽을 뻔하신 거죠. 제가 도망치자고 해서…….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칸이 구하러 왔을지도 모르는데.”

“그땐 상황이 그랬잖아. 라이칸이 바로 뒤쫓아 올 걸 누가 알았겠어? 아까 난쟁이 여자가 그랬잖아. 라이칸이 그렇게 빨리 추격해 온 건 정말 기적이라고. 현상금 사냥꾼과 이틀 이상의 거리가 있었다던데…….”

“예. 그건 저도 놀랐습니다. 칸이 대단한 전사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사실, 좀 무모했죠. 해가 진 언데드 지역을 그대로 통과하다니……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공작님께선 살아나셨지만.”

죽을 각오……. 그가 그렇게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쫓아와 주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걱정이 된다.

“그는 어디 있을까?”

캘리가 조용히 물었다. 말리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궁에도 들어가지 않은 모양입니다. 한 달 전쯤에 펠리키로 들어온 건 확실한데, 그 후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부인이 누워계시는 동안 제가 백방으로 공작님의 소식을 물으러 다녔는데, 얼마 전에 만났던 여행자가 말해 준 정보가 유일합니다. 그 여행자도 베아투름을 떠나온 지 근 보름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라 그 이후의 소식은 알 수가 없고요.”

라이칸의 최근 소식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나를 포기하고 베아투름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캘리의 눈빛이 흐려지자 말리가 조용히 손을 잡으며 말했다.

“포기하실 분이 아닙니다. 지금 어디에 계시든, 부인을 포기하진 않았을 겁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예. 그렇다고 해도 직접 시신을 보지 않은 이상,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칸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시잖습니까. 돌아가신 워렌 공작님은 자신이 아내를 포기했던 걸 가장 후회하며 사셨습니다.”

“…….”

“매음굴을 뒤지고 다니는 자들이 있습니다. 부인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섣불리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칸일 수도 있어요.”

캘리의 눈이 화악, 커지자 말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만약 칸이 아니라면…… 부인은 더 깊이 숨으셔야 합니다. 놈들은 부인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까요.”

“말리.”

“예. 부인.”

“라이칸은 뭐라고 할까?”

“무엇을…….”

되묻던 말리가 뭔가를 눈치채고 다시 묻는다.

“부인이 공주라는 사실을 알고 칸이 어찌 생각할지 궁금한 겁니까?”

“그래. 난 그게 궁금해.”

“부인의 신분이 혹시라도 칸에게 피해를 줄까 봐 걱정되십니까?”

“그래.”

말리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만약 칸에게 피해가 간다면 부인은 떠나실 겁니까? 칸을 영원히 떠나실 수 있으세요?”

잠시 말이 없던 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약속했어. 절대, 그를 떠나지 않겠다고.”

그제야 말리가 미소를 지었다.

“예. 그럴 줄 알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칸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칸이 해결해 낼 테니까요.”

캘리는 말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말리.”

“예. 부인.”

“내가 정말 왕의 딸일까?”

“글쎄요. 하지만, 다미아 님이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분을 알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소문으론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들었어?”

“마녀들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죠. 오래전, 마녀들이 위험한 종족이라고 몰려서 사이탄의 숲에 갇혔을 때, 다미아 님은 다른 마녀들과 함께 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마녀들이 억울한 누명을 벗고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조직을 만드셨죠. 그 조직의 이름이 타르엔입니다.”

“타르엔…….”

“예. 저도 몇 년 전에 그 이름을 들었습니다.”

“자네는 마녀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

말리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 어떤 종족도 그 전부가 다 나쁠 수는 없습니다. 그 전부가 좋을 수도 없고요.”

“어떤 종족이든 나쁜 자들은 있다?”

“그렇죠. 생김새나 능력, 특징 등으로 여러 종족들을 나누고 있지만 사실 그들 모두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들 중에도 나쁜 이가 있고 좋은 이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럼, 몇몇의 나쁜 마녀들 때문에 다른 마녀들까지 싸잡혀 매도당했다는 건가?”

“그건 복잡한 이유가 얽혀 있습니다. 정치적 문제이고, 이권이 걸려 있는 문제죠.”

“하. 어떤 종족이든 존중을 받아야 하는데,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이들은 대체 뭐지?”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없는 자들을 짓밟고 이용하려는 거죠.”

“힘이 있으니 힘이 없는 자들을 보살펴주고 배려해 줄 수도 있잖아.”

말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건 너무 큰 꿈인 것 같습니다. 어떤 세상이건, 가진 것에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 수가 일부이긴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행사하는 거죠.”

일부. 그 일부가 때로는 전체를 흐린다. 전체를 매도하고, 전부를 억울한 죽음으로 이끌 수 있다. 그 일부는 권력을 가졌을 것이고, 부와 힘을 가졌을 것이다.

그들이 나를 노리고 있다.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그래야 내가 살고, 칸도 다시 만날 수 있다.

“말리.”

“예. 부인.”

“나, 다미아라는 그분을 다시 만나야겠어.”

“좀 더 몸이 회복되면…….”

“아니. 지금 당장 만나야겠어.”

캘리는 시트를 걷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러자 말리가 재빨리 말했다.

“정 그러시면 제가 그분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

말리가 데려온 사람은 다미아가 아니라 앤이라는 난쟁이 여자였다. 와일더니스에서 현상금 사냥꾼들로부터 그녀와 말리를 도망치게 해준 여자.

“다미아 님은 출타 중이십니다. 나가시기 전에, 혹시 공주님이 뭔가를 물으시면 제가 성심껏 대답해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때는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지금 보니, 앤은 전사였다. 몸집은 아이처럼 작았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다부진 몸이 그렇게 보였다. 와일더니스에서도 검을 휘두르는 솜씨가 기사 못지않았고.

앤의 눈길이 음식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그릇으로 향했다. 살짝 눈살을 찌푸린 앤이 캘리를 본다.

“기력을 빨리 회복하셔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놈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라…….”

“누가 들이닥친단 말이지?”

캘리가 묻자 앤이 슬쩍 말리를 보더니 이내 대답했다.

“마법사들이 자객과 현상금 사냥꾼들을 동원했습니다. 보상금을 더 올려서 놈들은 지금 공주님을 찾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공주라는 호칭이 껄끄러웠지만 캘리는 일단은 참았다. 우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의문들을 해소해야 했다.

“마법사들은 어째서 날 잡으려고 하는 거지?”

앤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 알고 계시군요. 놈들은 공주님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죽이려는 겁니다.”

캘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애써 묻어두었던 두려움이 다시 일어난다.

누군가가 기를 쓰고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공포였다. 동시에 분노를 일으킨다.

“왜?”

억울했다. 내가 대체 그들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를 못 죽여 안달인가.

“왕좌를 넘보는 왕족이시니까요.”

하. 캘리는 황당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내가 언제 왕좌를 넘봤지? 난 그런 건 관심도 없어.”

“공주님께선 관심이 없어도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법사들의 뒤에는 왕비와 왕세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공주님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왕세자가 이어받을 왕좌가 위협받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 내 어머니를 죽인 자들이 그들인가?”

“예. 공주님의 어머니, 사라 님은 불을 다루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런 그분을 마녀로 몰아서 화형시킨 건, 탈리아 왕비였습니다.”

캘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면 명분이 필요했으니까요. 탈리아 왕비는 공주님과 공주님의 어머니인 사라 님이 목표였지만, 마법사들은 그 기회를 잡아서 왕비의 세를 업고 자기들과 맞서는 이들을 전부 처리하기로 한 겁니다. 불을 쓰든 아니든, 자신들의 세력과 맞서는 이들은 전부 마녀라고 명명하고 사냥하면서, 닥치는 대로 잡아서 사이탄의 숲에 가뒀습니다. 다미아 님은 남은 마녀들을 결집해서 타르엔이라는 조직을 만들었죠. 정보를 모으기 쉬운 매음굴을 본거지로 삼고, 마법사들에게 핍박받는 백성들을 보살펴왔습니다.”

“자네 말만 들으면 다미아라는 그분은 아주 자애로운 분 같군.”

캘리의 말투엔 가시가 있었다. 그 이유를 아는 앤이 쓴 미소를 지었다.

“예. 짐작하시는 것처럼 다미아 님께선 조카인 공주님을 직접 보살펴 키우지 못했죠. 하지만 사정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지.”

“그게 아닙니다. 다미아 님은……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신 겁니다. 공주님께서 성장하셔서 여기에, 이곳에 오실 날을.”

캘리는 다시 한번 코웃음을 쳤다.

“그분은 내가 자랄 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어. 무사히 자라나면 공주니까 마녀들을 구해내고, 그 전에 죽으면 어쩔 수 없고. 뭐, 그런 거였나?”

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다미아 님은 공주님이 무사히 성장하셔서 이곳으로 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알았다고?”

“예. 그분은…… 예지력이 있습니다.”

순간, 캘리의 눈이 커졌다.

“예지력?”

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녀라고 몰린 사람들 중에서도 몇몇만이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원래는 신족이라고 불리는 종족인데…….”

“신족?”

“예. 바다 건너 신들이 사는 땅으로 알려진 카일룸의 근처에서 사는 종족입니다. 그곳의 땅은 안개와 바람이 뒤덮여 있어서 신족이 아닌 종족은 접근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신과 가장 가까운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 신족 중에서도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이들 중 하나가 사라 님이셨습니다. 공주님도 사라 님의 피를 이어받으셔서 불을 다룰 수 있는 것이고요.”

캘리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불을 다루는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그게 자신의 삶을 더 낫게 만든 건 아니니까. 아니, 더 힘들게 만들었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라이칸을 떠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랬다면 라이칸을 만날 일도 없었을까?

모르겠다. 운명이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니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만 아는 것도 벅차다.

캘리는 다시 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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