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10)화 (104/159)

110

“그래서? 다미아라는 그분이 내 앞날을 다 보았다는 거야? 내가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살지, 다 알고 있었다는 건가?”

“아니요. 다미아 님이 예지력이 있긴 하지만, 앞날을 훤히 내다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어떤 장면을 미리 보는 것이지요.”

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앤이 다시 말을 잇는다.

“사라 님이 화형당한 직후, 다미아 님은 앞날의 어느 날을 보았죠. 수녀원, 말하는 새, 그리고…… 어린 조카가 아름다운 여자로 자라서, 전사와 함께 있는 순간을 보셨습니다. 그 전사가 워렌 공작이라는 건 최근에 아셨습니다.”

캘리의 눈이 커졌다.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앤은 너무나 진지했다.

“다미아 님은 조카의 운명을 보았고, 그래서…… 어린 조카를 품에서 떠나보냈죠.”

“나를…… 엘프 여왕에게 보낸 사람이 그분이군.”

“예. 그렇습니다. 그 당시 엘프 여왕은 은을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디콘스에서 온 특이한 머리색의 여자아이를 자신의 휘하에 두는 것에 대해 꽤 흥미로워했습니다. 다미아 님은 탈리아 왕비의 힘이 미치지 않는 엘프 여왕에게 보내는 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했고요. 결국 엘프 여왕은 정기적으로 은을 받는 조건으로 황금색 머리칼의 여자아이를 자신만이 아는 수녀원에 보냈죠.”

“여왕은, 은을 받으면서도 날 내팽개쳐 버리고 신경도 쓰지 않았어.”

“다미아 님은 몰랐습니다. 디콘스 전역에서 마녀들을 처단하기 시작했고, 결국 다미아 님도 숨어 살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조카를 살펴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렵게 은을 모아서 엘프 여왕에게 보내는 것만도 힘에 부쳤으니까요. 우린…… 들키지 않고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너무 버거웠습니다.”

손을 떠나버린 조카에게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던 이유. 그래, 그것까지 뭐라고 할 순 없다. 캘리는 자신을 버린 이모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원망보다 이겨내야 할 현실이 더 중요하니까.

“마녀들은 전부 사이탄 숲에 갇혀 있다고 들었어.”

“예. 대부분은 갇혔죠. 하지만 거기 갇힌 이들이 전부 마녀는 아닙니다.”

“마녀가 아닌 자들도 거기에 갇혔다는 소린가?”

“마법사들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 이들도 전부 마녀로 몰아서 사이탄 숲에 밀어 넣었거든요. 거기엔 이 나라를 걱정하는 충신과 선량한 이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왕은 대체 뭘 하고…….”

“왕비와 마법사들이 만든 상황에서 왕은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겁니다. 왕비의 처소까지 불에 타는 일이 발생하자, 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조차 지킬 명분을 찾지 못했으니까요.”

“자네 말은, 그러니까 오래전에 펠리키에 불길이 번졌던 게 마녀의 짓이 아니라는 거군.”

“예. 그건 마법사들이 한 짓입니다. 자신들이 불을 내놓고 불을 다루는 마녀의 짓이라고 덮어씌운 거죠.”

“그들이 그런 짓을 한 이유가 뭐지?”

“애초에 마법사들은 자신들보다 능력이 뛰어난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권력에 맛을 들인 마법사들에게 사사건건 반기를 들며 옳은 말을 하는 이들이 눈엣가시였으니까요. 그중에서도 불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난 사라 님과 예지력을 가진 다미아 님 같은 이들에 대한 경계가 더 높아졌겠죠. 그래서 자기들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을 모두 싸잡아서 마녀라고 몰아댄 겁니다.”

캘리는 말리를 보았다.

“언젠가 자네가 그랬지. 마법사와 마녀가 뭐가 다르냐고. 평범한 인간과 달리 특별한 능력을 지녔으니 같은 부류라고.”

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말했지요. 그렇다고, 그들이 똑같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 마법사는 공기와 물, 대지의 기운을 이용해서 마법을 부리는 것이지만 사라 님처럼 일부 신족은 마력을 타고나니까요. 물론 마법사도 애초에 마력이 센 이들이 마법사가 되는 것이긴 하지만 그 능력의 차이가 엄격히 다릅니다.”

“그럼, 어째서 당하고만 있는 거지? 그렇게 마력이 세다면 나쁜 마법사들에게 대항하면 되잖아.”

앤이 말리 대신 나섰다.

“신족이 전부 사라 님이나 다미아 님처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니니까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신족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이 그런 능력을 타고납니다. 게다가 마법사들은 왕비와 왕세자의 권력을 등에 업기까지 했으니 우리가 대항하기엔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

“다 같이 어우러져 살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법사들은 욕심을 부렸죠. 때마침, 왕이 마음에 둔 여자가 불을 다루는 신족이었고, 아이까지 낳자 왕비의 질투심을 이용하기로 한 거죠.”

“…….”

“왕비는 왕이 다른 여자와 정을 통하고, 아이까지 낳은 것에 대한 질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다가 아니라고?”

“예. 마법사의 수장, 코르키도 약하지만 예지력이 있습니다. 그 코르키가 왕비에게 말했다더군요.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대륙을 지배하게 될 거라고.”

캘리는 코웃음을 쳤다.

“그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했군.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또 있다면 모를까.”

“공주님 같은 그런 머리색을 가진 여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언을 한 마법사 수장이 틀린 소릴 한 거지. 난 절대 그럴 일이 없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야.”

라이칸. 그를 만나서 다시 베아투름으로 가서 함께 있는 것.

그것이면 된다. 공주니, 뭐니, 다 필요 없다. 오직 그것만 원한다.

앤의 얼굴이 굳었다.

“공주님.”

캘리가 눈살을 찌푸리자 앤이 천천히, 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은 이제 평범한 여자로 베아투름으로는 못 돌아가실 겁니다. 워렌 공작을 만난다고 해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캘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모든 이들이 공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왕비와 왕세자. 마법사들까지. 그리고…… 공주님의 부친이신 아르 왕까지.”

캘리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앤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공주님이 워렌 공작에게 돌아가면…….”

그는 모두의 적이 된다.

내가 마녀라는 이유로, 왕의 사생아라는 이유로.

왕비와 왕세자, 그리고 마법사들은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마녀는 화형시켜야 한다는 법에 의해, 왕은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고. 그러니까, 라이칸이 나를 지키려면 그들과 맞서야 하고…… 그건 왕에게 맹세한 서약을 깨게 되는 것과 같다.

반역.

캘리는 그 잔인한 결론을 완벽히 이해했다.

***

“지코이를 구하기가 힘듭니다.”

앤이 선언하듯 말하자 캘리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말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어쩌지? 두건이나 후드를 잘 쓰고…….”

“아니요. 말리. 그건 한계가 있습니다. 공주님 머리카락은 너무 밝고 튀는 색이라 한 올이라도 흘러나오면 누구라도 바로 알아차릴 겁니다. 밖에는 지금 황금빛 머리칼을 가진 소녀에 대한 노래를 아이들까지 따라 부르고 있으니까요.”

“지코이를 구하는 게 그렇게 힘든가?”

“예. 파는 자가 많지 않을뿐더러 섣불리 많은 양을 구하려다가 놈들에게 꼬리를 잡힐 수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 혹시 몰라서 지코이를 취급하는 상인을 바꿔 가면서 구입을 하고 있지만…….”

앤이 캘리의 등까지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공주님 머리카락이 워낙 풍성하고 길어서, 웬만한 양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말리의 표정도 흐려졌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캘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군.”

모두가 생각하고 있는 것.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카락을 자를게.”

“괜찮으시겠어요?”

말리가 다시 물었다. 벌써 세 번째 묻는 거였다.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괜찮아.”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는 거니까.

‘남자아이 옷을 입고 다니셨으면 합니다. 여기가 매음굴이라 사내들의 출입이 잦은데, 공주님이 다니시다가 행여 곤란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으니까요.’

앤은 머리카락을 자른 후엔 사내아이 행세를 하라고 했다. 캘리는 그 말에 기꺼이 동조했다. 위험한 상황인데, 여자라는 이유로 위험에 노출될 수는 없었다.

캘리는 애써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곧 다시 자랄 거야. 마법사들에게 들켜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단 낫잖아.”

말리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건 그렇지요.”

그리고.

“그럼, 자르겠습니다.”

캘리는 심호흡을 했다. 어릴 때, 한 번 짧게 자른 적이 있다. 아니, 잘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수녀원의 규칙을 어기고 밖으로 나가서 놀다가 돌아왔을 때, 기다리고 있던 수녀원장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머리카락을 잘라버렸었다. 그땐 세상이 끝난 것처럼 슬프게 울었었는데…….

지금은 괜찮다. 그땐 머리카락이 영영 자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시 자랄 것을 알고 있다.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캘리는 말리가 가위질을 시작하는 걸 지켜보았다.

사락, 사락, 금빛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

어색하다.

캘리는 거울 속에 있는 모습이 자신 같지가 않았다.

목이 드러날 정도로 짧게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 거기에 셔츠와 조끼, 바지까지 입은 모습은 영락없이 사내아이처럼 보였다.

“이것도 지니고 다니세요.”

옆에서 지켜보던 말리가 뭔가를 내밀었다. 캘리의 눈길이 내려졌다.

라이칸이 준 단도다.

그의 신부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받았던 건데, 지금은 그때가 왠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가 이걸 줬을 때, 얼마나 설렜는지…….

캘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단도를 받아서 옆구리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말리가 엉덩이까지 오는 짧은 망토를 입혀주며 후드를 씌워주었다. 이젠 정말 남자처럼 보였다. 체격이 왜소해서 어른 남자로는 보이지 않는 게 문제긴 하지만.

“이젠 나가도 되겠다.”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캘리는 고개를 돌렸다.

다미아.

“머리카락이 아까웠겠구나.”

다가온 다미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캘리는 무뚝뚝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차피 다시 자랄 테니까 상관없어요.”

“그래. 다시 자라겠지.”

잠시 캘리를 바라보는 다미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나와 함께 갈 데가 있다.”

“어딜요?”

“너도 펠리키의 실상을 알아야지. 왕궁 도시는 처음이지?”

“네…….”

궁금하긴 하다. 왕궁이 있는 대도시는 어떨지. 그리고, 혹시라도 라이칸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도 있고.

“말리도 함께 갔으면 합니다.”

다미아가 고개를 저었다.

“위험해. 말리는 오드아이라 너무 눈에 띄어서.”

“맞습니다. 전 여기 있는 게 나아요.”

말리까지 그렇게 말하자 캘리는 곧바로 수긍했다.

“그래. 알았어.”

캘리는 다미아를 보았다.

“지금 나가는 건가요?”

“그래. 밖으로 나가면 넌 내 시종으로 행세를 해야 돼.”

다미아가 먼저 방을 나가자 캘리는 말리에게 재빨리 속삭였다.

“베아투름으로 소식을 보낼 방법을 알아봐 줘.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라도 전해야겠어. 스리디오가 내 소식을 알게 되면 조치를 취할 거야.”

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베아투름까지 갈 수 있는 전령을 알아보고 그게 정 안 되면 여행자라도 찾아보겠습니다.”

“고마워. 자네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캘리는 재빨리 말하고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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