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23)화 (117/159)

123

“부인은 남부의 따뜻한 곳에서 살던 분이야. 갑자기 추운 베아투름에서 살라고 하니까 겁이 났던 것 같아. 그래서 좀 덜 추운 곳에서 적응을 한 다음에 다시 온다고 했어.”

“그걸 워렌 공작이 허락했다고?”

“처음엔 안 했지. 근데 나중엔 이해했어.”

한번 시작하니, 거짓말이 끝도 없다. 게다가 술술 잘 나온다.

“그러니까 도망은 내가 말실수한 거야. 베아투름에도 봄이 시작되었을 테니, 부인은 벌써 집에 가셨을 거야.”

“그럼, 공작은 펠리키에 왜 왔는데?”

“왕을 알현하려고.”

“근데 궁으로 안 가고 왜 여기로 왔어?”

“궁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변 탐색부터 하는 거라고 했잖아. 처음에 다 말했는데 왜 또 물어? 귀찮게.”

로베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와이엇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나도 바쁜 몸이야.”

“소문엔 공작부인이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졌다던데…….”

“뭐? 누가 그래?”

와이엇이 놀라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로베르가 왜 이래? 하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아니야?”

“아니야. 황금은 개뿔. 그냥 머리색이 연한 것뿐이야.”

“무슨 색인데?”

“그…… 똥색.”

“뭐?”

로베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와이엇이 다시 말했다.

“맛이 간 음식 먹고 나면 배가 살살 아프면서 똥도 연하게 싸잖아. 딱 그 색이야.”

“그러니까, 공작부인의 머리색이…… 똥색이다?”

“그래. 머리색이 연한 걸 가지고 어떤 썩은 눈깔이 황금색이 어쩌고 한 거지.”

“진짜야?”

“진짜지, 그럼. 내가 오죽하면 공작부인 머리색이 똥색이라고 하겠냐.”

“하긴…… 공작부인이 네 말을 들었으면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었겠네. 여자들이 한을 품으면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잖아.”

문득, 와이엇은 몸에 한기가 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런 거짓말까지 하게 만든 원흉을 보자 부아가 치민다.

“비켜! 바쁜 사람 가로막고 괜한 헛소리나 지껄일 시간에 공작님을 얼마나 잘 모실지나 생각해.”

와이엇이 걸어가려 하자 로베르가 재빨리 붙잡았다.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야.”

“뭔 소리야?”

“공작님을 잘 모시고 싶다고. 그러니까 묻는 건데…… 성에 어여쁜 여자가 몇 있는데, 공작님 방으로 보낼까?”

“미친놈!”

와이엇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로베르의 멱살을 잡았다.

“넌 그랬다간 제 명에 못 살 거다.”

와이엇의 손을 홱, 뿌리친 로베르도 험악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아, 왜? 부인도 안 계신데, 여자를 품으면 피곤도 가시고…….”

“아서라. 생각지도 마. 공작껜 부인이 유일한 여자니까.”

“뭐?”

갑자기 로베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공작같이 젊고 기세등등한 사내한테 여자가 하나뿐이라고? 그것도 부인만 여자라고? 말이 돼?”

와이엇은 혀를 찼다.

“너 같은 놈은 모르겠지. 한 여자만 보는 남자의 올곧은 마음을.”

“그런 전사가 어딨어?”

“많아. 네 앞에도 서 있잖아.”

“뭐?”

“몰랐냐? 난 리안나와 결혼한 후, 다른 여자는 단 한 번도 안은 적이 없어.”

말을 마친 와이엇은 ‘비켜’ 하면서 놈을 밀치고 가던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로베르가 욕하는 소리가 날아왔다.

“미친놈. 덜떨어진 놈. 세상에 널린 게 여잔데!”

와이엇은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운명의 상대를 못 만나서 저러지. 진짜 상대를 만나서 사랑하면서 느끼는 행복이 어떤 건지도 모르는 거지. 불쌍한 놈.”

***

성안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홀 안쪽에 있는 하인들 부엌까지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하인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손님들을 위해 분주히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너무 바빠 보여서 선뜻 부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데 바구니를 든 하녀 하나가 나왔다. 캘리는 얼른 그 하녀를 붙잡았다.

“성의 집사를 만나러 왔는데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하녀가 그녀를 보며 인상을 썼다.

“집사는 왜?”

“공작님께 가져다드린 옷이 작아서요. 좀 더 큰 옷이 필요한데, 집사에게 말하면 줄 거라고…….”

“어이.”

갑자기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캘리는 고개를 돌렸다. 순간, 몸이 굳었다. 남자는 몸집이 컸다. 아, 물론 라이칸에 비하면 작다. 하지만 가녀린 그녀에겐 큰 사내였다. 그런데 그 몸집이 문제가 아니었다.

눈빛.

그녀를 보는 남자의 눈빛이 반질거리고 있었다.

저건 암컷을 욕심내는 수컷의 눈빛이다.

캘리는 라이칸이 한 말을 떠올렸다.

‘전사들 중에는 여자보다 예쁘장한 사내한테 침을 흘리는 놈들도 많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섰다.

“엘리오 님.”

하녀가 남자를 향해 인사를 하자, 캘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족인가?

남자가 캘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하녀가 얼른 나선다.

“워렌 공작님의 종자랍니다.”

“공작의 취향이 흥미롭군. 이렇게 예쁘장한 종자라니.”

남자의 음흉한 눈길이 그녀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한 번에 주욱 훑었다.

“난 로베르의 동생, 엘리오다. 성을 잠깐 나갔다 왔는데 공작이 와 있다기에 놀랐지.”

동생? 아, 젠장. 하필이면 영주의 동생이라니.

캘리는 살짝 입술을 물었다가 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나리. 전, 워렌 공작이 갈아입을 옷을 구하려고 집사를 찾으러 왔습니다.”

상대가 두려움이 뭔지 아는 사내라면, 워렌 공작의 종자에게 무슨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갑자기 남자가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뭐지? 목소리까지 가늘잖아. 드레스를 입히면 진짜 계집애라고 해도 믿겠어.”

“그, 그럴 리가요.”

캘리는 얼른 말하고 하녀를 돌아보았다.

“옷은 나중에 다시 가지러 오겠소.”

서둘러 몸을 돌리던 그때였다. 그녀의 손목이 거친 사내의 손에 홱, 붙잡혔다. 캘리는 기겁하며 몸을 돌렸다.

“왜, 왜 이러십니까? 놓으십시오.”

놈이 씨익, 웃는다.

“집사가 어딨는지 알아. 내가 데려다주마.”

“아니요. 괜찮습니다.”

캘리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팔을 흔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하녀에게 차갑게 명령했다.

“넌 가서 할 일이나 해.”

“예?”

하녀가 놀란 얼굴을 하자 남자가 눈을 험악하게 치떴다. 그러자 하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가면서 한 번 돌아보는데, 그 눈빛이 마치 경고하는 것 같았다.

조심해. 저자는 위험한 자야.

캘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빠져나가야 한다.

“공작님께서 저를 찾으실 겁니다. 놔주세요.”

캘리는 힘껏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흠칫, 놀라서 물러서려 했지만 남자가 우악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당겼다. 그 사나운 힘에 몸이 허무하게 딸려갔다.

코앞에 얼굴을 들이민 남자의 눈은 조금 전보다 더 반질거리고 있었다.

“뭐야? 진짜 예쁘게 생겼잖아.”

“저는 사냅니다.”

강하게 말했다. 그러자 놈이 비싯, 입꼬리를 올린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

놈이 갑자기 그녀를 홱, 돌려세웠다.

“뭐, 뭐 하는 짓입니까?”

“얌전히 있어.”

그러더니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났다.

“이런. 엉덩이도 아주 탄탄하군.”

“저는 워렌 공작의……!”

갑자기 놈의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캘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어 놈에게서 떨어졌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빽, 소리를 지르고 몸을 돌리는데 우악스러운 손이 다시 그녀를 잡아서 돌려세우더니 턱을 움켜잡았다.

“피부가 이렇게 희고 부드럽다니. 목소리도 가늘고 말이야.”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그 떨리는 숨결을 느낀 남자의 눈빛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거, 아주 물건이군. 정말…… 흥분돼.”

캘리는 놈의 정강이를 향해 차올렸다. 하지만 놈은 슬쩍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하는 짓도 귀엽군. 좋아. 오늘 식사 메뉴는 너로 정했다.”

빌어먹을.

“지금 당장 날 놓아주지 않으면 넌 죽을 거야.”

잇새로 내뱉듯 말하자 놈이 콧방귀를 뀐다.

“이런 겁 없는 녀석 같으니. 네가 공작의 뭐라도 되는 거야? 기껏 종인 주제에. 공작의 종자도 결국 종일 뿐이야. 어디서 감히……. 그래, 좋아. 뭐든 좋아. 지금은 너의 건방진 행태도 봐주마.”

놈이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 같은 남자아이를 본 적이 있지. 도시에서 꽤 자주 봤어. 근데 그놈들이 사는 방식이 참 편해. 험한 일도 안 하고, 주인에게 은밀한 즐거움을 주고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너도 공작이 예뻐해 주느냐?”

남자의 목소리가 걸걸했다. 예뻐해 주느냐는 의미가 무슨 뜻인지 너무나 명확했다.

캘리는 눈을 치뜨고 턱을 들어 올렸다.

“이거 놔.”

“하.”

놈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가자. 내가 집사 있는 곳으로 데려가주마.”

놈이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물론, 그 전에 재미를 좀 보고 말이야.”

그 웃음이 어찌나 징그러운지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놔. 놓으라고!”

안 가려고 버티다 보니, 발이 질질 끌렸다. 허리춤에 걸려 있는 단검을 잡았다. 그런데, 없다.

오, 젠장. 단검을 챙기지 않았어.

캘리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팔을 흔들고 발길질을 했다. 그러자 놈이 그녀를 어깨에 번쩍, 둘러멨다. 공포에 질린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놔! 놓으란 말이야!”

그때였다.

“멈춰라!”

커다랗고 차가운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어깨에 짐짝처럼 걸쳐진 캘리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로 이미 누군지 알아차렸다.

오, 맙소사. 라이칸.

캘리는 또 다른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가 이 남자를 죽일 수도 있다. 아니, 죽이려 할 것이다.

“내려놔요. 빨리.”

캘리는 주먹으로 남자의 등을 때렸다. 놈이 그제야 그녀를 내려놓았다. 캘리의 눈이 험악한 얼굴을 한 라이칸에게 향했다. 그가 성큼 다가왔다.

눈빛이 불길하다. 분노로 가득한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게 보였다.

캘리는 얼른 그에게 다가섰다.

“공작님…….”

달래듯 팔을 잡았지만 그가 그녀를 옆으로 밀쳤다. 캘리는 단박에 그의 시야에서 밀려났다.

라이칸이 놈에게 다가섰다. 순간, 뭔가가 번쩍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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