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27)화 (121/159)

127

잠이 오지 않는다.

캘리는 등 뒤에서 규칙적인 호흡을 하고 있는 라이칸을 슬쩍 돌아보았다.

깊이 잠든 게 확실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을 조심스럽게 밀기 시작했다. 천천히, 밀면서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그녀를 꽉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이번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자세가 돼버렸다.

후우.

그녀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동도 없는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깬 건 아닌 것 같았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그녀는 어깨를 안고 있는 손을 슬쩍 밀어내고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혹시라도 예민한 그가 깰까 봐 일어나 앉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잠든 얼굴을 살폈다.

달이 밝아서 다행이다.

캘리는 천천히 일어나 앉아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어디 가려고?”

이제 막 일어서려던 그녀의 눈이 화악, 커졌다. 젖혔던 이불을 홱 끌어당기면서 고개를 돌리니 그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잠이 덜 깬, 나른한 눈빛으로.

캘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깼어요? 미안해요. 난 그냥…….”

그가 몸을 일으켰다. 놀란 그녀는 얼른 말했다.

“더 자요.”

“됐어. 어차피 네가 없으면 못 자.”

캘리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설렘이 퍼졌다.

“전에는 잘 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성안이 위험한데 혼자 돌아다닐까 봐 신경 쓰여서 못 잔다는 뜻이야.”

아, 그거였어? 난 또.

그가 고백하는 건 줄 알았다. 이젠 내가 없으면 잠도 못 잔다고, 그만큼 내가 중요한 존재가 됐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가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안 가?”

캘리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딜요?”

“볼일 보고 싶어서 일어나려던 거, 아니었나?”

“아뇨. 그냥 잠이 안 와서…….”

“잠이 안 온다고?”

“네.”

“어젯밤엔 내가 너무 쉽게 놔줬나?”

심각한 표정을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캘리는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니에요.”

그럼? 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그…… 일에 적응이 됐나 봐요.”

말하면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가 가늘게 눈을 좁히더니 묻는다.

“그 일?”

“그러니까…….”

캘리는 열이 오른 얼굴을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

“연달아 몇 번씩…… 하는 거.”

“그래?”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낮게 변했다. 그러더니 침대에 무릎을 대고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인다. 캘리는 다가오는 그를 보며 가슴 언저리에서 이불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거의 덮칠 듯 가까워진 그가 동그란 어깨에 입술을 대며 중얼거린다.

“그럼, 더 해야겠군.”

살에 닿는 입김이 뜨겁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가 그녀가 쥐고 있는 이불을 뺏어서 옆으로 치워버렸다. 순간, 뽀얀 가슴이 달빛 아래에서 완전히 드러났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뒷목을 움켜잡더니 쇄골에 입술을 대고 점점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정말 또 할 모양이다.

캘리는 얼른 그의 얼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산책 가요.”

“뭐?”

“좀 걷고 싶어요.”

그가 인상을 쓴다.

“이 밤에?”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방 안에서만 지냈어요. 답답해요.”

물끄러미 쳐다보는 눈길을 올려다보며 눈꼬리를 접고 웃었다.

“다들 자고 있을 테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주 잠깐만 바람 좀 쐬면 안 돼요?”

끝으로 갈수록 조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결국 그가 나직한 한숨을 쉬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옷 입어.”

***

휘청.

계단 모서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그녀를 그가 와락 붙잡았다.

“조심해.”

“아, 발밑이 어두워서…… 여기 계단은 가파르네요.”

할리 성의 계단은 다른 계단과 달리 높고 가팔랐다. 탑 안은 평범한 높인데, 외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유독 그랬다.

앗.

그가 갑자기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놀란 그녀가 얼른 목을 끌어안자 그가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할리 성은 지대가 낮은 곳에 지어졌어. 주변을 경계하려면 탑을 높게 쌓아야 되는데, 그만큼 돌이 더 필요하지.”

“돌을 아끼려고 계단을 높인 거군요.”

“덕분에 천장이 저절로 높아졌지.”

“탑은 높지만 층수는 높지 않게 하려고.”

“그렇지.”

문득,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숨기려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티가 났다.

그가 멈춰 서더니 내려다본다.

“왜 웃어?”

캘리는 고개를 들어 라이칸을 보았다.

“옛날 생각나서.”

슬쩍, 가늘게 눈을 좁히는 그를 보며 다시 말했다.

“예전에. 우리, 여행할 때요. 폭포 근처에서 야영하고 난 아침에…… 당신이 지금처럼 날 안고 목욕하러 갔잖아요.”

피식, 그도 생각난다는 듯 옅게 웃더니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캘리는 그의 목을 더 힘껏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때보다 지금이 나은 것 같아요.”

그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어떤 면에서?”

캘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금의 난 당신한테 숨기는 게 없으니까.”

근데, 당신은 내게 말 안 하고 있는 게 있죠.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걸 그는 알 것이다. 하지만 라이칸은 아무런 대꾸 없이 다시 움직였다. 얼마 후, 탑 꼭대기에 다다른 그가 내려주자 캘리는 확 트인 사방을 둘러보며 활짝 웃었다.

“시원하네요.”

그가 다가와 뒤에서 끌어안는다. 캘리는 널찍한 등에 기대며 속삭였다.

“물론, 베아투름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비할 바가 못 되지.”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캘리는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먼 곳을 향하고 있는 얼굴이 밝지가 않다.

캘리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베아투름보다 아름다운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그가 시선을 내려 쳐다본다. 캘리는 그 깊은 눈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라이칸이 그녀를 품으로 더 당겨 안았다. 머리 위에 닿는 숨결이 따스해서 서늘한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

“떠……났다고?”

캘리가 멍하게 다시 묻자 말리가 손을 토닥이며 말한다.

“금방 오실 겁니다. 부인을 노리는 자객 집단의 본거지를 소탕하러 가셨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하셨습니다.”

내게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밤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그는 다시 그녀를 안았다. 지쳐서 잠들어 그가 가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깨울 수 있었잖아. 아니면 산책을 나갔을 때 말을 했어야 했다.

어딜 간다고, 얼마나 걸린다고, 그러니 기다리라고.

“칸께서 제게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부인 곁을 절대 떠나지 말라고.”

말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캘리는 몸을 돌려 창가로 갔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길을 떠나면서, 내겐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니.

나의 생각이나 마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걸까?

이렇게 제멋대로, 상대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할 땐 정말이지…….

캘리는 붉어진 눈을 감았다. 따끔거리는 열기가 느껴진다.

라이칸,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불안하다.

언덕 위에서 다시 만난 후로, 그는 내내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군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깊은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캘리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걱정되십니까?”

말리가 조용히 묻자 캘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강한 전사야.”

“그럼, 뭐가 그렇게 두렵습니까?”

“모르겠어. 나는…….”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답답하다.

“요즘, 라이칸에게서 거리가 느껴져. 원래 시시콜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칸이 변심할까 봐 걱정되십니까?”

“아니. 나 때문에 그가 해를 입을까 봐 걱정돼.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왕에게 대항이라도 한다면…….”

“물어보셨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 달라고 해보셨습니까?”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는 그런 걸 말해 주는 사람이 아닌걸.”

“그래도 해보세요. 부인이 지금 느끼는 불안감이 어떤 건지, 솔직히 터놓으면 칸도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지 않을까요?”

캘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는 말해 주지 않을 거야. 내가 걱정하는 걸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먼 길을 가면서도 내게 말도 하지 않고 간 거겠지.”

말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었다.

“칸이 부인을 몹시 아끼시는 겁니다.”

캘리도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아. 나도. 하지만…… 그가 내게도 의논을 해줬으면 좋겠어. 적어도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말끝을 흐린 캘리는 창밖을 보았다.

우선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 수밖에 없다.

돌아오면, 말해 봐야지.

앞으로의 계획이 뭔지, 그 정도만이라도 내게 알려달라고 말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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