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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스는 문을 와락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 있던 부하가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경.”
“무슨 일인가?”
급한 일이라는 전갈을 받고 단숨에 뛰어온 길스는 부하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뭔가? 이자는.”
“왕비님 탄신일에 궁으로 불려가 노래를 한 음유시인입니다.”
길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지?
부하가 시인에게 차갑게 말했다.
“내게 고한 것을 나리께도 고해라.”
시인이 겁먹은 얼굴로 쭈뼛거리더니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할리 성에서 보았던 걸 말한 게 전붑니다.”
“할리 성?”
길스가 묻자 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동쪽에 있는 로베르 자작의 성인데…….”
“그 성에 대해선 알고 있어. 거기서 연주를 했느냐?”
“예. 펠리키로 오는 길이었는데, 자작님의 부인이 저를 친히 불러주셔서 이틀을 묵었습니다.”
길스가 계속하라는 듯 쳐다보자 시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성을 떠나는 날에 뜰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는데…….”
“소란?”
“예. 영주님의 동생과 공작 전하가 결투를…….”
“잠깐.”
길스는 한 손을 들어 말을 멈추게 했다.
“방금 뭐라 했나? 공작?”
“예. 저희가 가기 전에 와계셨던 워렌 공작께서…….”
“워렌 공작이 할리 성에 있다고?”
길스가 다급하게 묻자 시인이 움찔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거기 계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부인은?”
시인은 고개를 저었다.
“부인은 안 계셨습니다.”
“확실한가?”
“예. 확실합니다. 영주 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워렌 공작이 기사들과 종자, 그리고 이상한 여자들을 데리고 성에 왔다고요.”
“이상한 여자들?”
“난쟁이 여자가 있었고, 붉은 머리의 여자, 그리고…… 오드아이 노파가 하나 있었습니다.”
길스의 눈이 번뜩였다.
말리다. 그 노파를 본 적이 있었다.
“공작님과 영주의 동생이 왜 결투를 하게 됐는지도 말해라.”
부하가 재촉하자 시인이 얼른 말을 이었다.
“영주의 동생이 공작님이 부리는 종자를 희롱하려 했답니다. 그래서 공작님이 결투를…….”
“종자를 건드리려 했다고 결투를?”
“예. 그게…… 모두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습니다. 하찮은 종자 때문에 결투까지 하겠다니……. 그래도 엘리오…… 그러니까 영주의 동생의 행실이 평소에도 워낙 불량해서 모두들 그 결투를 은근히 반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결투는 어떻게 됐지?”
“결투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영주의 동생이 용서를 빌었고, 영주께서 지하 감옥에 보름 동안 가두라는 벌을 대신 내리는 걸로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길스는 시인을 노려보다가 물었다.
“그러니까, 할리 성에 지금 워렌 공작이 있단 말이군.”
시인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성을 나와서 야영을 할 때, 공작이 기사들을 이끌고 펠리키를 향해 말을 타고 가는 걸 봤거든요.”
“일행이 전부?”
“전부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할리 성에 있던 기사들은 꽤 많았는데, 달려가는 무리의 수는 그보다 적어 보였습니다.”
길스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물었다.
“너는 공작의 종자를 보았느냐?”
“예. 한 번은 스치듯 잠깐 봤고, 주로 창가에 서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방에서 잘 나오질 않아서요.”
“워렌 공작 방에서?”
“예.”
“어떻게 생겼지?”
“그냥,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하얀 얼굴이었고, 몸매도 가냘픈 것이, 진짜 소녀처럼 예쁘장했습니다.”
“머리카락은?”
“목 언저리까지 오는 곱슬머리…….”
“아니, 머리카락 색을 묻는 것이다.”
시인이 기억을 더듬는 듯 갸웃거리더니 대답했다.
“옅은 갈색이었습니다.”
“…….”
“그런데, 평범한 갈색은 아니었습니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쬘 때, 언뜻 노란빛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
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길스가 홱, 몸을 돌렸다. 그러자 부하가 황급히 다가왔다.
“종자가 의심스럽다.”
“예.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길스는 부하를 보았다.
“당장 기사들을 모아. 병사도 최대한 많이 불러 모으고.”
“병사요?”
길스는 험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장 할리 성으로 가야겠다!”
***
캘리는 번쩍, 눈을 떴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위는 깜깜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니 사물이 흐릿하게 보인다.
침실.
아직 밤이 깊은데…… 왜 잠이 깼을까?
툭.
작은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차가운 쇠붙이가 턱 밑에서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자칫, 고개만 잠깐 틀어도 살이 베일 것 같은 서늘함이었다.
“일어나라. 종자야.”
쉰 듯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자 등줄기로 싸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간다.
캘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검 끝도 함께, 따라 움직였다. 똑바로 앉아서 앞에 선 사내를 보았다. 구름이 숨기고 있던 달을 뱉어냈는지, 희뿌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흐린 빛이 사내를 비추었다.
캘리의 눈이 커졌다.
엘리오!
지하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할 남자가 어째서 여기에?
공포가 엄습해 온다. 두려움이 등줄기를 치달린다.
깊은 밤에, 라이칸도 없는 이 방에 몰래 기어들어 온 놈의 의도가 뭔지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횃불이 휘익, 다가와 그녀를 비췄다. 순간, 놈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하. 요것 봐라.”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린 놈이 검 끝을 움직였다.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목에서 가슴께로 내려가더니 슈미즈의 끈을 툭, 끊어버렸다. 툭,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벌어진 틈으로 뽀얀 굴곡이 드러나고 급기야, 봉긋 솟아오른 가슴 사이의 골이 나타났다.
“하.”
놈이 기가 찬 듯 소리를 내더니 침이라도 흘릴 것처럼 기름진 소리를 냈다.
“계집애잖아.”
캘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자 하얀 목덜미가 움직이고 그 파동이 쇄골까지 내려갔다. 놈의 눈에 반지르르한 윤기가 돈다.
검이 치워졌다. 놈이 돌아서더니 벽에 횃불을 꽂았다.
음흉한 미소를 지은 놈이 다가와 침대에 무릎을 대자 그녀는 온몸에 돋는 소름을 느꼈다. 제멋대로 뻗어온 손이 뺨에 닿는 순간, 캘리는 흠칫, 몸을 떨었다.
“살결이…… 비단이구나.”
그러더니 얼굴을 들이밀고 킁킁거린다.
“맙소사. 이 향기는 뭐지?”
놈이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왔다. 고개를 비틀어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들이대고 개처럼 냄새를 맡았다.
캘리는 가만히 손을 등 뒤로 뻗었다.
“아…… 이년…… 살이 정말 연하구나. 사내놈들 환장하게 하는 냄새도 나고. 이래서 공작이 너한테 미쳐 있는 건가? 혹여 다른 놈이 넘볼까 봐 종자라고 거짓말까지 해가며 너를 숨겼구나.”
놈이 헐떡이며 혀를 내밀어 그녀의 목덜미를 핥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바지 끈을 풀기 시작했다.
“달다. 달아.”
축축한 혀가 살갗에 닿을 때마다 캘리는 이를 악물었다.
섣불리 밀어내는 것보다 기습이 더 치명적인 공격일 것이다.
더듬더듬, 등 뒤를 만지던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잡혔다.
캘리의 눈이 번뜩였다. 손에 잡힌 단검을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놈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와락 움켜잡았다. 놀란 그녀가 홱, 몸을 젖히며 검을 빼려는 순간, 머리채를 잡혔다.
“악!”
비명이 제대로 터지기도 전에 놈이 그녀의 입을 막고 돌려 눕혔다. 단검을 빼앗아 바닥으로 던지더니, 머리채를 잡고 홱 들어 올렸다. 윽, 소리도 못 낸 채 그녀의 목이 뒤로 꺾였다.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해. 당장이라도 이 예쁜 목을 부러트릴 수 있으니까.”
캘리는 이를 갈았다. 놈을 떨쳐내려고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우악스러운 사내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반항해. 그럴수록 내 물건은 더 크게 흥분하니까.”
탁한 목소리를 내며 놈이 그녀의 뒷목에 입술을 댔다. 그리고 엉덩이에 자신의 하체를 비비기 시작했다.
“으으으. 탱탱한 엉덩이 감촉이 죽이는구나. 간만에 제대로 꼴려.”
캘리는 몸부림을 쳤다. 입을 틀어막고 있는 놈의 손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위에서 덮치듯 누르고 있는 살덩이를 떨칠 수가 없었다. 절망이 밀려왔다. 눈물이 흘렀다.
“울지 마. 아가씨. 내가 너를 즐겁게 해줄 거니까. 내 물건도 공작만큼 세다고. 한번 맛보면 너도 만족할 거야.”
놈이 머리칼을 놓고 몸을 세웠다. 다 풀지 못한 바지 끈을 마저 푸는지 누르는 힘이 살짝 느슨해졌다. 순간, 캘리는 고개를 팍, 틀었다. 바지를 벗는 데 집중하던 놈의 손이 떨어지자 있는 힘껏 깨물었다.
“윽!”
놈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자 팔꿈치를 세게 들어 올렸다. 순간, 놈이 코를 잡으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놈을 밀치고 일어난 그녀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집었다.
놈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끈이 풀어진 바지가 주르륵, 아래로 내려가고 흉물스러운 물건이 발딱 일어선 게 보였다.
“망할 년. 내, 오늘 너를 반드시 잡아먹고 말 것이다. 그리고 목을 베어주마. 공작이 돌아오면 허허벌판 한가운데에 대가리만 걸려 있는 너를 보게 될 것이다.”
“죽고 싶은 모양이지? 난 워렌 공작의 여자야.”
“하. 그래. 네 입으로 여자라고 실토를 하네. 하긴 실토하지 않을 수가 없지.”
놈의 눈이 그녀의 가슴께로 향했다. 그리고 다가온다.
“공작이 여기에 왔을 때, 나는 없을 거야. 사실, 진작부터 이 성을 떠날 생각이었거든. 난 동쪽의 야만인이 사는 곳에 땅을 마련했지. 거기 수장에게 모아둔 금을 바치고 수장의 딸을 아내로 맞을 거야. 아무리 워렌 공작이라도 거기까지 나를 찾아올 순 없어.”
“아니! 네가 어디에 숨든, 라이칸은 너를 찾아낼 거야. 그가 무엇이라 불리는지 몰라? 왜 지옥의 사자라고 불리는지 모르는 거야? 그가 쫓는 상대는 반드시 죽어.”
캘리가 차갑게 내쏘자 놈이 눈을 치떴다.
“이년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는구나. 공작이 지옥의 사자건 뭐건, 왕의 기사야.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 전쟁을 할 수 없어. 왕은 병들었고 왕세자는 야만인을 두려워하지. 그러니 공작이 왕이 되지 않는 이상, 야만인을 칠 수 없단 말이지.”
캘리는 놈을 향해 단검을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