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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서 그 입을 함부로 놀리시면 오늘 제가 봤던 일을 폐하께 고할 것이오.’
‘무, 뭐를 고한다는 것이오?’
‘공주를 희롱한 것.’
‘뭐? 나는 그런 일이 없어!’
‘자신 있으면 왕 앞에서 그리 말해 보시든가. 내가 장담하는데, 왕 앞에 서면 공주도 내 편일걸?’
라이칸은 자신만만했다. 왕자가 그녀를 보았지만, 캘리는 칸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왕자가 이 일에 대해 떠들고 다니지 않게 해야 한다. 왕 앞에 섰을 때, 내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왕자도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표정을 본 왕자는 결국 와이엇을 따라갔다.
왕자는 오늘 일을 섣불리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공주를 희롱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검은 늑대에게 처참히 밟혔다는 게 알려지는 게 죽기보다 싫을 테니까.
그게 이 세상 남자들의 자존심이었다.
캘리는 왕자가 멀어지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우리도 가야 해요. 이렇게 둘만 있는 걸 사람들이 알면…….”
툭, 툭, 갑자기 차가운 물기가 머리와 어깨로 떨어졌다.
놀란 그녀가 위로 고개를 쳐들었다.
한두 방울 내리던 비가 후두두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 와요.”
황급히 말하는 순간, 라이칸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고 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해서 따라 뛰었다.
“여긴 어디죠?”
커다란 바위 아래로 피한 캘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고 발밑은 온통 돌바닥이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달리느라 어디로 들어온지도 몰랐다.
캘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숲속으로 더 깊이 들어온 것 같아요. 사람들이 우릴 찾을 텐데…….”
그녀가 바위 아래에서 나가려 하자 그가 팔을 잡았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어떻게 가려고?”
“어차피 조금은 젖었어요. 좀 더 젖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우리가 같이 없어진 걸 왕비 전하가 아시면…….”
“어딘가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둘이 같이요?”
“다른 사람들도 비를 피해서 흩어졌을 거야.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어차피 모여 있을 공간도 없어.”
쏴아아아. 비는 정말 무섭게 내리기 시작했다.
라이칸이 그녀를 쓱, 훑어보더니 불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게다가 그 옷은 더 젖으면 안 돼.”
캘리가 쳐다보자 그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사냥 나오면서 그렇게 얇은 드레스가 적절하다고 생각해?”
타박하는 듯한 말투에 부아가 치밀었다. 물론, 이 옷은 내가 고른 게 아니고 왕비가 입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입었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 주기 싫었다.
“적절하지 못할 건 뭐죠? 어차피 여자들이 사냥터에 따라 나오는 건 남자들의 활약을 응원이나 해주려고 오는 건데.”
라이칸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공주님께서도 왕자님을 응원하려고 그렇게 꾸미셨나?”
캘리는 눈을 힘을 주고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 안 되나요? 왕자님은 디콘스에 온 귀빈이고 난 그분을 잘 모시라는 명을 받았어요. 당연히 응원해야죠.”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캘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쌓였던 게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어차피 당신도 응원을 받았잖아요.”
“무슨 응원?”
“백작부인의 딸이 공작님을 열렬히 응원하는 걸 봤어요. 그 여잔 종일 당신 뒤만 쫓아다니는 것 같던데, 어떻게 떼어냈어요?”
일부러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그 여자가 그러든지 말든지, 나와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이 없어요? 소문엔 당신이 곧 백작 딸과 결혼을 할 거라던데.”
“그 말을 믿는다고?”
아니, 안 믿어.
그 여자가 일방적으로 들러붙는 것도 알고, 라이칸이 그 여자에게 마음을 줄 리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상하게 심술이 난다.
당신 탓이야.
내가 아는 것처럼 당신도 뻔히 알면서 왕자와 내 관계를 의심하는 말을 하니까 나도 화가 나는 거지.
캘리는 턱을 들어 올렸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요. 부인이 도망쳐서 이제 워렌 공작은 다시 혼자가 됐다고. 불쌍한 워렌 공작, 위대한 검은 늑대를 혼자 두는 게, 무슨 큰 죄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더군요.”
그의 눈이 불꽃을 내뿜는다. 그래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남자의 속을 긁고 싶었다.
그러니까 왜 함부로 의심해? 나라고 지금 이 상태가 좋은 줄 알아? 나도 어서 방법을 찾아서 베아투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내가 얼마나 간절한데, 당신은 왕자와 나를 의심이나 하고.
캘리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와의 결혼은 무효가 됐으니 이제 자유롭게 백작 딸과 결혼하면 되겠네요. 어차피 나도 곧 스왈트 왕자와 결혼을 하게 될 것 같으니까.”
너무 멀리 갔다.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곧바로 후회가 됐다. 아무리 화가 나도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건데.
“내 말은…… 그러니까…… 아!”
갑자기 그가 팔을 잡고 와락 당기자 캘리는 휘청, 단단한 품으로 넘어졌다.
흠칫, 놀라서 밀어내려는데 오히려 라이칸은 더 가까이 그녀를 당겼다.
놀라서 고개를 드는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는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고 있었다.
“넌 결혼 못 해.”
이를 갈듯 내뱉은 그가 짧게 숨을 들이켜더니 다시 윽박질렀다.
“이미 남편이 있는 여자가 중혼을 저지르면 어떤 벌을 받는지 알아?”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보자 몽글거리는 느낌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남자, 지금 화를 내고 있다.
질투…….
캘리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겨우 눌러 참았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 결혼이 무효라는 걸 인정했잖아요. 근데…….”
“누가!”
그에게서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가 인정해? 난 인정한 적 없어.”
“폐하는 당신이 인정하고 받아들였다고 했어요. 당신도 내게 그렇게 말했고.”
“하는 척하기로 했을 뿐이야!”
순간, 캘리의 눈이 화악 커졌다.
“뭐라고요?”
“빌어먹을.”
라이칸이 홱, 몸을 돌리더니 욕설을 뱉었다. 캘리는 다시 물었다.
“하는 척? 폐하와 모의를 했다고요?”
낮게 숨을 몰아쉬던 그가 험악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한다.
“그래야 네가 안전하니까.”
“그러니까, 그런 중요한 사실을 내게 말도 하지 않았다고요?”
“우리 사이가 가깝게 보여서 좋을 게 없으니까. 널 의심하는 눈들이 있어.”
공주든 뭐든, 나한테까지 속일 이유가 있어?
캘리는 솟구치는 화를 겨우 누르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공주로 있으면 안전해요?”
“공주는 왕족이야. 왕의 딸이고. 아무리 천지 분간 못 하고 설쳐대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왕족을 함부로 건드릴 순 없어.”
“그들이 누군데요?”
“널 노리는 놈들, 어처구니없는 소리들로 백성들을 선동하는 자들, 기회를 노려 이익을 취하고 권력을 빼앗으려는 자들. 마녀니 돌연변이니, 그런 것들로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들어 왕권을 위협하는 자들.”
험악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그를 마주 보았다.
“마법사들이군요. 날 공주 자리에 앉혀놓고 당신과 폐하는 마법사들을 처리할 모의를 했군요. 그러면서 내겐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기가 막혔다.
그동안 그렇게 차갑게 굴고, 모른 척하고, 다 끝난 것처럼 매정하게 대했던 게 전부 일부러 그런 거였다.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캘리는 주먹을 꽉 쥐고 그를 쏘아보았다.
“날 데리러 왔던 그날 밤이죠? 정신까지 잃게 만들어놓고 그냥 데려가지 않았던 그날 밤에 당신은 폐하와 모의를 했어요. 그렇죠?”
“…….”
“왜 미리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 남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아직도 모른다. 전혀, 눈치도 못 채고 있는 것이다.
베아투름에서도 그랬다.
뭐든 혼자 다 결정하고 말도 안 해 주고.
“당신은 늘 제멋대로예요.”
일그러진 눈빛이 날아온다. 캘리는 그 눈을 기꺼이 마주 보며 말했다.
“당신은 항상 그랬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한텐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거.”
길게 숨을 뱉어낸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할리 성에서, 왜 내게 말도 없이 떠났어요?”
“떠나긴 누가 떠나? 널 노리는 자객 집단을 처리하고…….”
“그러면 그렇다고 말해 줄 수 있었잖아요. 이러저러한 일로 잠시 떠날 테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라, 그렇게 말해 줬으면 되잖아요.”
“꼭 말을 해야 하나? 베아투름에서 여기까지 널 찾으러 왔고, 단 한 번도 네가 내 아내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 그런 내가 널 떠날 리가 없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뭐?”
“말을 안 해주는데 내가 어떻게 아느냐고요!”
라이칸이 다시 눈살을 찌푸린다.
“현상금 사냥꾼들한테 납치된 후에 겨우 다시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예전과 달랐어요. 말이 없어지고, 생각은 늘 다른 곳에 있는 사람처럼 그랬어요. 난 당신이 변했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불안해하면서도 묻지 않았어요. 당신이 그런 남잔 걸 아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
“미리 언질이라도 줄 수 있었잖아요.”
원망스러웠다. 이 남자에게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존재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괜한 억측도 생긴다.
“아니면, 날 이용할 생각이었어요?”
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하지만 캘리는 서러운 마음이 멈추지 않았다.
“날 공주 자리에 앉혀놓고 마법사들의 주의를 돌리는 용도로 쓰려고 그랬어요?”
“말조심해. 누가 널 이용해?”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쏟아지는 폭우만큼 캘리의 입에서 사나운 숨이 터져 나왔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말들은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이어졌다.
“지긋지긋해요.”
라이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기에 대고 캘리는 거친 목소리로 내쏘았다.
“이용당하는 거, 정말 지긋지긋해.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날 이용하려고만 했죠. 다미아를 비롯한 마녀들도, 그들을 막으려는 마법사들도, 폐하나 왕비, 왕세자, 그들 모두가 날 이용할 생각만 했어요.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나를 여기로 보내고 저기로 보내고…….”
그의 눈썹이 모아지고 미간이 깊게 패었다.
속이 쓰리다. 말하다 보니, 그동안 쌓인 서러움이 생각보다 더 컸던 걸 깨달았다.
“당신을 알아요. 겨울 동안 함께 지내면서 당신이 어떤 남잔지 알게 됐어요. 생각해야 할 게 있거나 집중해야 할 때는 말이 없어지죠. 바로 옆에 있는 내게도 거리를 둬요. 그럴 때면 당신이 얼마나 낯설게 느껴지는지 알아요?”
“…….”
“중요한 일일수록 혼자 생각하고 계산하고 결론을 낼 때까지 그 어떤 의논도 하지 않죠.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상대에겐 더없이 냉담하게 대하고…….”
“캘리.”
그녀를 보는 그의 목소리가 낮았다. 캘리는 눈을 치뜬 채 힘을 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