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46)화 (140/159)

146

“왕비 전하 쪽에선 아무 말이 없어?”

“예. 조용합니다. 왕세자께서도 이 일에 대해선 아무 말씀도 없고요.”

“여자 문제만 일으킨 게 아니니까 두 분이 조용한 것이지.”

“예. 왕자가 코르키와 어울리며 성 밖에 있는 자신의 군대를 성안으로 들이려는 시도도 있었답니다. 밤마다 몰래 성문을 열어서 조금씩 군사를 들였는데, 그걸 워렌 공작이 알아내서 막았답니다. 스왈트 왕자는 자기가 한 짓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게 말이 안 되죠.”

“그럼 코르키도 추궁을 당했겠군.”

“아닙니다. 코르키는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답니다. 어찌 된 건지, 워렌 공작께서도 코르키에 대해선 별말을 안 했다고 합니다.”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이다. 코르키를 스왈트 왕자와 엮어봤자 큰 수확은 없을 테니까 놔주는 것이다. 코르키를 따르는 일족을 한 번에 소탕하려고.

캘리는 셀리나를 보았다.

“그럼, 난 스왈트 왕자를 배웅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셀리나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왕자는 준비가 끝나는 대로 바로 떠날 것입니다. 아마도 왕자를 배웅하는 사람은 만달루테 왕세자뿐일 것 같습니다.”

캘리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와이엇이 생각보다 더 훌륭하게 일을 처리해 주었다. 그리고 스왈트 왕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허술하게 굴어주었고.

이제 왕자와의 결혼 문제는 더 이상 걱정할 게 없다.

캘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독근.

라이칸은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생각일까?

그건 왕자를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인데…….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오늘도 비가 한바탕 쏟아져 내릴 모양이다.

***

쨍!

코르키가 쥐고 있던 컵이 반대편 벽으로 날아가 부딪치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고를 하던 기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하지만 코르키의 몸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푸른 기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윌루마 백작은?”

코르키가 묻자 기사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영지로 찾아갔으나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집사는 다른 영지를 돌보느라 출타 중이라고 했지만, 분명 저희를 피하는 기색이었습니다.”

귀족들이 마법사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배후에 왕과 워렌 공작이 있었다. 귀족들에게 왕이 마법사를 적으로 몰 것이라고 겁박을 주며 선택을 하라고 종용했다.

약삭빠른 귀족들이 그렇게 쉽게 병약한 왕의 편에 설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워렌을 간과했다. 그 건방진 공작이 사병까지 내세워 왕의 편에 서서 귀족들을 협박하고 오래전의 일까지 들춰서 마법사들을 구석으로 몰아가고 있다.

힘껏 주먹을 움켜쥔 덕에 긴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코르키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카리우스 소식은?”

“본거지가 초토화된 후, 일하던 자들은 살아서 흩어졌으나 자객들은 모두 몰살되었습니다. 수장의 행방이 묘연하니 곳곳에 숨어 있는 자객들을 모을 힘이 부족합니다. 더군다나, 항간에 떠돌고 있는 소문이 몹시 흉흉해서…….”

코르키는 더 말하라는 듯 기사를 쳐다보았다.

“오래전, 도시에 불을 지른 것이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기사는 말끝을 줄였다. 하지만 코르키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법사가 죄 없는 자들을 마녀로 몰아 권세를 누리고 백성들을 착취해 부를 쌓은 다음,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

그건 아주 작은 소리에 불과했다. 그렇게 작은 소문은 금세 진화할 수 있었다. 십수 년 동안 그런 소문을 없애는 일은 수없이 해봤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작은 불씨가 큰불로 번지는 속도가 빨랐다.

너무 빨라서 미처 따라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배후에는 당연히 워렌 공작이 있었다. 시인과 상인, 아이들을 이용해 노래를 퍼트리고, 빨래하는 여자들을 통한 이야기는 입 가벼운 여자들 사이로 무섭게 번져갔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법 집행관들이 마법사들을 불러들여 조사를 시작했다. 위와 아래, 사방에서 여우사냥을 하듯 몰아대니 하나둘씩 깨지는 조직이 나올 수박에.

조직이 와해되면,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하는 귀족들이 가장 먼저 손을 뗀다. 하나가 돌아서니 연쇄적으로 등을 돌리는 자들이 이어졌다.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반격을 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

코르키는 기사를 향해 차갑게 명을 내렸다.

“왕비 전하께 알현을 청해라. 오늘 밤, 내가 직접 궁으로 들어가서 뵐 것이라고.”

***

왕의 집무실 문 앞에 선 탈리아는 지키고 서 있는 호위 기사에게 물었다.

“안에 누가 있느냐?”

“예. 워렌 공작과 만달루테 왕세자가 들어 있습니다.”

탈리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달이 기울고 있는 시각인데 왕세자까지 들어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슬쩍, 뒤에 선 하녀가 들고 있는 그릇을 본 탈리아는 이내 기사에게 말했다.

“폐하께 드릴 약을 가져왔다, 전해라.”

“예.”

기사가 문을 노크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왕비가 왔음을 고했다. 잠시 후, 탈리아는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의 분위기가 무겁다.

탈리아는 커다란 나무 테이블 건너편에 서 있는 왕을 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왕세자와 창가에 서 있는 공작까지 한 번에 훑었다.

“왕비님.”

워렌 공작이 고개를 숙여 예를 차리자 탈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곧장 아들을 보았다.

“세 분이 이렇게 모여 있는 걸 보니 중한 의논이라도 하는 듯합니다. 저는 폐하께 약만 드리고 바로 나가볼 테니 의논하시던 일을 계속하시면 될 것입니다.”

탈리아는 곧바로 하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하녀가 들고 있던 쟁반을 준다. 쟁반을 받아 든 탈리아는 테이블 앞으로 가서 내려놓았다.

“폐하. 약을 드시고 침실로 드시지요. 늦은 밤까지 버티시기엔 너무 무립니다.”

아르 왕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알고 있소. 젊은 왕세자와 공작의 혈기를 따라잡기가 몹시 힘들군.”

“예. 시각을 다투는 중한 일이 아니라면 내일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워렌 공작은 한시도 낭비할 수 없는 급한 일이라고 나를 침실에서 끌어냈다오. 만달루테까지 불러들이고 말이오. 대체 무슨 얘기인가, 이제 막 들을 참이었소.”

탈리아가 공작을 보았다.

왕세자까지 불렀다니, 그 일이 무슨 일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라이칸은 왕의 앞으로 한 발 다가섰다.

“펠리키의 성벽 강화에 관련된 문제를 상의하려는 것이라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그랬지. 성벽에 문제라도 있는 건가?”

“침략에 대비한 방비가 허술한 곳이 있습니다.”

“침략?”

왕세자가 날을 세웠다.

“무슨 침략? 공작은 우리 펠리키가 침략을 당할 거라 우려하는 거요? 감히 어느 나라가 우리 수도를 침략한단 말이오?”

“다른 왕국이 침략해 온다면, 펠리키가 아니라 국경 지대부터 전쟁이 시작됐겠죠. 우린 이미 그 사실을 알았을 거고.”

라이칸의 차분한 대꾸에 왕세자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왕국이 아니면?”

잠시, 말을 멈췄던 왕세자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그대는 내부의 적을 말하는 것이오? 반역이 일어날 것이라는 건가?”

“반역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비를 철저히 해두자는 겁니다.”

무뚝뚝한 라이칸의 대꾸에 왕세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의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이 밤중에 폐하와 나를 침실에서 불러낼 정도로 중한 일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해.”

“성안의 경계를 방비하자는 일보다 더 중한 것이 어딨겠습니까?”

“그것이 전부요?”

“그것만으로도 밤을 새울 수 있을 겁니다.”

태연한 대꾸에 왕세자는 눈을 치떴다.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오?”

“만달루테. 진정해라. 왕비도 있는데 네가 그렇게 핏대를 세우느냐?”

왕이 차분하게 명하자 왕세자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목에 세워진 핏대는 그대로였다.

탈리아는 못마땅한 시선을 워렌에게 던졌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워렌 공작이지만 오만하기가 정도를 지나친다. 곧 왕좌에 앉을 왕세자를 대하는 태도가 방자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탈리아는 화를 꾹 눌러 참았다. 차갑고 하얀 얼굴로 왕을 보았다.

“폐하. 약이 식고 있습니다. 우선 약부터…….”

“왕비님.”

갑자기 워렌이 한 발 더 다가섰다. 탈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자 라이칸의 무심한 눈과 마주쳤다.

“왜 그러시오? 워렌.”

“약은 폐하만 드실 것이 아니라 왕비님도 드셔야 할 것입니다.”

순간, 탈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소릴 하는 것이오?”

“폐하의 약재를 제조하는 치료사에게 물었더니, 폐하가 밤에 드시는 약은 원기를 회복하는 약초를 달여 만든 것이라 하더군요.”

“그런데?”

“그렇다면 이렇게 폐하의 건강을 위해 밤낮으로 애를 쓰시는 왕비님도 드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치료사에게 같은 약재를 써서 하나 더 만들라 했습니다.”

탈리아의 얼굴이 거의 투명하게 변했다. 라이칸이 눈짓을 하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재빨리 그릇을 하나 가지고 와서 왕의 약그릇 옆에 놓았다.

라이칸은 기사에게 다시 말했다.

“약을 제조한 치료사를 불러라.”

“예.”

잠시 후, 회색 머리칼의 나이 많은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회색 머리의 남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까지 벌벌 떨고 있었다.

“네가 왕에게 올릴 약을 만드는 자냐?”

라이칸이 묻자 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더듬는다.

“예, 예. 제, 제가 약을 제조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왕비님께서 주시는 약초로 만들었습니다.”

탈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떤 약초를 썼는가?”

라이칸이 다시 묻자 치료사가 갑자기 바닥에 털썩, 엎드리며 울부짖는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왕비님께서 주신 약초를 달여 바친 것뿐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만달루테가 탈리아를 보았다.

탈리아는 턱을 치켜올린 채 꼿꼿이 서 있었다. 만달루테는 엎드려 있는 치료사를 돌아보았다.

“지금 뭐 하는 것인가! 치료사는 똑바로 말하라. 어떤 약초를 썼지?”

“저는, 저는…….”

만달루테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치료사의 머리칼을 휘어잡아 올렸다.

“말해라. 당장.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었다가는 네놈의 목을 딸 것이다. 어서 말해!”

“도, 독근입니다!”

“독근?”

만달루테의 눈이 라이칸을 향했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왕의 얼굴을 보았다.

무언가 알고 있는 표정.

다음에 어머니를 보았다. 하얗게 질린 채, 꼿꼿이 서 있지만 어둠이 짙게 내린 얼굴이었다.

만달루테는 치료사를 보았다.

“그게 뭐지?”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독……초냐?”

치료사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달루테는 놈의 머리통을 던지듯 놓아버리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왕비를 보았다.

“어머니. 아니라고 말씀하십시오. 이 일은 어머니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씀을 하십시오.”

하지만 탈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만달루테는 그런 어머니를 보며 비틀거렸다. 다시 치료사를 돌아보고 왕과 워렌 공작을 돌아보는 눈길이 비탄으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만달루테는 다시 왕비를 보았다.

“어째서…… 왜 이런 일을…… 어머니께서 어떻게 이런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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