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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이 성 안팎을 가득 메웠다. 백성들은 도시를 침략해 온 적이 다른 왕국이 아니라 마법사들이라는 것에 분노했고, 병사가 아닌 자들도 나서서 함께 싸우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핍박받아 온 민심이 폭발했다. 마법사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힘이 합쳐져 모두가 들고일어났다.
“반역자들이 성 밖으로 몰려가 코르키를 중심으로 집결했다고 합니다.”
셀리나의 말에 캘리의 눈에는 근심이 가득 고였다.
“그들이 흑마법을 행한다던데, 그 소식은 없어?”
“있습니다. 펠리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엄청난 군대가 행진해 오고 있다는데, 그것이 인간이나 다른 지능이 있는 종족이 아니라 마물들과 짐승들로 이루어진 군대라 합니다.”
라이칸의 말이 맞았다.
“마법사들이 그동안 마물들을 움직일 수 있는 흑마법을 부려, 작은 마을 인근에서부터 실험을 해왔다고 합니다.”
셀리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근처의 영주들은 뭘 했는지 모르겠다고 분개했다.
오스피아를 떠나 소르테로 향할 때 마주쳤던 들개 떼와 기이한 물고기 떼, 그리고 베아투름의 빙벽 너머에 나타났던 고블린까지. 그 모두가 마법사들이 흑마법을 익히려고 실험을 했던 거였다.
“반역이라니. 마법사들이 그동안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서 그런 흑마법을 익히는 데 썼다니, 놈들은 모두 전멸시켜야 마땅하다고들 합니다.”
캘리는 쓰게 웃었다.
반역은 양날의 검이다. 성공하면 세상 최고의 권력자가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
왕비는 실패했고, 처형당할 것이다. 마법사들 또한 그러하겠지.
“펠리키의 성벽은 견고하고 높으니 마물들이 쳐들어와도 괜찮겠지?”
캘리가 걱정하는 얼굴로 묻자 셀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왕궁의 성벽은 두 겹, 세 겹으로 이루어져 절대 뚫리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겐 검은 늑대가 있지 않습니까. 워렌 공작님이 지키고 계시니 놈들은 결코 성안으로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셀리나가 말을 멈추자 캘리는 미간을 좁혔다.
“뭐가 걸리는 게 있어?”
“펠리키는 큰 도시입니다. 도시가 워낙 넓어서 성벽이 고르지 못합니다. 보수를 거듭하여 견고하게 쌓은 곳이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약한 곳이 있는데…….”
“거기가 어디지?”
“비탄의 숲이 있는 쪽의 성벽입니다.”
“아. 거기.”
“들어보셨습니까?”
“그래. 라이칸에게서 잠깐 들은 적이 있어.”
“예. 칸께선 마물들이 그 숲을 통과해 상대적으로 약한 성벽을 뚫으려 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병력을 그쪽에 대거 이동해 놓고 대비를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너는 걱정이 된다는 거지?”
셀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쪽 병사들은 비탄의 숲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 마법에 걸린 마물들은 그 숲을 오가겠죠.”
“우리가 우세해도 저들이 숲으로 숨어버리면 쫓을 수가 없구나.”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칸께선 분명 방법을 찾아내실 겁니다.”
캘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럴 거야.”
그를 믿는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렵고 복잡할 것이다. 적이 숨을 곳이 있다는 건, 그만큼 전력을 회복할 시간이 있다는 거니까. 반면, 이쪽은 놈들이 나와야만 공격할 수 있으니 불리하다.
캘리는 창밖을 보았다. 둥근 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
“족히 10만은 되는 듯 보였습니다.”
시타의 보고에 기사들의 눈이 일그러졌다.
10만이라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였다. 마법사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마물과 짐승을 모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디콘스에 퍼져 있는 마물은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짐승들만으로는 10만을 채우기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북부.”
라이칸이 중얼거리자 와이엇이 눈을 크게 떴다.
“디아르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이칸이 가만히 있자 와이엇이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북부의 마물들은 추위에 강하고 더위에 약합니다. 지금은 봄을 지나 여름이 시작되는 때인데 어떻게…….”
“고블린이 북부에 나타났던 걸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오웬이 중얼거리자 와이엇이 헉,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젠장. 그렇군. 추위라면 질색하는 고블린도 미쳐서 북부에 나타나게 했으니 오우거나 설인들을 남쪽으로 끌어오는 일도 가능하겠군.”
오웬이 칸을 보았다.
“디아르고가 비면, 야만인들의 습격이 있을 겁니다.”
와이엇이 다시 헉, 소리를 냈다.
“베아투름이 위험하겠군요.”
라이칸은 고개를 저었다.
“베아투름은 괜찮아.”
“어째서요? 마물이 없으면 야만인들 세상일 게 뻔한데.”
“이미 조치를 취했어.”
“예?”
오웬이 칸을 보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고블린이 나타났을 때, 디아르고에 덫을 설치하고 정찰병을 더 많이 배치했던 이유가 이거였습니까?”
와이엇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덫이요? 덫을 언제 설치했습니까? 평소보다 더 자주 빙벽을 다니신다 했더니, 방비를 하고 계셨던 거군요.”
와이엇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툭, 말했다.
“뭐, 예지력이라도 생기셨습니까? 이런 일이 생길 걸 어찌 알고 대비를 해놨습니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거지.”
칸은 시큰둥하게 대꾸하고 다시 시타를 보았다.
“언데드 놈들까지 밀려 내려오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시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이동하는 수가 워낙 많아서 뭐가 뭔지도 구별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속도가 비상식적으로 빠르고 놈들이 지나간 자리는 모조리 폐허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칸의 명을 받고 놈들이 지나갈 만한 통로에 있는 마을 주민들은 모두 대피하라 전달을 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죽어나가는 백성의 수가 어마어마했을 것입니다.”
기사들이 모두 칸을 보았다.
맹목적인 존경. 그것은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수장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또한, 이런 수장이라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눈빛이었다.
“와이엇.”
“예. 칸.”
“비탄의 숲 주변으로 궁수를 배치해.”
칸은 지도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와 여기에 궁수를 두 겹으로 배치하고 그 뒤는 창과 투창으로 무장한 보병을 배치한다. 또한 숲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명중률이 높은 궁수를 배치해. 활과 화살을 넉넉히 준비해. 기사들은 숲 외곽과 성벽 안쪽에 무장한 채 대기한다. 내가 신호할 때까지 궁수들은 단 하나의 화살도 쏘아선 안 돼.”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와이엇과 오웬을 선두로 기사들이 모두 나갔다.
“시타.”
“예. 칸.”
기사들을 따라 나가려던 시타는 멈춰 서서 칸을 보았다.
“너는 동쪽 성벽으로 가서 길스에게 놈들의 수와 행태를 전해라. 그리고 잡아놓은 마법사들을 족쳐서 비탄의 숲에 불을 지를 방법을 알아내.”
“비탄의 숲은 불에 타지 않습니다.”
시타가 말하자 칸은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있을 거야. 이 전쟁을 빨리 끝내려면 그 숲을 반드시 태워야 돼.”
***
깊은 밤, 사위는 적막했다. 광야의 바람조차 곧 있을 피바람을 아는지 고요히 숨을 죽이고 있는 순간.
라이칸은 검은 어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적막한 공기는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적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땅이 울리고 있었고 공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칸.”
와이엇이 다가오자 라이칸은 고개를 돌렸다.
“왕세자 전하께서 대열이 완성되었다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라이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세자는 숲으로 들어가기 전, 길목에서 기습하는 걸 반대했다. 비탄의 숲을 통과한 놈들의 전열이 흐트러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노려서 틈을 공격하자는 거였다. 하지만 라이칸의 생각은 달랐다. 놈들은 마법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놈들을 조종하는 마법사들이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면 적의 전열은 와해되지 않을 것이다.
기습은 이쪽이 먼저여야 했다. 적들이 비탄의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를 줄여야 한다.
칸은 다시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순간,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밤하늘을 흐리게 만드는 공기의 진동이었다.
라이칸은 홱, 몸을 돌렸다.
“와이엇.”
“예.”
라이칸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와이엇이 따라왔다.
“기사들을 깨워라.”
“예?”
와이엇이 무슨 소리냐는 듯 묻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적이 오고 있다. 당장 전열을 갖춰!”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았다. 횡렬로 늘어서 달려오는 적들은 광야를 뒤덮었다. 그 수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놈들은 황무지와 습지 두 군데를 통과해 왔지만 전혀 힘이 줄어들지 않은 듯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새벽의 안개를 헤치고 승냥이가 선두에 있었다. 그 뒤를 들개와 산짐승들이 뒤따라 행군하고 있었고, 그보다 더 뒤에는 오우거의 육중한 걸음이 따르고 고블린은 사방에서 튀어나왔다.
하늘은 까마귀 떼가 새까만 줄무늬를 만들었고 그 한가운데를 매의 울음소리가 메웠다. 수석기사들이 칸의 손을 주시하며 때를 기다렸다.
기사들은 자신들이 맡은 대열의 선두에 서서 가장 빠른 말을 타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먼저 앞으로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적들이 가까워질수록 땅의 울림이 커졌다. 진한 먼지구름이 일고 하늘은 어두워졌다.
쿵쿵쿵쿵.
쿵, 쿵, 쿵.
뛰는 소리에 이어서 거대한 발소리가 이어지며 수만의 병력이 다가오고 있다. 거대한 먼지바람이 사방을 뒤덮는 순간, 라이칸은 검을 빼 들고 소리쳤다.
“궁수!”
검을 내리며 다시 소리를 질렀다.
“공격!”
화살이 사방에서 날아올랐다. 빗줄기처럼 수많은 화살이 놈들을 맞히고 쓰러트렸다. 그러나 적들은 멈추지 않았다.
라이칸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돌격!”
벤투스가 가장 먼저 튀어나갔다. 말발굽이 땅을 파헤치고 황색 땅을 짓밟으며 검이 공기를 가르기 시작했다.
돌격!
와아아아아아.
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리고 그 뒤를 기수와 보병들이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무거운 도끼와 날쌘 검, 뾰족한 창이 사방에서 피를 뿌렸다. 마른 땅에 화살이 빽빽하게 꽂히고 그 위로 짐승들의 사체가 쌓였다.
피비린내가 소용돌이치고 까마귀 떼가 날아들었다. 기수들이 채찍을 휘둘러 몰려드는 까마귀 떼를 쫓아내는 동시에 달려드는 고블린의 목을 휘감았다.
달려드는 오우거의 몸에 창들이 박혔다. 날카로운 강철이 오우거의 심장에 박히자 와이엇의 도끼가 목을 쳐냈다.
와이엇이 눈길을 돌리자 칸에게 달려드는 오우거들이 보였다. 놈들은 마치 칸만을 목표로 하는 듯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와이엇이 그쪽으로 뛰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라이칸의 검은 눈 깜짝할 새에 놈들의 팔과 다리를 자르고 심장을 도려냈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웅덩이가 되고 냇물이 되어 흘렀다.
새벽이 낮이 되고, 해가 지고 달이 뜰 때까지 핏빛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달은 구름에 가려지고 어둠이 밝게 타오르니, 세상이 온통 붉게 일그러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