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칸 (153)화 (147/159)

153

바지와 셔츠를 입고 튜닉을 집어 올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지만 우린 이미 결혼했잖아요.”

라이칸이 침대로 걸어왔다. 그녀의 앞에 앉더니 허리를 잡고 번쩍 들어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폐하의 명이야. 조건이었고.”

“조건? 무슨 조건요?”

“흑마법사들을 퇴치하면 널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폐하도 조건을 걸었지.”

“결혼식을 하라고?”

끄덕.

“여기서?”

“그래.”

캘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화려하겠네요.”

“그렇지.”

캘리는 입술을 툭, 내밀었다.

“난 그런 결혼식 하고 싶지 않은데. 베아투름에서 축일에 결혼식 대신 피로연을 할 때도 너무 부담스러웠다고요. 다들 나만 보는 것 같아서 너무 창피했는데…….”

그가 그녀의 머리를 잡고 당겨서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그래도 해야지. 왕의 명령인데.”

캘리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싫지 않은 표정이네요.”

“나쁠 것도 없지.”

“화려하고 호화로운 결혼식이 될 텐데…… 그런 거 싫어하잖아요.”

“싫어하지.”

“그럼, 폐하께 청을 드려 봐요. 결혼식을 정 원하신다면, 작은 교회에서 간단히 하겠다고.”

“싫어.”

캘리의 눈이 커졌다.

“싫다고요? 왜요?”

라이칸이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린다.

“작고 간소한 결혼식을 해봤는데, 의심하는 사람도 있고 무효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더라고. 그래서 이번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대로 낙인을 찍으려고.”

그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네가 내 아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해야겠어.”

캘리는 피식, 웃었다. 자꾸만 미소가 비어져 나왔다.

그가 입술을 겹쳐왔다. 조금 전까지 잠도 못 자게 덮쳐놓고 또다시 달려든다. 숨이 가빠지고 다시 뜨거운 기운이 일렁이자 캘리는 그의 어깨를 밀었다.

“곧 날이 밝을 거예요.”

“괜찮아.”

그가 다시 키스하려 하자 캘리는 얼른 말했다.

“새벽이슬을 밟고 공주의 창을 드나드는 남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 폐하께서 결혼을 인정하시겠어요? 내 평판은 또 어떻게 되고?”

“하. 이젠 평판까지 신경 써? 공주라는 게 싫다더니.”

“이왕 된 거, 좋은 소리 들으면 좋죠, 뭘.”

그녀가 샐쭉한 미소를 짓자 라이칸이 못 참겠다는 듯 다시 입술을 겹쳤다.

그가 그녀를 놓아준 건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였다. 캘리는 라이칸이 창가로 걸어가자 따라갔다.

창문을 여는 그를 보는데 갑자기 웃음이 피식, 나왔다. 라이칸이 쳐다보자 캘리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꾹 삼키고 말했다.

“대륙을 호령하는 검은 늑대가 밤마다 몰래 탑을 기어올랐다가 새벽녘에 다시 탑을 내려간다는 게 너무 웃겨요.”

라이칸이 인상을 썼다.

“오지 말까?”

캘리는 짐짓, 턱을 들고 새침하게 말했다.

“안 와도 돼요. 누가 오랬나? 내일. 아니, 오늘 밤부터 오지 말아요. 안 그래도 탑 오르내리는 것 보면서 위태로웠어요.”

자기가 좋아서 오는 거면서.

순간, 라이칸이 그녀를 뒤통수를 잡고 당기더니 짧게 입을 맞췄다.

“그렇게는 못 하지. 부인이 지척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 자겠어? 꼭 안고 자야지.”

“잠도 안 재우면서 뭘.”

피식, 웃은 그가 이마에 입술을 누르고 속삭였다.

“어서 자. 셀리나에겐 깨우지 말라고 해놓을 테니까.”

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요.”

씨익, 웃어 보인 라이칸이 창을 훌쩍 뛰어넘었다. 몇 개의 발판을 밟고 내려가더니 탑 아래의 지붕 위로 뛰어서 순식간에 땅으로 내려서는 게 보였다.

그가 손을 흔들었다. 창을 닫으라는 거였다.

캘리는 다시 한번 손을 흔들어주고 창문을 꼭 닫았다. 몸을 돌려 침대로 가서 누웠다.

그가 없는 빈 침대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털 모포를 목 끝까지 당겨 덮었지만 라이칸의 온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

“마셔.”

시녀가 잔을 내려놓고 나가자 아르는 라이칸을 보았다.

“남자의 정기를 세워주는 약초를 달인 물이야.”

피식, 라이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전 필요 없습니다.”

아르는 인상을 썼다.

“이런 거 안 마셔도 원기는 충분하다, 이거냐?”

라이칸이 대꾸하지 않자 아르는 눈썹을 모았다.

“그래서, 그렇게 원기가 충만해서 밤마다 공주 방으로 기어오르는 것이야?”

흠칫, 라이칸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자 아르는 비웃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여긴 궁이야. 나의 귀와 눈이 곳곳에 있어. 어쩌자고 그래?”

“…….”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궁 안에 소문이 자자해. 밤이슬을 밟고 공주 방을 드나드는 그림자가 있다고.”

아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좀 참으면 될 것을.”

씨익, 웃은 라이칸이 어깨를 으쓱했다.

“공주님이 워낙 아름다우시니, 참으라는 건 고문과 같습니다.”

“허어. 이놈, 뻔뻔한 것 좀 보게. 공작으로서의 체면과 권위는 땅에다 버렸느냐? 네 아버지도 네 어머니에게 넋을 잃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어.”

“제 부모님은 남의 눈을 의식해 지척에 두고도 손도 못 대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만약 저와 같은 처지였다면 돌아가신 아버지도 분명 저처럼…….”

“됐다. 됐어. 그 뻔뻔함을 내가 어찌 당하겠느냐. 어차피 오늘 밤만 지나면 결혼식을 치르니 다 상관없어.”

라이칸이 미소를 짓자 아르가 혀를 찼다.

“그리도 좋냐?”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아르는 피식, 웃었다.

“지난해, 이 자리에서 자네와 마주 앉았던 것이 떠오르는군. 오스피아의 귀족 딸과 결혼 하랬더니 얼굴까지 붉히며 화를 냈었지. 왕인 내게 소리까지 치면서.”

“제가 그랬습니까? 저는 기억이…….”

“치워라. 어디서 수작질이야? 내가 노쇠한 왕이지만 그때 일을 똑똑히 기억하는데.”

라이칸이 입을 꾹 다물자 아르가 쿡쿡, 웃었다.

“결혼하는 대신 금을 왕창 뜯어갔지. 이젠 내가 금을 요구해야겠어. 내 딸을 강탈해 가는 것이니, 그때 가져간 금 내놔라.”

“말괄량이 공주를 데려가주는 것이 어딥니까. 어차피 저와 염문이 퍼져서 어디 다른 곳으로 시집도 못 가는데. 오히려 제가 지참금을 더 받아야겠습니다.”

“그래? 그럼 나도 이 결혼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군.”

라이칸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르가 씨익, 웃었다.

“워렌 공작. 그대는 지금 그렇게 뻗댈 처지가 아니야. 난 자네가 그토록 원하는 여인의 아비라고. 잘 생각해.”

“그래도 금은 돌려드릴 수 없습니다. 우방국으로서, 디콘스의 평화를 위해 지금처럼…….”

“입발림 소리.”

“…….”

“당연히 그래야지. 디콘스는 캘리의 나라이기도 해. 베아투름이 독립하더라도 디콘스와 베아투름은 하나의 왕족이라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형제의 나라로서 예를 다할 것이고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왕세자 전하와도 요즘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왕세자와?”

“베아투름의 독립을 알리는 자리에서 군대의 협력 관계를 선포하려는 계획을 논의 중입니다.”

“그거 잘됐군.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베아투름의 독립을 반대하는 의회의 대신들도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겠지.”

“폐하께서 걱정하는 일이 없도록 잘 살피겠습니다.”

갑자기 저자세가 된 라이칸을 보며 아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그래야지.”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내일 결혼식 준비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아, 그래. 그렇게 해.”

라이칸이 벌떡 일어서서 절을 하고 성큼성큼 방을 나갔다. 문이 쿵, 닫히자 아르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뭔가 중요한 걸 빼먹은 기분이다.

아르는 탁자 위에 있는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문득, 시선이 구석에 놓여 있는 장식품으로 향했다. 도끼 모양을 한 장식품은 손잡이가 금테로 둘러져 있었다.

아르의 눈이 커졌다.

“금!”

홱, 고개를 돌려 닫힌 문을 보았다. 하지만 라이칸은 이미 가고 없었다.

가져간 금을 달라며 옥신각신했는데, 대화가 어쩌다가 옆으로 샌 것인가.

왕세자와 사이좋게 논의를 한다는 부분부터 그랬다. 둘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절대 좋은 사이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했었는데, 의논도 하고 그런다니 기분이 좋아져서 논점이 흐려진 것도 몰랐다.

약삭빠른 놈.

“일부러 저런 것이지!”

아르 왕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을 가득 메웠다.

***

“히유. 그동안 많이 컸네.”

와이엇이 쉴라의 주위를 돌며 감탄했다. 그러자 쉴라는 우쭐한 듯 날개를 한번 스윽, 펼쳤다가 접었다.

“당연하지. 그 도둑 말이 맞았어. 내가 불새더라고.”

“그러게. 진짜 불새였어. 근데, 어떻게 불새가 된 거냐? 베아투름에서 봤을 때만 해도 참새만 하던 새가 매만큼이나 커졌잖아.”

“참새는 아니었거든!”

쉴라가 와락 화를 내자 와이엇이 한 손을 저었다.

“에이, 무슨 소리야. 넌, 참새만큼 작았어.”

“하. 뭐래? 중닭 정도의 크기는 됐었어.”

“무슨 소리. 딱 참새였어.”

“이 곰탱이가!”

“뭐? 이 못생긴 새가!”

“헐. 못생긴 새? 곰탱아.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못생겼다는 소리가 나오냐?”

쉴라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실제로 그랬다. 쉴라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예전의 우중충한 색은 찾아볼 수 없고, 환하고 밝은 흰색 바탕에 오렌지와 황금색이 적절히 배합되어 햇살 아래에 있으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래도 와이엇은 인정하기 싫은 듯 고개를 저었다.

“한번 못생긴 새는 평생 못생긴 새야.”

“그럼 넌 평생 곰탱이냐?”

와이엇이 왈칵 인상을 쓴다.

“뭣이! 네 그 건방진 말투는 변함이 없구나. 외모만 바뀌면 뭐 해? 성격이 지랄 맞은걸.”

“누가 할 소릴!”

씩씩거리며 쉴라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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