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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말이 맞았다. 축하 연회에 참석한 귀족 여인들의 머리색이 하나같이 밝다. 흔하디흔한 진갈색 머리칼은 보이지 않고 개암나무 열매처럼 붉은 기가 도는 머리카락과 노란 기가 도는 머리칼, 탁한 회색빛. 색도 그 가짓수가 너무 많았다.
“공주님.”
캘리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전에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수헤르 남작부인.”
“저를 기억하고 계셨군요. 공주님.”
“내게 정원의 꽃으로 방을 치장하는 법을 알려주셨죠.”
“네, 공주님. 그랬습니다.”
“그런데…… 전엔 검은 머리가 아니었나요?”
“아. 이번에 지코이를 구해서 머리색을 바꿨습니다. 요즘 부인들 사이에서 머리색을 바꾸는 것이 흔한 일이랍니다.”
“그래요?”
“예. 이게 다 공주님의 덕이죠.”
“내가요?”
“네. 공주님 머리카락이 워낙 아름다우시니, 그걸 본 부인들이 따라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원래는 지코이라는 약초가 옅은 색 머리카락을 검은색에 가깝게 만드는 것이라던데, 그게 알고 봤더니 약초의 종류가 참으로 많다 합니다. 잘 쓰이지 않아 지코이라는 약초에 대해 몰랐던 것이죠.”
그런데 이번에 머리색 바꾸는 일이 번지면서 알게 됐다?
캘리는 남작부인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울리네요.”
그러자 남작부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입니까?”
되물으면서 벌써 좋아 죽는 얼굴이다.
“그나저나, 워렌 공작은 오늘 결혼식을 치른 사내인데도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군요.”
남작부인이 슬쩍 눈짓을 하며 중얼거렸다. 캘리는 라이칸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대로 짜증이 나고 있던 참이었다. 여자들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다가가 말을 걸어도 제대로 대꾸도 안 해주고 내내 굳은 얼굴인데 왜들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내일 바로 궁을 떠나신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남작부인의 말에 캘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다행이죠?”
“공주님.”
갑자기 남작부인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속삭인다.
“세상 어떤 남자도 자기에게 달려드는 어여쁜 여자를 마다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결혼을 축하하는 연회이니 아닌 척하는 거지만, 혹시라도 궁에 더 남아 있다가 채신머리 없는 여자들이 계속 달려들면 결국 공작도 넘어가는 것이죠.”
그래서? 내일 궁을 떠나는 게 다행이다? 라이칸이 넘어갈 시간이 없어서?
캘리는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도 안 나왔다. 그런 캘리를 보며 남작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시는군요. 뭐, 저도 그랬으니 이해는 합니다. 제 남편인 수헤르 남작과 저는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지요. 식을 치르기 전부터 서로 원해서 합방을 할 정도로요.”
아, 무슨 이런 얘기를 대놓고…….
캘리는 민망에서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하지만 남작부인은 부끄럽지 않다는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게 저만 봐줄 것 같았던 남편은 결혼 닷새 만에 다른 여자를 보더군요. 그 여자는 오랫동안 제 남편을 연모하던 아가씨였는데, 지금 워렌 공작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여자처럼 어여쁘고 어린 아가씨였습니다.”
캘리의 눈이 홱, 돌아갔다. 남작부인의 말처럼 라이칸의 옆에 여자가 붙어 있었다. 정말로 어리고 아름다운 여자가.
남작부인이 한숨을 깊게 내쉰다.
“결국 그 여자가 저보다 아이를 더 빨리 낳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 남편의 사생아가 열둘이나 된답니다.”
열둘?
캘리의 눈이 화들짝 커지고 입술이 벌어졌다. 남작부인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제 남편도 너무나 잘생긴 기사랍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내였고요. 오직 저만 보던 남자였죠. 그런데 결혼하니 다 바뀌더군요.”
난 이미 지난해에 결혼했는데, 그 후에도 라이칸은 나만 봤어.
“혹시라도 결혼 후에 워렌 공작이 계속 공주님만을 바라본다고 착각하진 마십시오.”
뭐?
“남자들은 아내 앞에서 아닌 척하고 뒤에선 사생아를 만드는 자들입니다. 원래 그렇게 태어난 종족이죠. 일편단심, 남편만 바라보고 사는 여자들과는 삶 자체가 다르답니다.”
캘리는 남작부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래도 너무 한스럽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남편이 아내를 버리지 않고 데리고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요. 게다가 공주님은 절대 버림받을 일이 없지 않습니까. 공주님은 디콘스 왕국과 베아투름이 연결된 끈과 같은 존재니까요.”
이게 위로를 하는 거야? 염장 지르는 거야?
“어머. 저희 남편이 저쪽에 있군요. 가서 단속을 좀 해야겠습니다. 열세 번째 사생아가 생기는 건 막아야죠.”
서둘러 자리를 뜨는 남작부인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아까 있던 곳에 라이칸이 없었다.
어딨지?
놀라서 이리저리 연회장을 둘러보던 그때였다.
허리를 감는 손길에 퍼뜩 놀라 쳐다보자 어느새 다가온 라이칸이었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군.”
머리를 숙여 속삭이는 그를 보았다.
“정말요?”
그가 살짝 눈을 좁혔다.
“왜 의심하지?”
“어여쁜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연회를 즐기는 것 같았거든요.”
라이칸의 짙은 눈썹이 휙, 올라가더니 이내 입꼬리가 휘었다.
“설마, 질투한 건가?”
캘리는 입술을 삐죽이며 불퉁하게 말했다.
“오늘 결혼식을 치른 남자로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여자들이 달라붙는걸.”
캘리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뻔뻔하게 웃고 있는 그를 보자 부아가 치민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키와 단단한 근육질 몸. 얼굴은 또 좀 잘생겼어?
거친 아우라를 마구 뿜어대는 전사 중의 전사이니 여자들이 탐을 낼 수밖에.
“좀 덜 멋지게 꾸미라고 일렀어야 했는데…….”
그녀가 중얼거리자 라이칸이 피식, 웃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귓가에 그의 입김이 닿았다.
“뭐가 걱정이야? 어차피 난 그대의 것인데.”
순간, 캘리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귓불과 목덜미를 지분거리는 그를 괜히 어깨로 밀었다.
“사람들이 봐요.”
“보면 어때서? 이제 넌 내 아낸데.”
그러면서 턱에 입을 맞춘다. 캘리는 얼른 그를 밀어냈다. 쿡쿡, 소리 내어 웃은 그가 허리를 감싸더니 품으로 당겼다.
“곧 음식이 나올 모양인데 넉넉히 먹어둬. 내일부턴 또 말을 타고 달려야 하니까.”
“빨리 베아투름으로 가고 싶어요.”
“나도 그래. 그러니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두라는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인들이 요리를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라이칸의 말처럼 기름에 튀겨진 음식들 냄새가 진동을 한다.
캘리는 갑자기 그 냄새가 역해져서 눈살을 찌푸렸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울렁거린다. 게다가 어지럽기까지.
마법사들과의 전쟁에 결혼식 준비까지. 너무 무리를 했던 모양이다.
결혼식이 끝나면 베아투름으로 갈 준비도 서둘러야 하는데…….
“자리로 갑시다. 부인.”
그가 속삭이며 방향을 돌렸다. 그녀도 따라 몸을 돌리던 그때였다. 천장이 빙그르르 도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아득해지고 귓속이 윙윙거린다.
비틀, 그녀가 이마를 짚으며 중심을 잃자 그가 재빨리 팔로 감싸 안았다.
“왜 그래?”
놀란 라이칸의 목소리가 둥둥 울렸다. 괜찮다고 하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정말로 세상이 빠르게 회전을 한다.
“캘리!”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는 그의 얼굴이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
라이칸은 그녀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장 드레스의 끈들을 풀어서 느슨하게 만들고 허리를 죄고 있는 끈도 풀어버렸다. 머리에서 왕관과 베일도 빼버리고 나자 셀리나가 다가와 모포를 덮어준다.
라이칸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와이엇을 보았다.
“말리는?”
“오웬이 데리러 갔습니다.”
라이칸의 시선이 다시 캘리에게로 향했다. 천천히 눈꺼풀이 들린다. 라이칸은 재빨리 몸을 숙여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캘리.”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묻는다.
“나, 어떻게 된 거죠?”
“쓰러졌어.”
“아.”
캘리는 어두운 눈빛을 하고 있는 라이칸을 보았다.
“걱정 말아요. 이젠 괜찮아. 드레스 예쁘게 입으려고 며칠 동안 조금씩만 먹어서 그래요.”
라이칸의 험악한 눈길이 셀리나에게 날아갔다.
“셀리나 잘못이 아니에요. 내가 고집부린 거야.”
푸드덕, 날갯소리가 났다. 창으로 들어온 쉴라가 침대 옆 탁자에 내려앉더니 혀를 찬다.
“내, 이럴 줄 알았어. 인간 여자들은 참 이상해. 드레스만 보면 환장을 해서는, 남한테 예쁘게 보이고 안 보이고가 뭐가 중요하다고. 캘리.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너의 공작은 네가 뚱뚱해지더라도 너만 보게 될 거라고.”
“쉴라.”
캘리는 힘없이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라이칸이 노려보자 쉴라도 입을 다문다.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오웬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옆으로 비켜서자 말리가 뛰어 들어왔다. 라이칸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내어주자 말리가 다가와 캘리를 내려다보았다.
“쓰러졌다고요?”
“응.”
“지금 기분은요?”
캘리가 슬쩍 라이칸의 눈치를 보자 말리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모두 나가 있어요.”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는 라이칸에게 말리가 다시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칸도 나가세요.”
결국 남자들이 모두 나가고 방에는 캘리와 말리, 그리고 셀리나만 남았다.
말리는 캘리의 이마를 짚어보고 손목을 잡고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더니 갑자기 쳐다보았다.
“속은 어때요? 메슥거리거나 하지 않아요?”
캘리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았어?”
“언제부터였어요?”
“열흘쯤 전부터…….”
옆에 있던 셀리나가 인상을 썼다.
“그래서 그렇게 못 드신 거였군요. 저더런 예쁜 드레스 입으려고 살을 빼는 거라고 하시더니.”
캘리는 희미하게 웃었다.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어. 아프다고 하면 라이칸이 결혼식을 늦출 테고, 그럼 베아투름으로 가는 날도 미뤄질 테니까.”
말리가 다시 물었다.
“가끔 어지러웠죠? 핑 도는 기분도 느꼈고, 기운도 없었을 테고.”
캘리는 다시 놀랐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물어놓고 걱정이 됐다.
“나, 병이 난 거야?”
말리가 미소를 지었다.
“병은 아닙니다.”
“그럼?”
캘리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며 말리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를 가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