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라이칸은 완전히 달라진 방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이 층에 올라와서 곧바로 침실로 향했다가 이내 거긴 아무것도 없어서 아기방으로 만들겠다던 방으로 갔다. 빙벽으로 가기 전까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던 아기방이 완전히 탈바꿈이 되어 있는 걸 보고 이거구나 했었다.
벽이 다시 칠해져 있었고 아기 침대와 가구들이 완벽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렇게 바꾸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분주했을지 떠올리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닌 걸 알아차렸다. 캘리의 얼굴은 뭔가를 더 숨기고 있는 기색이었고, 라이칸은 그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결국 이 방을 찾아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방이었다. 어머니가 여러 가지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시던 방이었다. 어린 아들이 홀로 돌아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알린 후, 아버지는 이 방을 폐쇄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그 방엔 아무도 들어가게 하지 마라.’
아직도 어머니의 체취가 가득하다 하시며 그 방을 드나들지도 못하게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라이칸은 이 방을 잊었다. 영주로서 해야 할 일이 바빴고, 아르 왕의 명을 받들어 전쟁에 참여하느라 성을 돌보지도 못했으니 당연히 방 하나쯤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아버지에겐 추억이 있는 방이었으나 그에겐 아무 기억도 없는 방.
그러나 아버지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방이니, 그대로 보존만 해놓던 그런 공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라이칸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놀라게 해주려다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라이칸.’
‘음?’
‘어머니가 쓰시던 방이요.’
‘음.’
‘그 방, 내가 써도 돼요?’
‘그래.’
‘정말?’
‘그래. 그 방도 이젠 쓸모 있게 바꿔야지. 대신, 아이를 낳은 후에 해.’
‘알았어요.’
그렇게 선뜻 대답해 놓고, 내가 없는 새에 일을 해치워버린 것이다.
라이칸은 다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기방보다 더 세심하게 신경 쓴 흔적이 곳곳에 보였다. 무거운 탁자와 수많은 양피지를 보관하는 칸막이, 상자, 견고한 덧문 등.
“이걸 보름 만에 해냈다고?”
라이칸이 돌아보며 묻자 캘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당신에게 선물해 주려고 그토록 서둘렀는데…….”
라이칸은 몸을 돌려 팔짱을 꼈다.
“이게 선물이라고 생각해? 넌 몸 생각을 안 하는 거야?”
그녀가 바짝 고개를 쳐들었다.
“했어요. 말리에게 매일 진료를 받고 몸을 보하는 약도 한 번도 안 빠지고 먹고 있다고요. 그리고 내가 무거운 것을 나르거나 손수 도끼질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도끼질이라는 말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여자가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쪼갠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라이칸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내가 그대를 모르나? 남들 일하는 거 보면서 가만히 손 놓고 있는 사람이야? 분명히 끼어들어서 직접 하겠다고 나섰겠지. 그러는 동안 몸은 피곤해졌을 거고.”
“아니라니까. 진짜 피곤할 정도로 일하지 않았다고요.”
“내가 빙벽으로 가기 전에 뭐라고 했었지?”
“그건…….”
캘리가 입을 꾹, 다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쉬고 있겠다고 맹세한 것이 이제야 생각난 듯했다.
“도통 남편의 말은 듣지를 않지.”
라이칸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녀의 입이 툭, 튀어나왔다.
아, 젠장. 이렇게 귀여운 표정을 지으면…….
그녀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미치겠군.
“당신도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잖아요. 난 괜찮다고요. 아이와 난 건강해요. 말리도 자주 몸을 움직여줘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야 아이가 쑥, 쉽게 나온대요.”
대들듯이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입술을 삐죽삐죽하는 걸 보니…… 돌겠다.
“당신은 고맙지 않아요? 기쁘지 않아요? 난 당신이 이 방을 보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누가 기쁘지 않다고 했어? 좋아. 근데…….”
그녀의 얼굴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커다란 눈을 깜박이면서 쳐다보는 것이 갓 태어난 강아지 같다. 며칠 만에 본 아내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 정원에 다녀온 탓인지 머리카락이 비죽비죽 흘러내려 하얗고 가는 목 언저리에서 곱슬거린다.
해가 지고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붉은 빛이 황금빛 머리카락에 붉은 띠를 만들고 있었다.
겨우 보름을 못 봤을 뿐인데.
“어떻게…… 더 예뻐 보이지?”
그녀의 얼굴이 멍해졌다. 그것마저 심장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솔직히, 아이를 가진 여자는 매력이 좀 줄어들긴 하지.’
와이엇의 말은 거짓이었다. 적어도 내겐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다.
라이칸은 한 발 다가가 그녀의 바로 섰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가까이 대자 향이 난다.
내 아내의 향기.
오스피아의 벨만 백작의 성에서 그녀를 처음 안았던 그때와 같았다.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향기.
나의 머릿속을 헤집고,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던.
그 냄새를 라이칸은 흠뻑 들이켜며 속삭였다.
“넌 오늘부터 침실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싫다면요?”
입술을 좀 더 가까이 가져가자 따뜻한 숨결이 느껴진다.
“거부할 수 없어.”
“왜요?”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움직이며 서로의 입술을 스쳤다.
“내가 널 놔주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입술을 겹쳤다. 숨을 불어넣고 입술을 핥으며 아내의 향기를 입 안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오늘 밤부터 당장 실행에 옮길 것이다. 아이를 건강하게 낳을 때까지 품에 가두고, 눈 밖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것이 나의 행복이기도 하니까.
입술을 잠깐 뗀 라이칸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속삭였다.
“선물, 고마워.”
그녀가 웃는다. 라이칸은 그 웃음이 또 예뻐서 다시 입술을 겹쳤다.
***
닫힌 문틈으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문 앞에 서서 돌처럼 굳어 있던 라이칸은 신음 소리가 점점 커지자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나로 모아진 눈썹과 험악하게 일그러진 눈빛은 닫힌 문을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다.
“칸.”
그걸 보다 못한 와이엇이 나섰다.
“걱정 마십시오. 괜찮을 겁니다. 부인은 강한 여자라고요.”
라이칸은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희 가문의 여자들은 아이를 낳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이를 낳다가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펠리키에서 다미아가 했던 말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라이칸은 도저히 가만히 있지 못하고 왔다 갔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대체 왜 나가라는 거야?’
산통이 시작됐을 때 그녀는 그가 방에서 나가길 바랐다.
‘당신이 너무 불안해하니까요. 나까지 겁이 난다고요. 당신이 안 보는 게 나를 돕는 거예요.’
강경하게 말하던 그녀의 고집을 막을 수 없어서 방을 나오긴 했지만.
라이칸은 이를 악물었다.
안 되겠다. 옆에서 지켜봐야겠다.
홱,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아악.
짧은 비명 소리가 울리는 순간, 라이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황급히 달려가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녀가 수건을 입에 물고 힘을 주고 있었다. 초췌한 그 모습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땀에 젖어 있는 그녀의 얼굴이 그에게 향했다. 흐릿해진 눈빛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곧장 달려가 그녀의 머리맡에 앉았다.
“라이칸.”
혼자 잘할 수 있다고 장담하던 그녀가 울면서 안겨온다.
라이칸은 그녀의 머리를 품에 꼭 안았다.
“힘을 주십시오. 좀 더 주셔야 합니다.”
아래쪽에서 말리가 엄하게 말했다. 라이칸의 붉은 눈이 험악하게 일그러졌지만 말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 머리가 보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캘리가 흐느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말리가 더 큰 소리를 냈다.
“아이 머리가 보이는데 쉬시면 아이에게 좋지 않습니다.”
순간, 캘리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라이칸이 말리를 노려보았다.
“지체하면 부인의 몸도 상하는 건 물론이고요.”
방해하지 말라는 듯 경고하는 거였다.
라이칸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캘리가 다시 힘을 준다.
지난밤부터 시작된 산통은 오늘 오후까지 이어져 이제는 해가 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으으음, 아으으윽.
이를 악물고 힘을 주는 그녀는 더 이상 작은 소녀가 아니었다. 한 팔에 쏙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가녀린 아내가 지금은 달리 보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흘리고, 모든 힘을 다 끌어모아 아이를 몸속에서 밀어내고 있는 여자는 그가 보호해 주고 지켜주고 보살펴줘야만 했던 아내가 아니라 강한 어머니였다.
그래도…… 더 이상 아이는 없을 것이다. 이 아이를 끝으로 다시는 너를 이 고통에 몰아넣지 않을 것이다.
맹세하던 그때였다.
으아아아앙.
캘리가 그의 품속으로 무너지는 순간,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렸다.
라이칸이 캘리가 미소 짓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든 순간, 말리가 아기를 보여주었다.
“아들입니다.”
라이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회오리에 갇혀서 떠밀리는 기분.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심장을 쓸어버리고 피를 소용돌이치게 하는 기분.
품에 안겨 있던 그녀가 팔을 내밀어 아이를 안았다. 계속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를 품에 안자 녀석은 본능적으로 젖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젖을 내어준 캘리가 그를 보았다.
미소 짓는 아내가 위대해 보였다. 그 어떤 전사보다도.
“아들을 낳아줄 거라고 했죠.”
그녀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순간, 라이칸도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라이칸은 열심히 젖을 빠는 아들을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아내를 보았다.
아름다웠다.
‘못 합니다.’
아르 왕이 오스피아의 귀족 딸과 결혼하라 명했을 때 버럭, 대들며 안 한다고 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고집을 부렸으면 이 여자를 못 만났겠지.
그 생각만 하면 심장이 선뜩해진다.
이 여자를 못 만났다면 내 인생은 여전히 황폐하고 건조했을 것이다.
캘리를 만난 후 진짜 행복을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행운이다.
“고마워.”
울컥, 솟아오른 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나야말로 고마워요.”
라이칸은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워렌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너를, 내 아이를 반드시 지켜줄 것이다.
내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벽난로에서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붉게 타는 불꽃이 그림자를 만들어 그녀의 황금빛 머리칼을 어루만진다.
라이칸은 힘차게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검은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최고의 전사가 될 거야.”
그가 속삭이자 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미아가 그렇게 말했어요. 우리의 첫 번째 아들이 거대한 베아투름 왕국의 위대한 왕이 될 거라고.”
“거대한?”
라이칸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묻자 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분명히 ‘거대한’이라고 했어요.”
라이칸은 다시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가까운 앞날에 디아르고에 살고 있는 마물들을 퇴치하고 그 너머의 야만인들의 땅을 정복하려고 세웠던 계획을 다미아는 알아차렸을까?
비밀스러운 야심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다. 와이엇과 오웬조차도.
그런데 다미아가 그런 말을 했다면…… 앞날을 보는 사람이니…… 보았을까? 내가 꿈꾸는 왕국을.
거대한 베아투름.
라이칸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은 먼 이야기다.
당분간은 이 행복의 광야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아들의 뺨을 쓸었다가 이내 아내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심장 깊은 곳에서 다시 뜨거운 덩어리가 치솟는다.
“사랑해.”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라이칸은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따스한 온기가 둘, 아니…… 세 사람을 붉은 열기로 휘감고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