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1화 (1/58)

1화.

프롤로그

평범한 날이었다.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경기도 양주시의 한 펜션에서 일명 ‘자살 클럽’에서 만난 남녀 다섯 명이 동반 자살을 기도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라디오에서는 뉴스가 흐르고.

“하아, 존나 심심하네.”

조수석에 앉은 정윤오의 입에서는 담배 연기가 흐르는, 그런 날.

“어, 설은하다.”

“누구?”

“있어. 우리 학교 유명한 자동문.”

정은수를 픽업하기 위해 정문 앞에 차를 대고 대기 중이던 태건은, 차 앞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한 여자의 모습에 정윤오의 눈빛이 이채를 띠는 것을 눈치챘다.

“자동문?”

“어. 저 좋다고 대시하는 놈마다 홀랑 자 준다고 유명하거든.”

무례한 성희롱성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정윤오의 모습에 태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윤오는 창밖으로 꽁초를 던져 버리고 제 말을 이어 나갔다.

“씨발, 어쩌다 저런 거랑 엮여서.”

“엮여?”

“어. 이번에 꼰대가 나한테 갖다 붙이려는 애, 쟤잖아. 약혼하라네?”

부동산 투자로 일명 졸부 대열에 낀 정윤오의 아버지 정호승은 요즘 하나뿐인 제 아들의 혼처를 알아보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아직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사고를 쳐 온 정윤오라도 제 가정이 생기면 그나마 책임감을 가질지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었다.

“조선 시대도 아니고.”

정윤오는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군대에 다녀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지만, 집이 부유해 취업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과 돈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아서 권태로움에 질릴 걸 걱정한다면 모를까. 아무튼 맞선을 봐서 결혼 따위를 할 이유는 전혀 없는 입장이었다.

“그러게. 근데 쟨 하겠대? 미친.”

태건은 열없이 웃는 정윤오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실은 아까부터 입 속에서 계속 말이 맴돌던 참이었다. 네가 약혼하면 정은수는? 은수는 어떻게 되는 건데.

“야, 태. 나 부탁 하나만 하자.”

“뭐.”

“쟤 내 옆에서 떼 줘.”

“뭐?”

다짜고짜 황당한 말을 지껄이는 통에 태건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정윤오는 특유의 실실거리는 표정으로 횡단보도 앞에 선 여자를 눈으로 좇았다.

“나 쟤 진짜 싫거든. 더럽잖아. 누구하고 잔 줄 알고 약혼을 해.”

“아, 더러운 새끼.”

소문이 진짜든 아니든 그런 말이 나돈다는 것 자체가 께름칙하기는 했다. 그래도 이딴 식으로 말하는 건 좀 별론데.

“부탁 좀 하자. 귀찮게 결혼했다 이혼했다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까딱했다가는 몇 년 쑥 흐를 텐데.”

“…….”

“대충 살살 꼬셔서 잠이나 한번 자. 어른들이 물어보면 너랑 사귀었던 애라고, 절친과 잤던 여자와 약혼하기 싫다고 하면 이해하지 않겠어?”

뭐든지 안 되는 일이 없고, 원하는 것을 가져 보지 못한 적이 없는 정윤오는 말하는 거나 생각하는 게 남들과 달랐다. 몇 번 지적해도 바뀌지 않자 결국 태건도 포기를 하고 말았지만, 가끔 상식 밖의 소리를 하는 제 친구를 보면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헛소리 작작 해.”

“누가 그냥 해 달래? 잘 떼 주기만 하면 네가 원하는 거 해 줄게.”

“…….”

“정은수.”

의미심장한 정윤오의 말에 태건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새끼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정은수는 정윤오와 차태건의 첫사랑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정호승의 권유로 성당에 다니게 된 두 사람은 한 살 위 누나였던 그녀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그리고 2년 넘게 그 마음을 키워 나갔다.

차태건의 부친인 차영조가 정호승의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지만, 태건과 정윤오는 수평적인 관계였다. 둘 다 정은수를 향한 제 연정을 숨기지 않았고, 정은수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둘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다 둘이 열여섯이 될 무렵, 아슬아슬했던 삼각형이 깨졌다. 정윤오와 정은수가 법적 남매가 돼 버린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모든 일에 심드렁했던 정윤오는 그나마 열의를 보였던 첫사랑이 실패로 돌아가자 완전히 엇나가 버렸다. 제 아버지가 저에게 요구한 인 서울 대학 입학과 마약 금지 조항 두 개만을 철저히 지키며 일찍부터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셨다.

태건 또한 첫사랑이 이루어지기는 요원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유도부에 몸을 담았던 태건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불의의 사건으로 운동선수 생활을 마감했고, 졸업 후 대학을 가지 않았다. 직장을 구하겠다는 그에게 정윤오는 제 옆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고, 그렇게 그는 정윤오의 기사, 경호원, 따까리, 아니면 정윤오 옆에 걔 등으로 불렸다.

그런 태건이 정은수의 모친 오진주의 눈에 들 리가 없었다. 여전히 진행 중인 그의 첫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이유였다.

“우리 고매한 오진주 여사, 내가 치워 주겠다고. 정은수랑 짝짜꿍 한번 놀아 보라고.”

정윤오의 집에서 그의 말은 영향력이 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제 엄마의 마지막을 목격했던 그는, 부친이 불륜녀였던 오진주를 집에 들인 일로 그야말로 지랄 발광을 하다 쓰러졌었다. 처음엔 그가 쇼를 하는 거라 생각했던 정호승은 잘못하다 아들마저 저세상으로 보낼 뻔한 사실에 감정적 을이 되었다.

그는 제 아들에게 자그마한 권력을 주었고, 정윤오는 그 미묘한 권력을 균형감 있게 잘 이용했다. 말 한마디로 정은수의 유학을 막거나, 사업에 개입하려는 오진주를 집안에 들어앉히는 등의 일이었다.

“개소리 그만 지껄여.”

“왜. 막상 밀어준다니까 자신 없어?”

잔뜩 가라앉은 태건의 목소리에 정윤오가 피식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유려하게 휘어지는 눈빛은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도발.

“그냥 꺼져, 새끼야.”

짓씹듯 목소리를 내뱉자마자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정은수.’

이제 수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라디오를 끄고 전화를 받자, 정은수의 맑은 목소리가 고요한 차 안에 울려 퍼졌다.

―건아, 어디야?

“정문 앞.”

―윤오도 같이 있어?

“어.”

―오케이. 금방 나갈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건아, 라고 다정하게 불러 주는 정은수의 음성은 그동안 단단하게만 살아온 태건을 살살 어루만졌다. 처음 눈을 뜨자마자 어미를 각인한 새끼 오리처럼, 태건은 저에게 내려지는 그녀의 자상함에 모든 것을 맡겼다.

“정은수, 이번 주말에 맞선 본다던데.”

“…….”

이 또한 정윤오의 변덕인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오늘 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 머리를 굴린 거겠지.

“새끼 도와준다니까.”

은근히 저를 부추기는 말에 태건은 길을 건너기 시작한 여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여자는 키가 꽤 컸다. 키도 키인데, 하이힐을 신어서인지 쭉 뻗은 다리에 유독 모델처럼 비율 좋은 몸이었다. 길게 웨이브 진 갈색 머리카락에, 얼굴은 새하야면서도 입술만은 빨개서 색기 있다는 말을 듣기 좋은 얼굴이긴 했다.

“화려하게도 생겼네.”

“알지, 알지. 차태건 이상형 여리여리하고 청순한 여잔 거. 근데 어차피 한번 먹고 버릴 거, 껍데기 괜찮은 게 좋잖아?”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정윤오의 성격상 한번 꺼낸 이야기는 절대 무르는 법이 없었다. 태건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음 달에 당장 정은수의 상견례를 잡으려고 할 정도로.

“간단해. 꼬셔. 꼬셔서 잠자리를 갖든 뭘 하든, 약혼식에만 못 오게 해.”

“…….”

“일단 몸 정이 들면 마음 정이 들기도 한다니까. 이번엔 진짜 날짜까지 잡을 거거든? 3개월 뒤.”

3개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집에 매번 지랄하기도 귀찮고, 그냥 걔가 안 나타나면 되는 거잖아? 약혼식만 딱 깨 주면, 내가 책임지고 정은수 너한테 밀어줄게.”

“쓰레기 새끼.”

“반갑다, 친구야.”

건조하게 중얼거리는 태건에 정윤오가 유쾌한 표정으로 악수를 청했다.

“밀어주고 자시고 다 필요 없으니까, 정은수 유학이나 보내 줘.”

“응?”

2년 전 정윤오의 반대로 유학이 무산된 후, 정은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학원에 등록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교수의 횡포에 죽겠다며 우는 듯 미소 짓는 그 모습이 못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눈물 나는 순애보다, 정말. 오케이. 성공하면 정은수 유학 보장. 보너스로 둘이 같이 가게 해 줄게.”

심심하다더니, 어느새 정윤오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다. 유달리 빛이 나는 그의 모습에 태건의 미간이 좁혀 들었다.

“왜 이렇게 신이 났어?”

“갑자기 존나 기대가 되네? 드디어 내 사랑하는 친구와 첫사랑이 합방을 하나 싶고.”

“입 싸물어.”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듯, 고개를 돌린 태건이 담뱃갑을 찾아 품을 뒤졌다. 그때 저 멀리서 빠르게 걸어오는 정은수의 모습이 보였다. 차를 발견한 그녀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아! 근데 너 잘나가다가 존나 클리셰로 돌아서는 거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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