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3화 (3/58)

3화.

잠시 의아하게 태건을 보던 은하는 이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그의 옷 위로 손을 옮겼다. 아마 먼저 만져달라는 뜻으로 오해한 듯했지만, 태건은 그 손길마저도 단호히 막아 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은하가 무구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은하를 잠시 내려다보던 태건은 한쪽 무릎을 굽혀 그녀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한동안 부스럭거렸다.

“뭐 하는 거야?”

그는 아무 말 없이 제 무릎 위에 은하의 발목을 얹어 놓았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해서 그런지 하얀 종아리는 말랑말랑하게 풀어져 있었고, 발가락 끝만 살짝 빨갰다.

살짝 들린 발로 인해 은하의 가운이 조금 벌어졌지만, 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발뒤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그런 다음 주머니에서 꺼낸 살구색 밴드를 물집이 잡힌 그곳에 꼼꼼히 붙여 주었다. 느릿느릿, 그러나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밴드를 붙이는 그의 손길에, 그를 내려다보는 은하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는지 모르겠어. 몸에 안 좋은 거 뻔히 알면서. 자해라도 하는 건가.”

정은수도 그랬다. 매번 발이 아파 죽겠다면서도 그놈의 하이힐은 포기를 못 했다. 그래서 태건은 항상 주머니에 밴드를 챙겨 다니는 게 버릇이었다.

“내가 불쌍해?”

“…….”

“불쌍하면 한번 안아 주든가.”

“전혀.”

태건은 어렸을 때 시골에서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낮에는 들판을 쏘다니며 놀다가 저녁에는 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며 TV를 보는 게 일이었다. 채널 결정권이 없는 관계로 매일 같은 시간대에 하는 일일 연속극을 주로 봐야 했는데, 내용이 죄다 불륜에, 출생의 비밀 천지였다.

하나같이 막장으로 치닫는 스토리에 태건은 심드렁해했지만, 할머니는 항상 침을 튀기며 제 일처럼 흥분하곤 했다. 그리고 말했다. 저게 다 제 팔자 제가 꼬는 짓이라고.

설은하가 입양아든 사생아든, 그래서 집에서 구박을 받든 말든, 애정 결핍에 아무 남자에게나 안기든 말든. 그건 태건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상황이 안쓰러울 수는 있었겠으나, 어쨌든 다 자기 선택이고 결정이었으니까.

“이거, 잠깐이라도 대고 있어.”

태건은 은하가 씻는 동안 준비해 놓은 얼음주머니를 냉장고에서 꺼내 건네주었다.

“잠이나 좀 자고 가라.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허탈한 듯 미소 짓는 은하를 그대로 두고 태건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모텔을 완전히 벗어나서야 전화번호도 주고받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곧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시간은 생각보다 이르게 찾아왔다.

* * *

“너 요즘 수상하다?”

“뭐가.”

“바른 대로 말해. 윤오가 또 이상한 거 시켰지?”

이른 아침부터 별채로 내려온 정은수는 뒷마당에서 운동하고 있는 태건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맨손으로 팔 굽혀 펴기를 하는 그의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학교에도 잘 안 오고, 그렇다고 윤오랑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새끼 요즘 몸 사리잖아. 잠깐 쉬라고 해서 그러는 중이야.”

공식적으로 태건은 정윤오의 경호원이자 기사였다. 대기업 자제도 아니고, 겨우 스물여섯밖에 안 된 대학생에게 경호원이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사실 큰 사고를 치지 않게 감시하는 역할이 컸다. 아니면 이미 친 사고를 수습하는 역할이거나.

“흠……. 암튼 윤오가 이상한 거 시켜도 절대 응하면 안 돼.”

“알았어.”

별스럽지 않게 대꾸하는 태건을 보며 정은수는 슬쩍 눈꼬리를 접었다. 못 미덥지만, 일단은 넘어가 주겠다는 표정이었다.

“근데 오늘 왜 이렇게 시끄러워? 손님 와?”

태건은 으리으리한 본채 밑 마당 한구석에 있는 조그만 별채에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나마 마당을 가로지르는 출입문이 하나였기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확인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침부터 사람이 들락거리는 기척이 많이 느껴졌다.

“아, 윤오 약혼할 사람. 점심에 그 집 식구들 초대했다고 들었어.”

“되게 본격적이네.”

“응.”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정은수가 뭔가를 떠올리는 듯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윤오 약혼할 사람 되게 예쁘다? 키도 크고, 몸매도 완전 장난 아냐.”

“본 적 있어.”

이쯤 운동을 마쳐야겠다고 생각한 태건은 벤치에 놓인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진짜? 윤오가 소개시켜 줬어?”

“아니. 저번에 학교 갔다가 우연히. 인사는 안 하고.”

“아. 어땠어? 예쁘지?”

얼굴을 들이밀고 대답을 강요하는 정은수에 태건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뭐, 그냥. 예쁘긴 해도 정은수보다는 못하지’ 이런 대답?”

“뭐, 그냥. 예쁘긴 해도 정은수보다는 못하지.”

“잘했어.”

찝찝하지도 않은지 정은수는 땀이 잔뜩 밴 태건의 머리를 쓱쓱 손으로 쓸어내렸다. 마치 강아지를 칭찬하듯 악의 없는 손길이었다.

“저녁에 윤오랑 다 같이 영화 보러 갈까?”

“그래.”

“7시에 나가자.”

“어.”

정은수는 태건의 손에 들린 수건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축축하게 젖은 태건의 머리카락을 살살 털어 주었다.

“이따 봐.”

멀어지는 정은수의 모습에 태건은 나직이 숨을 뱉어 냈다. 이런 작은 스킨십에 반응하지 않게 된 지 겨우 반년. 그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지만, 그녀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지는 오래되었다. 태건이 원하는 건 오직 정은수가 행복하게 지내는 것뿐이었다.

* * *

“하아…… 진짜 골 때리네.”

태건과 정윤오, 정은수 셋이서 영화를 보기로 했던 계획은 조금 변경되었다. 식사 중 어쩌다 저녁 계획을 알게 된 오진주가 이참에 예비 시누이와 친해지는 것도 좋지 않겠냐며 설은하를 셋 사이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설은하는 으레 그렇듯 거절하지 않았고, 정윤오는 조수석에 앉아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욕을 짓씹고 있었다.

“은하 씨, 영화 좋아해요?”

“네. 쉬는 날엔 거의 영화만 봐요.”

“진짜? 어떤 영화 좋아하는데요?”

“가리지 않아요. 액션, 공포 다 좋아하고 예술 영화도 봐요.”

“와, 난 영화 편식 되게 심한데. 부럽다.”

그나마 열심히 수다를 떨어 대는 정은수의 노력 덕분에 차 안의 분위기는 조금 풀어져 있었다.

“그나저나 말 편하게 하세요, 언니. 계속 이렇게 말 높이시면 저 불편해요.”

“아……, 그래도 될까?”

“네.”

첫인상과는 달리 설은하는 꽤 서글서글한 모습으로 정은수를 대했다. 무심코 백미러로 뒤를 살피던 태건은 우연히 시선을 돌리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태건을 보았을 때 은하는 살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듯 입가에 미소까지 띤 채였다. 아는 사람이냐며 묻는 정은수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대답하는 목소리는 얼핏 뻔뻔하게까지 들렸다.

“정은수, 이쪽으로 와.”

“어?”

일렬로 늘어진 좌석 중 맨 먼저 자리를 잡은 정윤오는 은하를 먼저 앉히려는 정은수의 손을 제 쪽으로 잡아끌었다.

“여기 앉으라고.”

“그래도.”

“먼저 들어가요, 언니.”

은하까지 설핏 웃으며 자리를 양보하자 정은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윤오의 옆에 앉았다. 은하는 태건에게까지 자리를 비켜 준 후, 가장 끝에 앉아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영화가 곧 시작되었다. 태건은 중간중간 정은수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화면이 아주 어두워질 때 은하를 한 번씩 돌아보았다.

영화를 좋아한다는 게 정말인지 팔짱을 끼고 스크린을 응시하는 설은하는 꽤 집중하고 있었다. 코믹 영화이기는 해도 대놓고 웃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웃고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 그런 은하의 모습이 지난번과는 너무 달라서, 태건은 조금 생소한 기분마저 들었다.

“재미없어?”

“어? 아니.”

은하를 살피던 태건의 시선이 작게 속삭이는 정은수의 목소리에 붙잡혔다. 그렇게 그의 눈길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은하의 고개가 그에게로 향했다.

정은수의 말을 들어 주느라 태건의 어깨가 왼쪽으로 완전히 치우쳐져 있었다. 그런 그를 보는 은하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었다.

“맥주라도 한잔하고 가면 좋은데.”

“내일 일찍 일이 있어서요.”

아쉬운 듯 구는 정은수에게 은하는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다음에 제가 맛있는 거 살게요.”

“그래, 그럼. 정윤오, 뭐 해?”

“뭐.”

데려다주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보는 정은수에 정윤오는 심드렁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정은수는 은하 몰래 눈가를 찡그리며 얼른, 하는 입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야, 차 기사, 네가 좀 모셔다드려.”

정윤오는 내킬 때마다 태건을 부르는 호칭이 달랐다. 태, 차 기사, 차 경호 등등. 직업이 윤오의 기사가 맞았기에 태건은 괘념치 않았지만, 정은수는 달랐다.

“정윤오, 너 내가 태건이한테 함부로…….”

“씨발, 뭐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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