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몇 시야?”
“새벽 5시.”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창밖에는 가로등 불빛마저 사라져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잠든 은하를 지켜보고 있던 태건은 부스스 일어나 눈을 비비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안 갔네? 먼저 갔을 줄 알았는데.”
“깨는 거 보고 가려고.”
“다정하네.”
아직 잠이 덜 깬 듯 웃음을 흘리는 그녀에게 물병을 건네고 침대에 슬쩍 걸터앉았다.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은 흥분이 들어차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왜 그렇게 봐?”
“그냥. 예쁘다 싶어서.”
“은수 언니보다 더?”
순간 굳은 태건의 표정에 은하는 별스럽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잠시 휴대폰을 확인하고 생수로 목을 축였다.
조금씩 일어날 채비를 하는 은하의 행동에 태건은 지금 그녀가 여기를 떠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짐작했다. 질리도록 관계를 가졌으니, 미련도 뭣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나 좀 도와줄래?”
“응?”
뜬금없는 태건의 말에 돌아오는 은하의 시선은 건조했다.
“나 정은수 좋아하는 거 맞아. 근데 이제 그만하려고. 어차피 안 될 거 알거든.”
“…….”
“잊을 수 있게 네가 도와줘.”
“내가? 어떻게?”
의문은 담은 눈빛은 말갛기만 했다. 불쑥 튀어나온 제 말에 내심 놀라면서도 태건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자자. 너 약혼하기 전까지만.”
말도 안 되는 제안인 걸 알고 있다. 친구의 약혼녀에게 못 할 말이라는 것도, 짝사랑을 잊기 위해 다른 여자와 자겠다는 것도.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정윤오가 조건을 내건 것부터 오늘 일까지, 말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재밌네.”
부딪친 두 사람의 시선에 온기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열기가 식어 버린 공간에 허무한 침묵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 * *
“차 기사 웬일이야? 룸 안까지 들어오고? 오늘은 운전 안 하냐?”
“오늘 윤오가 차태건 생일 턱 쏜다고 모은 거잖아. 멍청한 새끼야.”
“그랬나?”
“하여튼 하는 일이 매일 술 처먹는 것밖에 없는 새끼라 생각도 존나게 없어요.”
“아, 근데 생일이 6.25가 뭐냐, 6.25가. 존나게 피란 가야 돼.”
오후 9시 30분. 매일같이 마시는 술이 질리지도 않는지, 벌써부터 혀가 풀린 강민수는 몇 년째 아무도 웃지 않는 말을 유머랍시고 던졌다.
태건은 골이 아팠다. 정윤오 딴에는 제 생일을 축하해 준답시고 중학교 동창들을 모은 거겠지만, 태건은 이 중 그 어느 누구와도 친구라 할 만큼 친하지 않았다.
“야, 한잔해! 파티 주인공이 왜 멀뚱히 앉아만 있어.”
“근육 빠져.”
“아, 진짜 짜증나는 새끼.”
술잔을 건네던 정윤오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려보냈다. 이내 과일 안주를 던지며 소파에 몸을 묻은 그는 늘 그렇듯 한껏 나른해진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량도 센 놈이 꼭 양주 한두 잔에 저런 표정이 되곤 했다. 모르는 놈들이 저 얼굴에 속아 괜히 대작을 걸었다가 된통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애초에 태건은 생일이라고 거창하게 보내는 편이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라는 존재는 없었고, 언제나 정윤오 아버지의 기사 노릇을 하느라 바빴던 아버지는 그리 섬세한 성격이 아니었다. 저녁 늦게야 오늘이 생일이었냐며, 멋쩍은 표정으로 지갑에 있는 돈의 반을 꺼내 주는, 말하자면 딱 그 정도의 날일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아침부터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정은수가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히 들이밀었다.
‘생일 축하해! 올해는 안 잊어버렸다. 나 잘했지?’
언젠가 오진주가 태건에게 난리를 치는 것을 본 이후로, 정은수는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함께 영화는 보러 가지만 절대 둘이서만은 움직이지 않는 것, 서로의 안부는 묻지만 생일은 챙기지 않는 것 따위가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왜 그랬을까.
‘윤오랑 생일 파티 한다며? 끝나고 연락해. 나도 선물 준비해 놓을게.’
워낙 오랜 시간이 흐른 터라 꽤 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빛을 반짝이는 정은수를 보니 태건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렀다.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하려고, 저가 더 기대감에 찬 모습에 가슴 한쪽이 근질거렸더랬다.
위이잉. 계속 손에 쥐고 있어 뜨끈뜨끈해져 있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려왔다. 정은수. 이십 분 전에 어디냐고 보낸 메시지에 온 답장이었다.
[건아, 미안. 갑자기 중요한 약속이 생겨서ㅠㅠ]
[내일 내가 진짜 맛있는 거 사 줄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중요한 약속이라. 정은수에게 차태건과 다른 선택지 중 골라야 하는 일이 있으면 언제나 제가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것이야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선물은 좀 궁금하긴 했는데. 술이나 마실 걸 그랬나.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 정도 일에는 수없이 단련이 되었기에, 태건은 조용히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어, 왔어?”
태건이 상념에 잠긴 사이,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섰다. 오오. 등장인물을 알아본 동창 놈들의 입에서 야유와 환호의 중간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소개는 해야 할 거 같아서. 여기 내 약혼녀, 설은하. 대충 알지?”
태건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나른한 정윤오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인사해. 여긴 내 친구들.”
“반가워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고개를 든 태건의 앞에 은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서 있었다. 지난번 헛소리 같은 제안에 가타부타 대답 없이 헤어진 후 일주일 만이었다.
예닐곱 명 되는 사내새끼들의 벌건 얼굴을 훑어보는 그녀의 시선은 놀랍도록 무감했다. 하나하나 면면을 살피던 은하의 눈빛이 저에게 닿았을 때 태건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제 막 잠들려는 사람 부르길래 급한 일인 줄 알았는데, 이게 다야?”
급히 나오기는 했는지, 설은하의 차림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화려한 착장을 많이 하는 그녀는 언제나 몸에 꼭 맞는 원피스나 스커트를 주로 입었는데, 오늘은 하얀 블라우스 밑에 핏이 편안해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화장도 못 했는지 하얀 피부에 눈가의 점이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왜 예쁜데. 새롭네.”
“새끼, 약혼녀 자랑하냐.”
“빈말이 아니고, 진짜 아름다우십니다.”
예의상 한 번 미소 지은 은하의 시선이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생크림 케이크에 가닿았다.
“너 생일이니? 그래서 부른 거야? 축하해 달라고?”
아무래도 친구들 한가운데 정윤오가 앉아 있으니 케이크의 주인공이 그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 이유라면 납득이 간다는 뜻이었을까. 날서 있던 설은하의 눈빛은 그새 잠잠해져 있었다.
“아니, 내 베프 생일.”
정윤오의 고갯짓에 태건 쪽으로 은하의 시선이 향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정윤오가 나른하게 미소를 지어내며 말했다.
“온 김에 술이나 한 잔 따라 주고 가라.”
“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피는 못 속인다는데.”
“…….”
순간, 왁자지껄하던 룸 안에 거짓말처럼 침묵이 가라앉았다. 바라지 않은 완전한 고요에 태건은 이 안의 모든 사람이 설은하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네 엄마, 창녀였냐?’
정윤오는 계속해서 설은하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할퀴고, 상처 주고, 모욕하고. 태건이 아니고라도 어떻게든 떨어지게 하고픈 모양이었다.
“하, 정윤오 진짜 저질이네.”
실소를 내뱉은 은하가 정말로 피곤한 표정으로 머리를 크게 한 번 쓸어 넘겼다.
“내가 여자를 불러 주진 못하겠고, 돈 필요하면 말해. 한 번 정도는 도와줄 수 있으니까. 재밌게 놀다 가라.”
나직이 제 할 말을 끝낸 은하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완전히 문이 닫히고 몇 초가 흐르고 나서야 룸 안의 소리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와씨, 뭐야. 쟤 뭐야?”
“진짜 개세다. 대박.”
저마다 감상을 늘어놓는 동창 놈들의 주절거림을 흘리며 태건은 정윤오를 바라보았다. 내가 뭐? 어깨를 으쓱하며 보던 정윤오는 이제야 술맛이 난다는 듯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제 막 1차를 끝내고 2차를 가는 사람들, 혹은 집에 가기 위해 같은 방향의 동료들을 모으는 사람들, 아직 버스가 끊기지 않았다며 정류장을 향해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그리고.
빵빵.
“안 타요?”
지금 막 택시를 떠나보낸 은하는 혼잡한 그들 사이에 외딴섬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설은하.”
태건은 본격적으로 술을 퍼부어 대는 놈들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진심으로 저를 위하는 게 아닌 자리에 있기도 싫었고, 설은하가 그딴 식으로 나가 버린 것도 찝찝했다. 오지랖이라면 오지랖이었다.
“왜. 정윤오가 다시 데려오래?”
“집에 데려다줄게.”
“술 마셨잖아.”
“난 안 마셨어. 가.”
호기롭게 퇴장한 것치고 설은하의 표정은 그다지 괜찮지 못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렇게 수시로 찔러 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