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이 차는 계속 네가 가지고 다니는 거야?”
“거의.”
뽑은 지 1년 정도 된 검은색 스포츠카는 정윤오가 술김에 덜컥 계약을 했다가 그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물건이었다. 몇 달 후 차가 나왔을 때 정윤오는 마침 다리를 다쳐 운전을 할 수가 없는 상태였고, 차 키는 그대로 태건에게 돌아갔다. 대부분 정윤오나 정은수를 태우는 게 다였으므로 차에 대해 별다른 감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까…….”
은하의 질문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태건이 이내 뭔가 망설이듯 입을 어물거렸다.
“응?”
“정윤오가 원래 그렇게 막가는 인간은 아닌데…….”
“뭐야. 지금 친구라고 편 들어주는 거야?”
“…….”
“정윤오 나쁜 놈 맞아. 그것도 완전 개새끼.”
“……그래.”
직설적인 은하의 말에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자라 왔지만, 태건도 제 친구를 이해 못 할 때가 많았다. 단지 또라이 같은 그 모습에 적응했을 뿐.
“개자식이 친구 복은 있네.”
피식 웃음을 흘리던 은하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꺼냈다.
“어, 효주야. 지금?”
잠시 말을 듣던 은하는 조금 놀란 표정과 함께 이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갈게. 이따 연락해.”
전화를 끊은 은하가 태건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 차 좀 돌려줄래?”
* * *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아직 12시 안 지났는걸요. 그나저나 작가님 어머니께서 괜찮으셔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오면서 통화했는데 괜찮으시댔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전 얼른 원고 살펴보러 갈게요.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은하의 입에서 얕은 한숨이 새었다. 딸깍딸깍, 몇 번의 마우스 클릭과 함께 환하던 노트북 화면이 암전되었다.
은하수 책방.
은하가 태건에게 차를 돌려 가 달라고 부탁한 곳은 그녀의 친구가 운영하고 있다는 독립 출판 전문 서점이었다. 책방이라고 해서 옛날 중고 서적들을 모아 놓은 곳인 줄 알았더니, 주로 여행 에세이나 수필 등을 취급하는 곳이라고 했다.
“고마워. 너무 부려 먹은 거 아닌지 모르겠다.”
은하의 친구는 책방 사장 겸 작가인데, 오늘까지 마감인 원고를 마무리하는 사이 어머니가 쓰러지셨단다. 정신없이 응급실에 가느라 출판사에 넘기지도 못한 원고를 은하에게 부탁해 출판사로 대신 송부한 것이었다.
“이런 데 처음 와 봐.”
생소한 눈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는 태건의 모습에 은하가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 게 아니라, 책장 대여섯 개 정도밖에 없는 작디작은 책방에 190센티미터를 넘는 거구의 태건이 안 어울리기는 했다.
“책 좋아해?”
“전혀. 운동했다니까.”
“그거 너무 핑계로 써먹는 거 아냐?”
“……이건 뭐 하는 거야?”
아기자기하게 공예품이 늘어진 진열장 옆으로 작은 단상과 마이크가 세워져 있었다. 툭툭, 괜히 검은색 마이크를 두드리며 태건은 애써 말을 돌렸다.
“가끔 북 토크 할 때 있거든. 작가, 독자 초대해서 책에 대한 이야기 나누는 거야.”
“그런 게 재밌나?”
“뭐.”
은하는 별말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판단은 너에게 맡기겠다는 뜻이었다.
“선물 하나 해 줄까?”
“책을?”
“생일이라며.”
“됐어. 이제 가자.”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긴 태건은 미련 없다는 듯 먼저 밖으로 나섰다. 귀엽네, 중얼거린 은하가 가게의 불을 끄고 그의 뒤를 따랐다.
“우리 집 말고 너희 집으로 가자.”
“어?”
조수석에 오르자마자 은하가 태건에게 말했다.
“정윤오한테 할 말 있어서.”
“무슨 말. 지금 가도 그 새끼 없어.”
“일단 가.”
가서 다시 싸우기라도 하려고?
뭔가 답답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지만, 평온한 얼굴로 벨트를 매는 은하의 얼굴에 태건은 조용히 액셀을 밟았다.
조용한 집 앞 골목에서 자동차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은하를 잠시 일별한 태건은 창밖으로 시선을 올려 2층에 있는 정윤오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당연하게도 방은 어두웠다.
“정윤오 없어. 그러니까 다시…….”
“생일 축하해, 차태건.”
“……뭐?”
“생일 선물 준비한 게 없어서. 집에나 데려다주려고.”
“…….”
“이제 오 분밖에 안 남았다. 오늘 하루 잘 보냈어?”
오늘 하루, 뭘 했더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아침 운동을 하고, 정윤오와 정은수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근처 유도장에서 몸을 풀고 식사를 하다가 정윤오와 함께 일찌감치 동창회를 시작했다. 클럽으로 이동을 한 게 오후 7시.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였다. 특별히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먹은 것도 아니고 선물을 받은 것도 없다. 떠들썩한 농담 몇 마디, 이제는 아프지도 않은 정은수의 거절 말고는.
“흠, 별로였나 보네.”
“…….”
“생일 선물 줄까?”
의아하게 보는 태건의 어깨로 은하의 손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굵직한 어깨를 잠시 어루만지던 손은 곧 목 뒤로 올라가 그의 귓가를 지분거렸다. 턱, 열 오른 은하의 손끝을 태건이 가볍게 그러잡았다.
“무슨 뜻이야?”
“생일 선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
“자자. 나 약혼하기 전까지만.”
활짝 미소가 만개한 설은하의 얼굴에 씁쓸함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게 참 슬퍼 보인다고, 다급하게 은하의 입술을 훔치면서도 태건은 생각했다.
2. 소용돌이
파르라니 깎인 잔디 아래로 작은 봉분이 모양 이쁘게 나 있었다. 이 이상 더 정리할 것도 없건만, 괜히 곁가지처럼 나온 풀잎 몇 개를 꺾어 없앤 태건은 절을 마친 후 얼른 재킷을 벗어 던졌다.
오랜만에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었더니 등에 한껏 땀이 배었다. 넥타이와 단추를 몇 개 풀어낸 태건은 무덤을 등지고 앉아 소매를 걷어붙였다.
올해로 그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7년째 되는 날이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는 내려오지 못했지만, 초여름에 있는 기일만은 꼬박꼬박 챙겼다.
고향에 마련한 작은 선산은 태건의 부친이 서울에서 미친 듯이 일해 모은 돈으로 처음 장만한 곳이었다. 아무도 탐내지 않는 시골의 작은 동산이었지만, 햇빛과 바람이 잘 통했고, 마을을 품고 있는 풍경도 보기 좋았다.
태건은 태어날 때부터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자랐다. 돈을 벌겠다고 집을 나가서는 어느 날 제 아들이라며 아이 하나를 뚝 떨구고 간 부친을, 할머니는 단 한 번도 꾸짖지 않았다. 그저 신령님께 빌지도 않았는데 떡두꺼비 같은 손주가 생겼다며 싱글벙글 웃고 다닐 뿐이었다.
돈은 없어도 잔정이 많고 인망이 높은 분이었다. 부모가 없고, 가난한 태건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일 없이 무던하게 자랄 수 있었던 이유도 전적으로 할머니 덕분이었다.
[건아, 잘 도착했어? 우리도 지금 비행기 탔어.]
방금 도착한 정은수의 메시지를 확인하며 상에 올렸던 빨간 사과를 크게 베어 물었다. 아삭, 시큼 달달한 사과즙이 입 안 가득 들어찼다.
기일이 다가오면 태건은 일주일 정도 시간을 내 고향으로 내려왔다. 전날에 도착해서 미리 벌초를 하고 아침에 간단하게 제를 지낸 후, 남은 며칠 동안 망가진 집도 수리하고 동네 어르신께 인사도 하는 것이 주된 일정이었다.
내키면 일주일 다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나흘 정도면 충분했다. 서울에도 그리운 이가 있었으므로.
―어? 통화할 수 있어?
“방금 다 마쳤어. 이제 출발해?”
―응. 너 없으니까 심심하다. 정윤오 잔소리 너무 심해.
태건의 일정에 맞춰 정윤오와 정은수도 짧게 일본 여행을 계획했다. 7년 전 시작된 이 루틴은 세 사람이 초여름을 보내는 암묵적인 룰이 되어 있었다.
―우리도 언제 한번 성진시에 내려가야 되는데.
성진군 백서읍 무래리.
평생을 서울깍쟁이로만 살아온 정윤오와 정은수는 한때 조기로 유명했던 성진시가 인구가 급감해 성진군으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기차도 지나지 않고 버스로 다섯 시간은 가야 도착하는 태건의 고향. 그곳에 두 사람이 올 일은 절대 없었다.
“재밌게 놀다 와.”
―어. 끊을게.
태건은 휴대폰을 재킷 위에 던져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며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화창한 하늘 밑에 물을 댄 논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져 있고, 초록색으로 쨍한 논 사이사이에 게으른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창공에는 이름 모를 철새들이 무리를 지어 보기 좋게 활강했다.
“으으으.”
두 손을 깍지 끼고 기지개를 켠 후 크게 한 번 몸을 털었다. 무덤을 향해 돌아본 그의 입가에 미소가 씩 올랐다.
“좋다, 할머니.”
“태건이 왔냐?”
“안녕하세요, 아저씨.”
“안 그래도 왔을 거 같아서 올라와 봤다. 식사 안 했지? 콩국수 말아 왔어.”
“감사합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마당으로 들어온 사람은 동네 이장이자 한때 옆집에 살았던 곽 씨 아저씨였다.
태건의 부친, 차영조의 친구이기도 한 곽 씨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친구의 아들을 제 자식처럼 여겼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큰 덩치로 펑펑 우는 그를 달래 준 것도 그의 부친이 아닌 곽 씨 아저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