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일은 할 만하고?”
“네.”
“어째 키가 더 큰 거 같은데. 더 자라면 안 된다. 색시들 도망가.”
“네.”
평소엔 잘 웃지 않는 태건도 곽 씨의 너스레에는 곧잘 눈을 휘곤 했다. 다 컸어도 그에게는 여전히 어린애로 보이는지 곽 씨의 눈에는 애정과 걱정이 가득했다.
“아버지는?”
“여전하세요.”
“얼굴 한번 보면 좋겠구먼.”
답답한 이곳이 싫어 무작정 서울로 떠난 태건의 부친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을 하다 우연히 정호승과 연이 닿았다. 기술을 배웠으니 그걸로 먹고살았어도 됐으련만, 당장에 큰돈이 필요했던 그는 월급을 세게 부르는 정호승의 말에 그를 위해 일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세월을 그의 집 마당 한편에서 지냈다.
“이 집도 이제 다 됐다.”
할머니가 태건에게 남긴 이 집은 다 낡아 빠진 기둥에 부스러기가 가득했다. 부엌에는 아궁이에 불 땐 흔적 하나 없었고, 얇은 창호지로 겨우 덧댄 문살도 위태롭기만 했다.
하지만 태건은 모든 것이 해지고 떨어진 이곳을 좋아했다. 여기는 그의 고향이었다.
* * *
―우리 내일 저녁 9시 도착 예정이야. 마중 나올 거지?
“어.”
공항에 미리 나와 있으라고 해, 옆에서 훈수 두는 정윤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었지? 너 일찍 와서 좋다. 별장 가서 신나게 놀자.
태건은 이번에도 나흘만 있다가 올라왔다. 남은 삼 일은 두 사람과 함께 양평에 있는 별장에 가기로 한 탓이었다. 태건은 즐겁게 재잘대는 정은수의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차태건!”
고속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지하철 방향으로 발길을 틀던 태건은 제 귀를 잡아채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너……. 여기서 뭐 해?”
“너 버스 탔다길래. 검색해 보니까 지금쯤 도착할 거 같아서. 진짜 만날 줄은 몰랐네?”
갑자기 나타난 은하에 태건은 얼떨떨했다. 어디서 비즈니스 만남이라도 가지고 온 건지, 크림색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딱 떨어지는 펜슬 스커트가 그녀의 몸매를 더욱 부각하고 있었다.
잠정적 파트너 협의를 맺은 것치고,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만남을 가지지 못했다. 은하는 번역 일과 과외로 바빴고, 태건은 그 나름대로 정윤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느라 시간이 매번 엇갈린 탓이었다.
이런저런 일정을 조율하려다 보니 이틀에 한 번꼴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말은 곧 이틀에 한 번 흥분했다는 얘긴가. 괜히 머쓱한 느낌이 들어 태건은 잠시 헛기침을 흘렸다.
“집으로 바로 가? 아니면 따로 약속 있나?”
산뜻하게 묻는 얼굴은 도저히 ‘시간 있으면 자러 갈래?’라는 질문을 담은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일단 없긴 한데.”
“잘됐다. 나랑 놀아 주라.”
“어?”
웃으며 팔을 잡아끄는 은하의 손길에 태건은 얼떨결에 발걸음을 옮겼다. 은하의 뒤를 따르며 왜 이렇게 어리둥절한 느낌이 드는 걸까 곱씹어 보니, 문득 자신이 누군가의 마중을 받아 본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필 그게 친구의 약혼녀이자, 보상을 걸고 만나는 연애 상대라니.
순간 쓴 물이 올라온 태건은 은하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가슴을 툭툭 쳤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김효주라고 해요.”
“차태건입니다.”
“저번에 도와주셨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아뇨. 전 뭐 한 것도 없는데요.”
“너희 내외하니? 스물여섯끼리 말투가 왜 그래.”
은하의 가벼운 타박에 효주가 그런가? 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은하가 태건을 끌고 온 곳은 또 은하수 책방이었다. 오늘 친구 효주가 낸 책으로 여는 북 토크가 있다며 억지로 데려온 것이었다.
듣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느낌에 태건은 일단 한 번 거절을 했지만, 제 친구의 기를 좀 살려 달라는 은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북 토크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우선 효주가 쓴 책이 글보다 직접 그린 그림이 더 많아 태건이 보기에도 무리가 없었고, 그녀는 재치 있는 글 솜씨만큼 말도 잘했다. 중간중간 던지는 유머는 기분 나쁘지 않게 사람들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더 놀다 가세요.”
오후 5시에 시작한 북 토크는 한 시간 반 정도 진행돼 딱 저녁 식사 시간에 마쳤다. 뒤풀이 겸 식사 대용으로 준비했다는 핑거 푸드가 준비되어 있어, 남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분위기 괜찮지?”
“어. 생각보다 재밌네.”
“좋아할 줄 알았어.”
미소 지으며 샴페인을 기울이는 은하를 보며 태건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원래 잠자리 상대끼리 이런 시간을 가지나? 원래 계획대로라면 제가 오히려 설은하를 꼬셔야 하는데 뭔가 일이 반대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생각 좀 해 봤어?”
“어?”
의아해하는 태건의 표정에 은하는 말없이 샴페인 잔으로 제 한쪽 눈을 가렸다. 태건은 그것이 며칠 전 저에게 보낸 문자에 관한 것임을 깨달았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잠자리에서 하고 싶은 것 한 가지씩 생각해 오기.]
다짜고짜 미션처럼 메시지를 보낸 은하는 참고로 자신은 제 눈을 가려 줬으면 좋겠다고 끝말을 붙였다.
“아……. 그게.”
“왜, 너무 많아서 정리가 안 돼? 아님 엄청 하드한 건가? 나 완전 극단적인 건 못 하는데.”
초저녁이라고는 해도 아직 해도 다 안 졌는데, 바로 옆에 사람들이 조잘대는 뻥 뚫린 공간에서 설은하는 잘도 야한 소리를 해 댔다.
“난 네가 좋은 게 좋아.”
채근하듯 보는 눈빛에 태건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실 그도 이런저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엇을 상상해도 쾌락에 무너지는 은하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 흥분되는 게 없었다.
흠, 그런 그를 보는 은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넌 진짜 나쁜 애는 못되겠다.”
의미 없이 던진 은하의 말에 태건은 지레 찔렸다. 아닌데. 이미 나쁜 짓을 하고 있는데. 넘어올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너를 두고 뭔가를 시작해 버렸는데.
설은하가 생각 외로 나쁜 인간이 아니어서일까. 내팽개쳐 놓았던 죄책감이 수시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그럼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
“…….”
“너, 오늘 내 개 해.”
씩 웃는 설은하의 미소가 섬뜩할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그래, 차라리 날 때려라. 그렇게라도 죄책감을 상쇄할 수 있다면 등이 터질 때까지 맞아 줄 수 있었다.
* * *
“청바지 다시 입고 있을래?”
먼저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건에게 은하는 다 벗고 청바지만 입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흥분해서 그런지 속옷을 입지 않은 채 청바지를 입는 것은 번거로웠다. 결국 태건은 단추를 풀어 놓았다.
달칵. 밖으로 나온 은하는 머리카락이 조금 젖었을 뿐 펜슬 스커트와 크림색 블라우스 차림은 그대로였다. 씻는 소리가 분명 들렸는데. 아, 스타킹을 벗은 건가.
뚫어질 듯 저를 보는 태건에 은하도 곧 시선을 맞춰 왔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던 은하가 풀어 헤쳐진 청바지를 보며 조그맣게 웃음소리를 냈다.
“하여튼 선수 맞다니까.”
“어?”
“섹시하단 소리야.”
침대에 걸터앉아 두 팔을 뒤에 기대고 있는 태건의 모습은 흡사 섹시 화보 속의 모델 같기도 했다.
자연 빛에 태닝된 어깨와 가슴의 화난 근육들, 뱃가죽에 굵직하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복근, 터질 듯한 허벅지를 감싼 짙은 청바지까지.
제 몸을 훑어 내리는 은하의 눈빛에 태건은 시선으로 몸을 탐한다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손.”
순순히 손을 내미는 태건을 보며 은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돼.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핥고 싶으면 핥아.”
“오늘 네 개 하라며.”
“응. 요즘 개는 주인한테 사랑받는 게 의무잖아?”
요컨대 은하는 태건에게 상황적 제약은 두지만 행동의 제약은 두지 않겠다는 거였다. 주인이 마냥 어르고 달래고 사랑해 주는 요즘 개들처럼, 제 어리광 같은 관계도 받아 주겠다는 얘기였다.
팔을 잡아끄는 은하를 따라 태건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화장대로 걸어간 은하가 엉덩이를 반만 걸쳐 자리를 잡자, 비스듬히 땅을 딛고 선 다리가 태건의 눈앞에 먹이처럼 들어왔다.
은하의 밑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태건은 그녀의 왼쪽 발을 들어 그 끝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춥, 춥. 발등에 버드 키스를 내린 그는 안쪽 복숭아뼈 밑을 살짝 핥았다가 그대로 거칠게 혀를 쓸어 올렸다.
손바닥에 감기는 종아리는 맨살을 만지는 것보다 감도가 덜했지만, 꼬집는 듯 잡았다가 놓으면 퉁 튕기는 관성이 재미있었다. 이로 물면 한입에 들어오기는 할까.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태건은 발목부터 무릎까지 진하게 입술을 붙여 올렸다.
발가락부터 머리끝까지 하나하나 다 발라먹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태건은 은하의 발을 한 움큼 물었다. 입에 쏙 들어오는 발가락에 잔뜩 침질을 하며 핥자, 자극을 참지 못한 그녀의 발이 오그라들었다.
태건은 그 반항을 가볍게 제압하고 입을 더 크게 벌렸다. 볼이 좁은 은하의 발이 태건의 입에 쑥쑥 들어갔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