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뭐?”
젖어 있는 그녀의 눈빛에 담긴 함의를 태건은 바로 눈치챘다. 뜨거운 무언가가 속에서 용솟음치고 올라왔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담벼락으로 가려져 있다고 해도 엄연히 야외였다. 하지만 은하는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슬쩍 훔치며 태건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은하의 모습을 태건은 조용히 눈에 담았다. 하얀 셔츠가 비에 젖어 그녀의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슬쩍만 봐도 침이 고이는 몸매였다.
툭. 태건의 어깨에 슬쩍 손을 댄 은하가 각진 그의 턱에 가만히 제 입술을 갖다 대었다. 뚝뚝 흐르는 빗물이 그녀의 입술을 타고 다시 목선으로 흘러내렸다.
“설은하.”
“하자. 그저께 너 못 했잖아.”
달칵. 한 손으로 태건의 허리띠를 풀어낸 은하가 눈빛으로 탈의를 종용했다. 하지만 태건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해 줄게. 넌 그냥 받기만 해.”
은하는 잔뜩 굳어 있는 태건의 입술에 슬쩍 혀를 할짝대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목을 끌어안더니 입을 맞추며 혀를 집어넣으려 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태건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은하의 어깨를 잡고 입술을 떼어냈다.
“들어가서 해. 내가 먼저…….”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응?”
빗물로 푹 젖은 은하가 애원하듯 고개를 들어 보았다. 애틋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태건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도 온몸에는 열이 홧홧했다.
말없이 꿀렁거리는 목울대가 긍정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는지, 은하는 다시 태건의 입술에 제 입술을 묻었다. 꾹 다물려 있던 태건의 입이 벌어졌다.
“읍!”
뜨거운 혀가 서로 얽히고 매끈한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완전히 삼켜 버릴 듯 덮쳐오는 그녀의 입술에 태건은 그야말로 등줄기에 쾌감이 내달렸다.
“하아, 하아…….”
입술을 떼자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태건은 숨기지 않았다. 할짝할짝, 은하는 일부러 소리를 내며 그의 입술을 핥았다.
“아, 설은하…….”
“좋아?”
속삭임처럼 들리는 은하의 목소리에 태건은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얽었다.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는 것이 쾌감을 참기 힘든 듯했다.
“좋아. 조금만 더…….”
태건에게 완전히 밀착한 은하가 다시 그의 입술을 덮었다. 그의 타액이 립밤처럼 그녀의 입술에 발리고, 잠시 후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빨간 혀가 튀어나와 그것을 훔쳐 냈다.
은하는 피가 몰려 새빨개진 태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제 얼굴을 쓰다듬으며 여기저기 버드키스를 날리는 은하의 모습에 태건은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가 없었다. 촤르륵, 거친 그의 손길에 은하의 셔츠 단추가 모조리 공중으로 흩어졌다.
“어쩌자고 이래. 이렇게까지 흥분시키면……, 진짜 어쩌라고.”
“해 주기로 했잖아.”
척척한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 버리고, 은하는 태건을 올려다보았다.
“해 봐.”
은하의 앞에 태건이 바짝 다가섰다.
“하아, 씹…….”
아까의 키스로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원한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은하의 모습이 너무 야했다. 자극이 심한 장면에 눈을 감아 보았지만, 차근차근 밟아 온 흥분이 조금씩 응축되고 있었다.
“정말 해도 돼?”
흥분에 어린 태건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은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태건은 그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비에 푹 젖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신경이 쓰였다.
“그럼 들어가자. 피임을 해야…….”
“그냥 해 줘.”
“……뭐?”
“피임 수술 받았으니까. 얼른.”
얼빠진 듯 저를 보는 태건을 빤히 응시하며, 은하는 옷을 다 벗어 던져 버렸다. 가라앉지 않은 태건의 흥분된 몸이 반응했다.
“너 진짜…….”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갑갑하게 저를 옥죄이고 있던 옷을 벗은 태건은 은하의 다리 한쪽을 제 허리에 감고 몸을 겹쳤다.
“아, 차태건!”
“하아, 힘 좀 풀어 봐.”
강하게 몰아쳐오는 힘에 그를 끌어안은 은하의 팔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한테 매달려.”
은하를 끌어안은 채 태건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차양이 드리워진 곳으로 몸을 피하자 그들의 몸을 때리던 빗줄기가 사라졌다.
“하, 하아……. 너 너무 거칠어.”
태건을 바라보는 은하의 눈이 쾌감으로 흐려져 있었다. 그녀의 오금을 팔에 걸친 태건은 저를 더 꼭 끌어안게 한 뒤, 천천히 몸을 더욱 겹쳤다.
“아, 아아……! 차태건. 하아.”
눈을 감은 은하의 숨결이 단단한 어깨 근육 위에서 바스락거렸다. 점점 뜨거워지는 열기에 태건은 제 몸을 더 흉포하게 겹치기 시작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끙끙거림이 점점 피치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나, 나 너무 좋아. 미칠 것 같……, 아!”
무지막지한 힘에 은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태건을 끌어안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단단히 옭아맨 사이로 부드러운 그녀의 몸이 느껴졌다.
“아, 아읏! 아!”
얕은 쾌감을 느낀 은하의 몸이 떨려왔다. 제 목을 꼭 끌어안은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은하를 안고, 태건은 거실 안으로 황급히 들어섰다. 문 하나의 차이가 뭐라고 바깥과는 온도가 확연히 달랐다.
조심스럽게 소파에 은하를 앉히고 몸을 뒤로 물린 태건은 마른 수건으로 살짝살짝 그녀의 몸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좀 추웠는지, 매끈한 살결에 닭살이 조금씩 돋아 있었다.
“잠깐만 있어. 욕조에 물 좀 받아 올게.”
“어디 가. 너 아직 안 했잖아.”
아직 흥분해있는 그의 몸을 보며 은하가 힘없이 물었다. 태건은 별일 아니라는 듯 젖은 그녀의 머리를 귓가에 꽂아 주었다.
“너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 그리고 아무리 피임 수술을 받았다고 해도 위험해.”
“…….”
피임이고 뭐고, 밖에서는 있는 대로 몰아붙였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은 지켜야 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더 곤란해지는 건 설은하니까.
“앉아.”
“어?”
태건이 제대로 반응도 하기 전, 은하가 그를 소파에 밀치고 바로 그의 위로 올라앉았다. 윽, 갑자기 한 것이 벅찼는지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아찔해 보였다.
“뭐 하는 거야.”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착한 척하니?”
“…….”
왜인지 화가 좀 난 듯 보이는 설은하가 태건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몸을 위로 올렸다가 다시 겹쳤다. 가뜩이나 잔뜩 흥분되어 있던 몸은 강한 자극에 움찔거렸다.
“내가 하라고 하면, 읏, 그냥 하는 거야. 괜히 아껴 주는 것처럼 굴 게 아니라. 읏…… 알, 겠어?”
중간중간 올라오는 흥분을 애써 삼키며 은하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그를 안은 팔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하아, 넌 진짜 사람을 돌게 해, 설은하.”
짙은 한숨을 내쉰 태건이 그녀를 번쩍 들어 소파에 눕혔다. 순식간에 반전된 자세에 놀란 것도 잠시, 저를 사납게 짓누르는 그의 힘에 은하의 눈이 둥그레졌다.
태건은 처음부터 힘 조절 따위는 없이 거칠게 몸을 겹쳤다. 잔뜩 느끼는 은하의 모습을 보자 또다시 머리가 핑 돌았다. 피임을 하지 않아 바로 전해져 오는 쾌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거……, 위험한 거 같아. 어, 진짜 위험해.”
은하의 얼굴이 쾌감으로 일그러지자, 태건은 더 큰 쾌감을 주기 위해 몸을 떼어 냈다.
“읍, 읍…… 하!”
입을 막고 신음을 참던 은하는 갑자기 몸에 느껴지는 얕은 통증에 기어이 소리를 내질렀다. 안 그래도 잔뜩 느끼고 있는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물고 핥으며 자극하고 있었다. 잔인할 정도로 몰아치는 쾌감에 몸서리를 치자, 태건이 은하의 귓가에 입술을 딱 붙여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음 참지 마.”
“읍, 으읍.”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까. 다 뱉어.”
“아, 으으……아, 안 돼. 아! 아아!”
입을 벌린 채 고개를 흔들어 대는 은하를 보며, 태건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몸을 겹쳤다.
“아, 하아, 차태건! 아악!”
“아, 하아, 씨발, 으윽!”
몰아치던 움직임이 불시에 멈추고, 거실을 울리던 야릇한 소리도 모두 증발되었다. 헐떡거리던 은하의 숨소리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어어…….”
잔뜩 굳어 끅끅거리는 은하의 숨소리에 태건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안색을 살폈다. 완전히 갈피를 잃은 그녀의 눈빛이 허공을 헤매듯 부유하고 있었다.
“괜찮아?”
“…….”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의 얼굴이 그의 가슴을 하늘에서 바닥으로 뚝 추락시켰다. 평소와는 다른 그 모습에, 태건은 경직된 몸 위로 쉴 새 없이 제 손을 쓸어내렸다.
“설은하. 정신 차려 봐. 은하야.”
태건의 앞에서 언제나 당당하기만 하던 은하는 지금 이 순간 몹시 무력해 보였다. 극한의 관계로 말미암은 쾌감의 결과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겠으나, 혼몽한 표정으로 태건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서글프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