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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앤 라이-13화 (13/58)

13화.

태건은 은하를 끌어안고 제 품 안에 단단히 가두었다. 제대로 바르작거리지도 못하는 은하의 미약한 힘에 가슴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그득 들어찼다.

몇 분이나 그러고 있었을까. 단단하게 얽매인 태건의 등 뒤로 약한 힘이 툭 내려앉았다.

“……괜찮아.”

“…….”

“너무 좋아서 그런 거니까……, 겁먹지 않아도 돼.”

바보야. 희미하게 미소 짓던 은하가 멍한 태건의 얼굴을 감싸 품에 안았다. 연하게 풍기는 그녀의 살 냄새를 콧속 가득 들이켜며 태건은 안도감에 눈을 감았다.

“하아.”

숨이 넘어갈 듯 굴면서도 오히려 저를 먼저 걱정하는 그녀를 보며, 태건은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설은하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지키지 못할 결심이었다.

* * *

“피임 수술, 진짜 한 거야?”

“왜? 걱정돼?”

“그게 아니라. 몸에 안 좋은 거 아닌가 해서.”

쪼르륵, 은하의 종아리를 따라 흐른 물이 그대로 물소리를 내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받아 놓은 태건이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주물러 주는 중이었다.

“딱히 그런 건 없어. 나 같은 경우엔 생리통도 거의 사라졌고.”

“아.”

“무엇보다 책임 못 질 일 만드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씩 웃으며 저를 보는 표정은 여느 때와 같았다. 이래도 저래도 다 상관없다는 얼굴. 하지만 태건은 그 표정에서 미세한 뒤틀림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그의 말을 끊기라도 하듯 은하가 몸을 일으켜 태건의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근데 넌 진짜 큰일이다.”

“어?”

“쓸데없이 다정한 구석이 너무 많아. 그럼 사람들한테 이용당하기 딱 좋은데.”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이용당한 적도 없고.”

“아닌데? 너 완전 사기 치기 좋은 얼굴인데?”

“그런가. 그럼 나중에 한번 쳐 봐. 속아 줄게.”

별스럽지 않게 웃는 태건을 보며 은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돼? 진짜 내가 너 크게 한번 속여 먹어도 돼?”

“할 수 있으면.”

“뭐야, 재미없어.”

흥미를 잃었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은하의 모습에 태건은 괜히 가슴이 찔렸다. 지금 널 속이고 있는 건 나거든.

“나중에 걸리더라도 한 번은 봐줄게.”

실은 찔려서 그런 거면서 인심 쓰는 양 태건은 말을 흘렸다. 그런 태건이 재미있다는 듯 은하가 욕조에 팔을 괴고 지그시 웃어 보였다.

“그래, 고마워. 약속 꼭 지켜야 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태건은 은하의 발바닥 밑 움푹 들어간 부분을 꾹꾹 눌렀다. 마치 그렇게 해야 죄책감이 덜어진다는 듯이. 완전히 털어 버리기로 한 그 감정이 왜 불쑥 솟아오른 것인지. 정말 몸 정이라는 게 들어 버린 건지. 태건은 머릿속이 복잡해 그저 손에 힘만 주었다.

“다 챙겼어?”

“어. 은수 언니 건 진짜 안 챙겨도 돼?”

“놔둬. 자기가 직접 챙기는 게 더 나을 거야.”

“그래.”

정오가 되어 두 사람은 서울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은하가 푹 쉬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약혼자도 없는 이곳에 하루 더 머무른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보일 일이었다. 물론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가 맞지만, 아직 누구에게 들킨 건 아니니까.

“아, 잠깐만.”

“응?”

“이거.”

은하의 머리카락을 잠깐 들춘 태건이 그녀의 귀밑에 멀미약을 붙여 주었다. 손가락으로 촉감을 느껴 보던 은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뭐야?”

“미리 붙였어야 했는데 까먹었다. 가자.”

짐을 들고 먼저 나서는 태건의 뒤로 은하의 미소가 따라붙었다. 저 몹쓸 놈의 성격.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다.

* * *

“태건 씨,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효주 씨도 잘 지냈죠?”

“이제 좀 어색하지 않을 때도 되지 않았어? 누누이 말하지만, 너희 스물여섯이라고.”

두 사람을 보는 은하의 입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8월 들어 날이 본격적으로 더워지면서 태건의 생활에도 자잘한 변화가 생겼다. 일단 정윤오가 해외로 가 버린 것. 별장에 갔다가 새벽에 서울로 올라간 그는 다음 날 바로 비행기를 예약해 여행을 가 버렸다.

정은수는 학교에 일이 있다는 핑계로 매일같이 혼자 집을 나섰다. 딱히 태건이 동행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태건도 본의 아닌 장기 휴가를 받은 셈이었다.

이상하게 여름만 되면 비수기에 접어든다는 은하도 걸핏하면 제 친구의 책방에 걸음을 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태건은 은하가 일주일에 두세 번, 효주 대신 책방을 봐줄 때마다 그곳에 들러 시간을 보냈다.

그렇다고 매번 잠자리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은 은하가 추천해 주는 책을 하루 종일 살펴볼 때도 있었고, 그러다 졸리면 바로 집으로 가 버리기도 했다.

매번 들를 때마다 샌드위치 같은 간단한 먹거리를 사 들고 갔던 태건은 오늘은 빈손으로 오라는 은하의 말에 그대로 가게에 들렀다. 도착하고 보니 이제 비로소 바쁜 일이 끝났다며, 그동안 가게를 봐준 은하에게 효주가 한턱내는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술 좀 해요?”

“적당히요. 딱 즐길 정도로만.”

“아, 완전 주당의 대답인데.”

책방 근처에 있는 수제 맥줏집에 들른 세 사람은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부터 먼저 주문했다. 안주는 저녁 요기 삼을 수 있는 걸로 여러 개 시켜 놓으니 적당히 배도 부르고 좋았다.

“이번에 또 책 내는 거예요?”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멋있어요. 나오면 꼭 살게요.”

“아이구, 감사합니다.”

재미없는 만담처럼 오가는 둘의 대화를 은하는 계속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가. 태건은 오늘따라 유독 밝아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괜히 같이 들떴다.

“아, 엄마다.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휴대폰을 들고 사라지는 효주를 잠시 보다, 은하를 돌아보았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던 그녀는 태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머쓱해지는 기분에 태건은 괜히 제 얼굴을 한 번 만졌다.

“왜? 뭐 묻었어?”

“아니.”

“근데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어떻게 보고 있는데?”

“그냥…….”

사랑스럽다는 듯이.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태건은 불쑥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개지진 않았겠지. 끝에 열이 몰린 것 같긴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은 듯했다.

“맥주 맛있다.”

괜히 다른 말로 딴청을 피우는 태건에게 은하는 별말을 붙이지 않았다. 태건은 저를 향한 그녀의 시선이 느껴짐에도 벌컥벌컥 맥주만 들이켰다.

“차태건.”

“어?”

“너 잘생겼다.”

“뭐……래.”

갑작스러운 말에 태건은 말문이 막혔다. 얘가 취했나.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더 실실 웃는 게 흐트러져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태건은 왠지 아무 말이나 내뱉고 싶어졌다.

“나 조만간 일 그만둘지도 몰라.”

“응?”

툭 나온 얘기에 은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괜히 어색하게 맥주잔을 매만지던 태건은 횡설수설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그, 원래 휴가 끝나면 공부 시작해 볼까 하기도 했었고, 이제 나도 다른 길 찾아봐야 할 것 같아서.”

“아, 잘됐네.”

아직 정확히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런저런 마음만 먹었을 뿐, 뭘 어떻게 언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근데 이상하게 설은하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심 이런 말을 해 줄 거라 기대했는지도.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는 건, 제게 향한 시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응원과 힘을 주는 눈빛, 차태건이 진짜 잘되기를 바라는 어떤 바람. 이유는 몰라도 설은하는 그런 느낌을 온몸으로 풍기고 있었다.

“아, 여사님 잔소리.”

고개를 흔들며 돌아온 효주로 인해 둘 사이에 맴돌았던 미묘한 공기는 풀어졌다. 물론 태건 혼자만의 미묘함이었지만.

은하는 평소보다 더 웃었고, 태건은 그런 그녀를 보는 게 좋았다. 꽤 평화로운 여름밤이었다.

* * *

“똑바로 좀 걷지?”

“똑바로 걷고 있는데?”

“두 번만 똑바로 걸었다간 전봇대랑 키스할 거 같은데.”

확실히 오늘 설은하는 과음을 했다. 딱히 기분 나쁜 일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놓이면서도, 이러다 집에 가서 야단맞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아무래도 집에 이런저런 사정이 좀 있는 인물이니까.

밤 10시쯤 헤어져 택시를 탄 태건은 은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려 했지만, 왠지 그녀는 대로 앞 골목에 차를 세워 달라고 떼를 썼다. 골목을 올라 집까지 십 분은 더 걸어가야 하는데도, 막무가내였다.

“오늘 뭐 좋은 일 있었어?”

“좋은 일이라……. 있었지.”

앞서 걸어가던 은하가 뒤를 홱 돌아보더니 갑자기 만세를 불렀다. 사람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하. 갑자기 왜 그래.”

당황스러워하는 태건의 표정에, 깔깔거리던 은하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쪽 붙였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밝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다시 멀어졌다.

“설은하.”

“미안. 내가 오늘 진짜 기분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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