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은하를 만난 이후 이렇게까지 업 된 모습을 본 적 있었는가 생각해 보면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웃는 게 기본이지만, 입꼬리만 슬쩍 올리는 예의상 표정일 뿐. 이렇게 활짝,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뭔지는 몰라도 진짜 기쁜 일인가 보네.”
“응. 말해 줄 수 없어서 미안. 근데 지인짜 좋은 일이야.”
소리 없이 다시 만세를 부르는 은하의 모습에 태건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저렇게 상쾌하게 웃을 수도 있구나. 은하가 달리 보이는 순간이었다.
“아……. 벌써 다 왔네.”
아쉬운 듯 제 집을 쳐다보던 은하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제 내가 데려다줄까?”
“됐어. 그만 들어가.”
“왜. 내가 데려다줄게. 가자.”
“기분 좋을 때 이불 속에 들어가. 그래야 좋은 꿈 꾸지.”
“오, 똑똑한데? 그럼 사양 않고.”
계단에 올라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게 팔을 벌리며 인사를 하던 은하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황급히 그것을 잡아 주던 태건의 얼굴과 은하의 얼굴이 가까이 붙어 섰다. 반짝거리는 은하의 눈동자가 태건의 마음속에 쿡 박혔다.
“차태건.”
“응?”
“지금 기분 같아선 너한테 진짜 죽여주는 잠자리를 선물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지 않을래.”
“…….”
“그냥……, 이 기쁨만 가져가. 그리고 너도 좋은 꿈 꿔.”
일렁이는 눈빛으로 은하는 뜨거운 입술을 태건의 이마에 깊게 묻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얼이 빠진 듯한 그를 뒤로하고 선뜻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은하가 사라지고 삼십 분이 흘렀지만, 태건은 발길을 쉽게 돌리지 못했다. 홧홧하게 찍힌 낙인처럼 이마에 남은 열기가 그의 곁을 쉬이 떠나지 않았다.
‘아! 근데 너 잘나가다가 존나 클리셰로 돌아서는 거 아니지?’
순간, 놀리듯 저에게 향했던 정윤오의 말이 떠올랐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겨우 나뭇잎 몇 개만 흔들 정도로 미약한 여름 밤바람에, 마음속에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던 어떤 작은 추가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하아.”
자그마하게 벌어진 입 안에서 한숨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혼란에 빠진 태건의 시선이 오랫동안 허공을 헤맸다.
* * *
“……래서 내가 알겠다고 했는데……. 건아.”
“…….”
“건아!”
“어, 어?”
화들짝 놀라는 태건의 모습에 그를 보던 정은수의 눈가가 장난스럽게 휘었다.
“요거, 요거.”
“왜?”
“너 요즘 연애하지?”
“뭐? 아니야.”
“아니긴. 완전 맞구먼. 누구야? 누구야?”
“아, 왜 이래.”
옆구리를 찌르는 정은수의 공격에 태건이 움찔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답지 않게 당황하는 그의 모습에 정은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엄청 빠졌나 보네. 너 표정 장난 아니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태건은 벤치에 놓여 있던 수건을 들어 거칠게 땀을 훔쳐 냈다. 실은 운동하는 내내 활짝 웃던 은하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미칠 것 같던 참이었다.
“하…… 흠…….”
놀릴 거리 하나를 찾은 듯,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리는 정은수의 표정에 태건이 괜히 팔을 들어 마무리 스트레칭을 했다. 그러고는 대충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뒤돌아섰다.
“나 들어간다.”
“이게 어딜 도망가려고. 너 솔직히 안 불어?”
도망가는 태건의 옆구리를 정은수가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하지 마, 귀찮다는 듯 떼어 내려는 그를 피해 겨드랑이 사이에 머리통을 들이밀 때였다.
끼익, 대문이 열리면서 여행 가방을 든 정윤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푹 쉬고 오겠다더니, 도대체 뭘 하고 지낸 건지 완전히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보기 좋네?”
딱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본 정윤오의 입가에 비소가 떠올랐다.
“내 조건 까먹었냐?”
“…….”
“정은수랑 붙어먹기 전에 설은하부터 떼어 내는 게 먼저라고.”
“…….”
“어이, 차 기사. 말 좀 해 봐?”
리클라이너 소파에 푹 파묻힌 정윤오가 날 선 말투로 쏘아붙였다. 목소리는 한껏 뾰족하면서도, 얼굴은 몹시 피곤해 보여 태건은 걱정부터 되었다.
“얼굴이 왜 그래. 그동안 뭘 하고 지낸 거야.”
“말 돌리지 말고, 씨발. 너 안 되면 다른 사람 시킨다고.”
정윤오의 제안에는 모순이 있다. 약혼을 깨고 싶으면 자기가 깨면 된다. 아버지랑 반목하기 싫어서? 글쎄. 지금껏 수도 없이 반복해 온 갈등이니, 이번 한 번 더 추가된다고 해서 딱히 바뀔 건 없다. 근데 굳이 그러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정윤오는 여기서 뭘 보고 싶은 걸까.
“굳이 다른 사람 알아볼 거 없어. 내가 알아서 해.”
결국 태건은 정윤오가 원하는 말로 그의 입을 막았다. 그의 마음이 뭔지는 끝에 가서 확인하면 될 테니.
“그래, 나가 봐.”
힘없이 손을 젓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태건은 정윤오의 방을 나섰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정은수에게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뭐든,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 * *
―이번 주 일요일에 시간 있어?
“일요일? 광복절?”
―응. 우리 안 한 지 너무 오래됐잖아. 명색이 서로의 잠자리 상대인데.
“하.”
잠자리 상대라는 게 결코 흔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가벼운 말투로 내뱉으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설은하에게는 무거운 일을 가볍게 느껴지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별일 없어. 일요일까지는 정윤오도 쉰다고 했으니까.”
―그래. 그럼 1시에 보자. 멋있게 입고 나와야 해. 소개시켜 줄 사람 있으니까.
“소개시켜 줄 사람? 누군데?”
―있어. 그날 말해 줄게. 아! 그리고 준비하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어.”
―뭐야? 살짝 귀띔해 줄 수 있어?
“나도 그날 말해 줄게.”
―치, 갈수록 밀당을 하네. 알았어. 그날 봐.
“어.”
전화를 끊은 태건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맴돌았다. 겨우 몇 분의 통화로도 여운이 길게 남았다.
다음번 만남에는 태건이 키워드를 준비하기로 했다. 꼭 행위로 이어지지 않고 말로만 푸는 것도 쳐주기로 했기에, 그는 부담스럽지 않게 어렸을 때의 판타지 따위를 풀어 낼 생각이었다.
똑똑. 잠시 후 들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에 태건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부친은 태건의 앞에 서류 봉투를 하나 내려놓았다.
“지난번에 말했던 거. 일단 찾아가서 상담 받고, 일정 확인하면 된다는구나.”
“아. 네, 알겠어요.”
지난번 아버지가 알아봤다던 대학교에 대한 자료였다. 뭉툭한 손끝으로 준비했을 자료가 괜히 머쓱했다.
태건이 처음 유도를 그만뒀을 때,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늦게라도 공부를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에 그랬던 건데, 문제가 있다면 공부할 때 태건의 집중력이 운동할 때를 못 따라간다는 것이었다.
“아빠 닮았으면 공부 머리가 좀 있을 텐데 어째 글이라고는 도통 읽지를 못하니…….”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아버지를 보며 태건은 태연스레 답했다.
“저 올해에 책 두 권이나 읽었어요.”
물론 그림 70퍼센트, 글 30퍼센트인 책이지만.
“네가?”
“네. 친구를 잘 사귀어서.”
아버지의 얼굴이 어찌나 놀란 표정인지 태건이 되레 민망했다.
그래, 그렇게만 해라. 어깨를 두드리는 아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게 웃기기도 허탈하기도 해, 태건은 결국 크게 웃어 버렸다.
* * *
―뭐 입었는데?
“검은색 슬랙스에…… 하얀색 셔츠?”
검사를 하듯 묻는 은하의 은근한 목소리에 태건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올렸다. 멋있게 입는 건 모르겠고, 가장 무난한 것을 골랐는데 괜찮은 걸까. 다행히 은하의 목소리는 밝았다.
―뭐든 운동복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름 신경 썼네?
“도대체 누굴 만나는 건데 그래.”
―이따 말해 준다니까.
조금 있다 만날 건데도 두 사람은 또 통화를 했다. 이쯤 되니 그저 잠자리 상대가 아니라 진짜 연애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늦으면 안 돼.
“알았어. 이따 봐.”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하는 바람에 아예 한 시간 전에 약속 장소로 가 있을 생각이었다. 혹시 모르니 정윤오의 차는 그대로 두고, 일찌감치 택시를 타고 강북으로 움직였다.
약속장소인 카페에 도착해 효주의 책방에서 산 문고집을 펼쳐 들었다. 세상에, 카페에서 책을 읽는 차태건이라니. 예전의 저를 아는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본다면, 눈알을 빼서 물에 씻고 다시 끼웠을 일이었다. 그만큼 태건의 눈에도 창에 비친 제 모습이 희한했다.
위이잉. 품속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태건의 시선이 무심코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삼십 분 남은 걸 보면 은하가 미리 도착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은하가 아니었다.
―너 어디야.
사정없이 갈라진 정윤오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
―정은수랑 같이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대답이나 해! 정은수랑 같이 있냐고!
쨍그랑! 뭔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태건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