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무슨 일이야.”
―정은수가 연락이 안 돼.
“정신 차리고 똑바로 말해. 은수가 어딜 갔는데.”
―내가 꿈을 꿨는데…… 정은수가, 씨발. 눈앞에서 알짱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정윤오.”
―어떡하지. 야, 태! 정은수 좀 찾아봐. 어디 갔지? 씨발, 이게 어디 갔지.
혼란스럽기만 한 정윤오의 목소리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전화를 끊은 태건이 정은수에게 통화를 돌려 보았지만 이미 전화기는 꺼진 상태였다.
“후우, 누가 있더라.”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마친 태건은 전화번호부를 뒤져 그동안 정은수의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연락처를 모두 찾았다. 하나하나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누르던 태건은 정은수와 함께 있지 않다는 지인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계속해서 전화를 돌리는 그의 입에서는 한숨이 끊이지 않았다.
“소현 누나, 저 차태건인데요.”
―하아…… 전화 잘했다.
한숨부터 내쉬는 여자의 반응에 태건은 가슴속에 놓여 있던 돌덩이가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여기 병원이야. 은수 쓰러졌어.
정은수가 쓰러졌다는 말에 태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섰다. 마침 건너편에 있던 은하가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지만, 태건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다급히 택시에 올라탄 태건이 사라지고, 그 뒤를 좇는 은하의 멍한 표정이 오랫동안 길에 남았다.
* * *
“정은수.”
“……건아.”
“하아.”
파리하게 질린 입술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를 보여 주는 듯했다. 장장 두 시간 동안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었다던 정은수는 점점 극복해 가고 있었던 폐소 공포증을 이기지 못해 다시 병원으로 실려 들어왔다.
“정윤오랑 무슨 일 있었어? 맞았어?”
정은수의 입술 한쪽에 피딱지가 붙어 있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 왼쪽 손목에 멍이 들어 있는 것도 확인한 참이었다.
“그런 거 아냐. 괜히 내가 또 들쑤셔서 난리 한번 친 거지, 뭐.”
“후.”
정은수가 폐소 공포증을 가지게 된 이유는 정윤오 때문이었다. 그 일은 태건이 유도를 그만두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정은수의 인생을 조져 주겠다고 선언한 정윤오는 그녀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유도 특기생으로 빠져야 했던 태건은 다른 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그때가 세 사람이 유일하게 떨어져 있던 기간이었다.
태건은 몰랐지만, 그 시기는 정은수를 향한 정윤오의 괴롭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그리고 태건이 고 2가 되었을 때 그 일이 일어났다.
하는 게 매일 먹고 운동하고 자는 것밖에 없었던 태건은 일과를 끝내면 꼭 정은수의 학교까지 걸어가 그녀를 기다렸다. 정은수가 수험생이라 늦게 끝나는 게, 그래서 그녀를 데리고 집에 함께 돌아올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어느 날 학교 앞에서 정은수를 기다리던 태건은 해도 해도 보이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집으로 돌아갔다. 전화도 받지 않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오늘은 피곤에 지쳐 먼저 조퇴라도 했겠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씻고 잠자리에 들려던 그때, 태건은 왠지 모를 느낌에 잠을 설쳤다. 정말 근거 없는, 막연한 불안감이 곁든 것이었다.
결국 다시 마당으로 나간 태건은 은수의 방 창문을 한참 올려다보았다. 정윤오한테 전화라도 해 볼까. 지문이 닳도록 휴대폰을 문지르고 있을 그때였다. 위이잉, 진동이 울리면서 이제는 낯설어진 중학교 동창의 이름이 화면에 떴다.
‘어, 재섭. 웬일이야?’
―야, 건아. 혹시 은수 누나 집에 왔냐?
‘뭐?’
평소에 아무 접점 없었던 재섭이 정은수에 대해 묻는 게 이상했다. 뭔가 머뭇거리는 그의 기색에 태건은 최대한 침착하게 목소리를 냈다.
‘아직 안 들어온 거 같은데.’
―진짜? 아씨, 그럼 아직도 거기 있는 거 아냐.
‘거기?’
―그게 사실은…….
그동안 제가 안 보는 곳에서 정윤오가 얼마나 악랄하게 정은수를 괴롭혔는지,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을 털어놓는 동창생의 말에 태건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아무리 그래도, 누나잖아.
‘그래, 연락해 줘서 고맙다.’
전화를 끊자마자 태건은 정은수의 학교로 달려갔다. 굳게 잠긴 교문을 보다 가볍게 담장을 넘고, 동창생이 말한 체육 창고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허름한 창고에 어울리지 않는 반짝거리는 자물쇠가 예쁘게도 잠겨 있었다.
‘씨발.’
집에서 챙겨 온 연장으로 자물쇠를 딴 태건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매트 위에 쓰러져 있는 정은수를 발견했다. 오들오들 떠는 몸에는 열이 올라 있었고, 저를 안아 드는 태건이 누군지도 못 알아볼 만큼 의식도 가물가물했다.
그대로 정은수를 들쳐 업은 태건은 택시를 잡아타고 바로 응급실로 향했다. 처음부터 구급차를 부를 생각은 없었다. 학교에서 이런 일로 소문이 나면 정은수에게 어떤 굴레가 씌워질지 모르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조용히 처리한 후, 태건은 정은수가 의식을 차릴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다. 황급히 달려온 정호승과 오진주도 그날만큼은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새벽 5시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태건의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건아,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음성에 태건은 제 인내심이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건아!’
집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본관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고, 제 방 안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앉아 있던 정윤오를 죽기 직전까지 팼다는 것 말고는. 그렇게 처맞으면서도 정윤오는 반항 한번 하지 않았다. 차라리 맞고 있는 게 편하다는 듯 시원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또라이 새끼. 그냥 죽어, 이 새끼야.’
정호승은 정윤오를 무참히 폭행한 태건을 고소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건은 스스로 유도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정윤오의 곁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기사 겸 경호원으로, 친구 겸 감시원으로.
남들이 보면 한심하다 생각할 수 있는 태건의 현재 삶은 단순히 정윤오의 제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 주먹에 쓰러진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 그럼에도 또 정은수를 향해 히스테리를 부릴 것에 대한 불안함. 이 모든 것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나 때문에 데이트 망쳐서 어떡해?”
“어?”
“너 여자 친구 만나다 온 거 아냐?”
“아…….”
사실 아까 걸려온 설은하의 전화를 무시한 참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전화는 세 번 이상 울리지 않았고, 태건은 정은수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세 시간 동안 은하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빨리 전화해 봐.”
“내가 알아서 해.”
“건아.”
“일단 쉬어.”
정은수의 말을 끊고 응급실을 벗어났다. 답답한 마음에 단추를 몇 개 끌러 내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늦으면 안 돼.’
몇 번이고 다짐하던 은하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휴대폰에 떠 있는 이름에 몇 번이고 손이 갔지만 결국 통화 버튼은 누르지 못했다.
* * *
“정은수.”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리한 안색으로 앞을 올려다본 정은수가 저를 보고 있는 정윤오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잘 잤어?”
“어디 갔었어.”
“올라가.”
“삼 일 동안 어디 갔었냐고!”
“얼른.”
정윤오의 말을 자른 태건이 정은수를 직접 부축해 2층으로 올라갔다. 형형한 정윤오의 눈빛이 태건의 손길이 닿은 곳에 가닿았다.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푹 쉬어. 당분간 정윤오랑 마주치지 말고.”
“응. 네 말 들을게.”
이번엔 자신도 좀 지쳤다며, 정은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잡고 눕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주고 태건은 밖으로 나왔다. 밖에 서 있는 정윤오를 일별한 그가 짧게 입을 열었다.
“나와.”
마당 한편에 정윤오를 불러낸 태건은 그가 오자마자 다짜고짜 그의 팔뚝 소매를 걷어붙였다. 사납게 인상을 찌푸린 정윤오가 그런 태건의 손을 팍 뿌리쳤다.
“씨발, 뭐 하는 거야!”
“너 약 했어?”
“뭐?”
“여행 간다더니 얼굴은 떡이 돼서 돌아오고, 있는 히스테리 없는 히스테리 다 부리고. 뭐가 문제야?”
“차태건.”
“넌 진짜, 하아…… 진짜 도대체 뭐가 문제냐.”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 끔찍한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했고, 아버지의 불륜 상대였던 여자가 새엄마로 들어왔고, 죽고 못 살던 첫사랑이 하필 그 여자의 딸이고, 다 알겠는데. 그게 이렇게까지 자기 파멸로 가야 하는 이유인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정은수가 점점 망가져 가. 네 눈엔 그게 안 보여?”
처음 정은수를 보았을 때, 그녀는 온 세상의 햇살이 저에게만 비친 듯 밝은 빛을 머금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윤오의 어둠에 야금야금 먹혀 저도 모르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뭐라는 거야, 씨발.”
이를 꽉 깨물고 흘리는 정윤오의 말에 태건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도 네 맘대로 안 되겠지. 그러니까 그런 엿같은 제안이나 한 거겠지.
“약혼만 깨면 되는 거지.”
“……뭐?”
“네 약혼식 깨지는 날, 나 정은수랑 바로 비행기 탈 거야. 나머지는 네가 다 알아서 해.”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감정이 무엇이든, 더는 파멸로 가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사람이 살고는 봐야 하지 않겠는가.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저도 좀 살기 위해 태건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했다. 은하를 만나러 가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