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은하 왔어?”
“언니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먼저 들어가 있어. 나도 금방 갈게.”
“네.”
짧게 태건을 일별한 은하는 오진주의 잡담에 또 맞장구를 치며 걸음을 옮겼다.
“흠, 은하 오기 전에 일찌감치 내빼려고 했는데. 글렀네.”
“왜?”
“그냥. 괜히 또 마주쳤다가 일 생기면 어떡해.”
두 팔로 어깨를 감싼 정은수가 장난스럽게 몸을 떨었다. 그 모습에 태건은 괜히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아! 정은수가 이마를 감싸고 눈을 흘기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려버렸다.
“정윤오는?”
“또 입 나와서 툴툴대고 있겠지 뭐. 근데 아버지가 은하 되게 마음에 드셨나 봐. 이번엔 진짜 약혼할 거 같아.”
“의외네.”
지금껏 여러 명을 정윤오에게 갖다 붙이면서도 이렇게 집까지 여러 번 초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정윤오가 그래서 더 질색을 하는 건가.
“들어가 봐.”
“그래. 너도 운동 좀 그만해. 근육 징그러워지려고 해.”
“내 여친은 좋다던데.”
헉! 하는 표정과 함께 정은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건은 아령을 들고 더 힘을 주었다. 빈말이 아니라 설은하는 제 근육을 몹시 좋아했다.
* * *
“하루에 몇 시간씩 운동해?”
“시간이 나면 아침, 저녁에 한 시간 반씩.”
“유산소도 같이?”
“주로 근력 위주로 하지. 조깅은 새벽에 동네 한 바퀴 뛰는 걸로도 충분하니까.”
“새벽에? 몇 시에 일어나는데?”
“5시 반.”
“으아.”
사다리에 서서 책장 높은 곳에 책을 꽂고 있던 은하가 질린다는 듯 태건을 내려다보았다. 울근불근한 팔 근육으로 책을 받쳐 주고 있던 태건이 왜 그러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것도 아냐. 이제 다 된 거야?”
“응.”
은하수 책방에 새로운 책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어제 마감을 치느라 한숨도 못 잤다는 효주를 위해 은하는 가게 마감과 책 정리를 대신 해 주겠다며 책방에 들렀다.
무거운 짐을 들어 주기 위해 태건도 함께 동원되었다.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일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시간은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너 나중에 일 그만두면 피티 숍 차려도 되겠다.”
“별로. 남한테 시키는 건 잘 못 해서.”
“딱히 그런 것도 아니면서?”
“어?”
“나한테는 이것저것 잘 시키잖아. 키스해 달라, 꽉 끌어안아라, 만져 달라…….”
“야, 넌! 여기가 바깥이라는 자각이 없냐?”
황급히 말을 끊은 태건이 괜히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이미 장사가 끝난 상태라 아무도 없었지만, 괜히 귀 끝이 화끈거렸다. 사다리 중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은하가 눈꼬리를 올리며 태건을 묘하게 바라보았다.
“넌 가끔 종잡을 수가 없더라. 되게 순진한 거 같으면서도, 정작 본 게임 들어가면 엄청 저돌적이고.”
“운동해서 그래.”
“그건 또 뭐야.”
모든 일의 원인이 운동으로 귀결되는 게 웃긴다는 듯, 은하는 정말 환하게도 웃었다.
“진짜야. 성격은 내성적인데, 정작 실전에 들어가서 내뺄 순 없으니까. 운동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승부욕이 평균 이상이거든.”
“아, 그러세요?”
알겠다는 듯 오버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은하가 제 무릎에 팔을 대고 턱을 괴었다.
“그럼 나랑 내기 하나 할래?”
뭐지, 눈빛이 왜 저러지. 똘망똘망 눈을 반짝이는 게 보통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지금부터 십 분 동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흥분하지 않기.”
“……뭐?”
“네가 이기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네가 내 소원 들어줘.”
“여기서?”
“응.”
문제 있냐는 듯 은하는 어깨를 들썩였다. 끔뻑끔뻑. 태건은 느릿한 시선으로 가게 안을 훑었다. 워낙 작은 가게라 CCTV는 원래 없었고, 장사를 마감하면서 블라인드를 쳐 놓은 지도 오래였다. 하지만 장사하는 곳인데. 나중에라도 효주가 알게 되면 불쾌해할 수도 있고.
“뭐 할 건데?”
“미리 말하면 재미없지.”
“…….”
고민은 됐지만 결국 태건은 본능에 졌다. 누가 이기든 저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은 분명했으니까. 효주는……, 그녀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제가 열심히 흔적을 지우면 될 것이다. 태건은 모든 일이 끝난 후 어떻게 청소를 할 것인가까지 생각해 놓았다.
“그래. 좋아.”
“되게 자신 있는 모양인데?”
“말했잖아. 승부욕. 그리고 십 분 정도야 뭐.”
“오.”
괜히 가슴을 치며 허세를 부리자 은하의 얼굴에 또다시 환한 미소가 퍼졌다.
“이쪽으로 와 볼래?”
다행히 매장 한복판에서 일을 치를 생각은 아니었던 듯, 은하는 가게 안에 딸린 작은 방 안으로 태건을 이끌었다. 거주는 할 수 없어도 가끔 힘들 때 몸을 누일 수 있는 딱 한 평 정도의 방이었다.
“누워 있어.”
러그 하나와 스탠드 조명 하나만 있는 간소한 방 안을 태건은 생소하게 둘러보았다. 스탠드 조명을 켜 조도를 낮춰 놓은 은하는 매장에 다시 나가 불을 끄고 나머지 정리를 한 뒤 들어왔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은하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두께가 얇고 부피가 큰 것이 동화책인 듯했다. 의아하게 보는 태건을 향해 은하가 씩 웃으며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시간 맞춘다?”
타이머로 십 분을 맞춘 은하는 휴대폰을 땅에 내려놓고 태건의 머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동화책을 펼쳐 글씨가 잘 보이도록 스탠드 불빛을 조절했다.
“뭐…… 하는 거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읽어 주던 건데 너한테도 소개해 주고 싶어서.”
“…….”
생각지도 못한 은하의 말에 태건의 눈이 당황스러움으로 일렁였다. 그런 태건의 반응은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 은하는 책을 펴고 나직한 목소리로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태건이라는 아주 큰 고릴라가 살았습니다.”
“설은하.”
“장난이야.”
큭큭거리는 은하의 얼굴이 동화책에 반은 가려져 있었다. 웃음소리가 멈추자 순식간에 묘한 기운이 방 안에 감돌았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제이콥이라는 아주 큰 고릴라가 살았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덩치가 아주 컸던 제이콥은 그 큰 덩치 때문에 쉽게 친구를 사귈 수 없었어요.”
나직한 은하의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들었다. 멋쩍은 기분과 뭔가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 하지만 나른한 기분이 함께 뒤섞여 태건은 그냥 눈을 감고 말았다.
은하가 읽어 주는 책은 제이콥이라는 고릴라와 그의 손바닥보다 훨씬 작은 동박새 핑키가 친구가 되는 내용이었다. 또래보다 덩치가 크고 굼뜨다는 이유로 숲에서 견제를 당했던 제이콥과, 무리에 따르지 않고 허튼 꿈이나 꾼다며 따돌림을 받는 핑키.
우여곡절 끝에 둘이 친구가 되고 행복하게 지내는 걸로 끝이 날 줄 알았던 이야기는, 독수리의 공격으로 핑키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반전을 주었다.
“그때 핑키가 말했어요. ‘제이콥, 너를 위해 저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을 물어다 줄게. 활강할 때의 짜릿함과 오로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을.’”
핑키의 꿈은 아주 높고 먼 하늘을 날아 보는 것이었다. 계절에 따라 무리들과 함께 떼 지어 다니는 철새처럼, 널따란 창공을 아주 길게 비행해 보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동박새 핑키는 높은 고도의 바람을 버텨 낼 힘이 없었다. 조금만 높게 날아도 날개가 흔들리고 숨이 찼다. 그런 그가 어리석다며 가족들과 친구들은 비웃곤 했다.
“‘그러니 기억해. 넌 혼자가 아니야. 외롭다고 느껴질 땐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봐. 내가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제이콥, 넌 혼자가 아니야.’”
넌 혼자가 아니야. 마지막으로 말을 맺는 은하의 목소리가 아주 옅게 떨렸다. 눈을 뜬 태건은 동화책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은하의 손을 천천히 잡아 내렸다.
“설은하.”
그때였다. 바닥에 내려놓은 휴대폰에서 시끄러운 알람이 울려 댔다. 잠시 신경을 뺏겼다 다시 돌아본 은하의 얼굴에는 언제 물기가 맺혀 있었냐는 듯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가 졌네. 소원 들어줄게.”
문득 태건은 오늘의 이 행위가 제 고백에 대한 은하의 대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 빠듯한 것이 가슴에 들어찼다.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정작 애정을 쏟아붓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설은하인데, 이렇게 티를 내고 있는데.
그녀에게 사랑을 퍼부어 주겠다고, 애정을 쏟아붓겠다고 결심한 자신이 몹시 더럽게 느껴져서, 그런 저를 향한 설은하의 마음이 아주 선연하게 다가와서. 태건은 그 순간 몹시 울고 싶어졌다.
“달리자.”
“응?”
의아함을 담은 두 눈이 반짝거렸다. 태건은 그런 은하의 손을 놓칠 새라, 제 손안에 꼭 가두었다.
“허억…… 헉! 뭐 하는, 거야……. 허억…… 헉, 차태건!”
태건은 은하의 손을 잡고 무작정 달렸다. 책방이 위치한 마을의 골목 사이사이를 뛰다가 놀이터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담벼락이 없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크게 한 바퀴 돈 후 후문에 있는 교회 첨탑을 돌고, 큰길가로 내려와 마침 파란불이 켜진 횡단보도를 건넜다.
벅찬 숨을 토해 내는 은하의 보조를 맞추면서도 태건은 절대 뜀박질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