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하, 하아……, 잠깐…… 잠깐만…….”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손을 잡고 뛰어다니는 두 사람을 행인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건은 지친 은하를 그대로 들쳐 업고 저 혼자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침 도로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가 있어, 그는 버스와 경주라도 하는 듯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야! 뭐 해! 차태건!”
은하는 눈을 감고 태건의 목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태건은 제 몸에 전해져 오는 은하의 체온과 무게, 땀, 숨결, 그 모든 것 하나하나를 고스란히 새겼다.
끈적한 여름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헉헉대는 숨소리가 가슴 고동과 함께 울렸다. 폐에 숨이 모자라 토할 것도 같았지만 가슴이 매우 벅찼다. 그러면서 슬펐다. 그리고 좋았다.
“너 완전 미친 거 같아.”
난데없는 여름밤의 질주로 두 사람은 완전히 땀에 절어 버렸다. 하나로 묶었던 은하의 머리는 삐죽삐죽 나와 있었고, 태건의 티셔츠는 목 부분이 헐렁헐렁했다. 겁이 난 은하가 마구잡이로 늘려 댄 탓이었다.
“이게 네 소원이었어? 다짜고짜 달리는 거?”
“아닌데. 그건 아껴 둘 건데.”
은하의 발에서 샌들을 벗겨 낸 태건이 제 무릎에 다리를 괴게 하고 발을 주물러 주었다. 더럽다고 그만하라며 은하가 저어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태건이 은하를 데리고 온 곳은 성곽이었다. 돈이 없어도, 그저 걸을 수만 있으면 서울의 야경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곳.
“이렇게 달려 본 거 진짜 오랜만이긴 하다. 고등학교 때 체육 시간 이후로는 처음인 거 같아.”
“시원하지?”
“아니, 엄청 찝찝해.”
아직도 이마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새침한 눈초리로 태건을 흘기며 은하가 슬쩍슬쩍 땀을 닦았다.
“여기 좋다. TV에서만 봤었는데.”
“서울 올라왔을 때 맨 처음 구경 온 데가 여기거든.”
“그래?”
“어. 그때 무슨 드라마가 유행을 해서. 한번 와 보고 싶었어.”
“은근 감성적이라니까.”
태건이 처음 서울에 올라온 건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할 시기가 됐을 때 아버지가 한번 데리러 왔으나, 그땐 태건이 오기 싫다고 난리를 쳤다.
어쩌면 그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한번 올라오면 다신 내려가기 힘들 것이라는 걸. 그렇게 오랫동안 할머니와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2년 후 할머니의 설득으로 겨우 아버지를 따라 올라온 태건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으로 데리고 와 달라고 떼를 썼다. 짐작건대, 그 이후로 제가 아버지에게 뭔가를 졸라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 집에서 사는 거, 불편하지 않아?”
담담한 말투로 묻는 은하의 표정에 별다른 뜻은 없어 보였다. 잠시 생각을 가늠하던 태건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어렸을 땐 그랬던 거 같은데 지금은 하나도 안 이상해.”
“어떻게 그러지. 난 내 친구랑 그렇게 위아래로 지내면 못 버틸 거 같은데. 일도 그렇고.”
“글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가.”
하하, 갑자기 은하에게서 무람없는 웃음이 튀어나왔다.
“너 되게 우락부락하게 생겨서, 가끔 안 어울리는 말 할 때 있는 거 알아?”
“왜. 사실인데.”
“그러셨어요. 사랑 많이 받고 자라셨어요.”
“어.”
부끄러운 말이긴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할머니는 어딜 가나 ‘내 새끼 최고다’를 외치는 분이었고, 아버지는 오랜 기간 떨어져 살았지만, 그 나름대로 애정을 보여 주었다. 성정이 무던한 태건은 뭉툭한 그의 방식을 잘 이해했다.
“어렸을 때 정윤오네 아버지가 개를 한 마리 데려온 적이 있었어. 되게 작고 까만 개였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포미. 그래, 포미다.”
본격적으로 정윤오의 집에서 살게 된 지 3년 정도가 흘렀을 때, 그때는 정윤오도 태건을 거지 취급 하던 때였다. 제집 계단 밑에 있는 코딱지만 한 창고에 산다고. 자기가 싫증난다고 버린 신발이나 장난감은 다 태건이 주워 쓴다고, 엄청 깐족댔었다.
몇 번 욱한 태건이 혼쭐을 내 주기 위해 주먹을 든 적도 있었지만, 고용인에 불과했던 아버지가 말리는 통에 울분을 참아야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또래보다 덩치가 크고 눈빛이 강한 태건이기에 더 엄하게 통제한 것도 있었다.
“왜 애들은 그러잖아. 강아지든 고양이든, 어렸을 땐 다 장난감 같고. 포미도 그랬어. 처음 데려왔을 때 정윤오나 나나 완전히 눈이 돌았지.”
“…….”
좋은 일을 회상하는 듯 태건의 눈가가 온화하게 휘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은하의 얼굴에도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근데 강아지가 조금 크니까 정윤오보다 나를 더 따르기 시작하는 거야. 밥도 정윤오가 주고, 똥도 정윤오가 치우는데.”
“오.”
“자기 딴엔 억울했겠지. 근데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왔더니 강아지가 없어졌더라고. 알고 보니까 정윤오가 다른 데로 보내 버린 거였어.”
하여튼 또라이 자식, 은하가 흘린 말에 피식 웃음이 새었다.
“좀 창피한 말인데 나 그때 엄청 울었거든. 하룻밤 새 열이 40도까지 오를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뭐.”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방학 때 할머니한테 내려갔는데, 마당에 개 한 마리가 놀고 있는 거야. 엄청 크고 새까만 개.”
“…….”
“정윤오가 개 버리라고 시킨 사람이 내 아버지였거든.”
“아.”
“가만 보면 그 새끼도 이상한 자만심이 있어. 아무리 그래도 내 아빤데. 그 개가 사라지면 내가 힘들어할 걸 몰랐을까 봐.”
그때 알았다. 아버지가 정윤오 아버지를 위해 일하고, 정윤오보다 저를 더 많이 혼내기는 했지만, 결정적일 땐 결국 저를 택하리란 걸.
“좋다. 해피엔딩이네.”
“어. 그래서 그때부터 정윤오가 어떻게 굴건 그냥 무시했어.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고.”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인생의 모든 일에 어떤 계기가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설은하를 향해 흔들리는 이 감정과 마찬가지로.
“거기 한번 가보고 싶다.”
“어디?”
“네 고향.”
되게 따뜻할 거 같아. 야경을 내려다보는 은하의 옆모습을 길게 쳐다보았다. 소금기 밴 그녀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이제 오는 거냐.”
“안녕하세요.”
어두운 마당을 가로지르던 태건은 제집 앞에 서 있는 인물에 고개를 숙였다.
“얘기 좀 하자꾸나.”
“네.”
정호승은 마당 한가운데 있는 벤치로 태건을 이끌었다. 언뜻 고개를 들어 본 본채에는 정은수의 방에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차 기사 말을 들어 보니, 요즘 학교 알아보고 있다고?”
“네.”
“윤오랑은 얘기가 된 거냐.”
“차차 얘기할 생각입니다.”
“그래.”
정호승은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돈을 좋아하고 여자를 좋아했으며, 변덕이 심해 내키는 대로 하는 경향이 강했다. 한마디로 정윤오의 성격 대부분은 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학비는 내가 대 주마. 그동안 고생한 것도 있으니.”
“아닙니다. 그동안 모아 놓은 것도 있고, 아버지도 원하시지 않을 거예요.”
태건의 답이 맘에 안 든다는 듯 정호승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차 기사한테는 내가 말하면 돼. 그 정도가 뭐 대수라고.”
“대표님.”
“윤오가 은수 이야기를 하던데.”
갑작스레 튀어나온 정은수의 이름에 태건이 잠시 멈칫했다.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는 듯 정호승은 별스럽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얘길 들어 보니 그 애 말이 맞아. 지금껏 윤오 컨트롤해 온 거 보면 심지는 굳은 놈이다 싶고. 은수도 널 싫어하지는 않으니.”
“…….”
“애 엄마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잘 설득할 테니까.”
“대표님, 은수 누나 얘기부터 들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윤오 약혼 잘 마치면 다시 얘기하자. 그때까지 윤오 잘 부탁한다.”
제 할 말만 마치고 정호승은 돌아섰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일에 태건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게 무슨.”
정윤오에게 정은수와 떠나겠다고 통보하듯 말하긴 했지만,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물리적으로 거리를 두게 함으로써 서로 숨통이나 트자는 거였지, 진심으로 정은수를 제 옆에 세우고자 함은 아니었다.
휴대폰을 꺼내 든 태건이 키패드의 숫자 3을 꾹 눌렀다.
“너 어디야.”
정윤오는 집에 없었다. 오랜만에 머리에 열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태건은 집을 나섰다.
운전을 하면 사고라도 낼 기분이라 택시를 잡아타고 강남으로 넘어왔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한 무리가 태건을 알아보고 손짓을 해 왔다.
“태건, 오랜만이다? 요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정윤오 어딨어?”
잔뜩 굳은 얼굴로 제 할 말만 뱉는 태건에 반가운 척 어깨를 치려던 남자의 손이 움찔했다.
“저기, 우리 항상 가던 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