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오랜만에 들어온 클럽은 둥둥대는 박자에 머리가 아팠다. 항상 오던 3번 룸에 들어오니 대여섯 명의 남녀가 섞여 양주를 퍼마시고 있었다. 정윤오도 한가운데 앉아 여자 하나를 끼고 지금 막 술을 들이켜는 중이었다.
“어, 왔어? 빨리 왔네?”
“얘기 좀 해.”
“뭐야. 왜 이렇게 표정이 심각해. 일단 앉아. 앉아서 한잔해.”
태건을 향해 실실 쪼개는 정윤오는 이미 취할 대로 취한 상태였다. 테이블에 술잔을 내려놓고 옆에 앉은 여자에게 진하게 키스를 하는 그의 손이 점점 내려갔다.
“정윤오.”
태건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정윤오의 손은 더욱 대범해졌다. 여자의 옷 속으로 손이 들어가는 순간, 쨍그랑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으악! 소리와 함께 정윤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이 새끼랑 할 얘기 있으니까 잠깐 나가 있어 줘.”
태건의 성질을 알고 있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얼른 데리고 나갔다. 정윤오는 흥이 깨졌다는 듯 시큰둥하게 태건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는데.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대표님한테 무슨 얘기 했어.”
“뭐. 아, 정은수 얘기? 살짝 흘리기만 한 거야, 흘리기만.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왜 벌써 그런 얘기가 나오냐고.”
“돈 잘 쓰고 다니길래. 설은하랑 잘돼 가는 거 같아서. 어떻게든 깨 준다며?”
“…….”
“아, 씨발 오늘따라 술 겁나 빨리 취하네.”
두통이 이는 듯 정윤오는 제 머리를 감쌌다. 그런 정윤오를 향한 태건의 얼굴이 깊게 가라앉았다.
“원하는 게 뭐야.”
“뭐?”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냐고.”
이쯤 되니 태건은 정윤오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됐다. 판을 깔아 놓고 변수를 만든다. 계속 흔든다.
하. 실소를 흘리던 정윤오의 표정이 순식간에 싹 굳었다.
“네가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차라리 도망이라도 쳐, 비겁한 새끼야. 돈이고 뭐고 다 버리고 정은수 손잡고 도망이라도 치라고.”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차라리 그랬으면 이런 거지같은 기분은 느끼지 않아도 될 텐데.
잔뜩 굳은 태건의 턱을 보며 정윤오의 눈썹이 불쑥 올라갔다.
“설은하.”
“…….”
“내가 원하는 게 설은하면 어떡할 건데.”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그런 태건을 보는 윤오의 눈빛이 오묘해졌다.
“뭔 개소리야. 지금 내가 너 때문에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데!”
“우리 건이 화났어? 미안.”
미안, 미안. 술을 따라 주려 일어서는 정윤오의 몸이 휘청거렸다. 태건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흐느적거리는 것이 마치 젖은 빨래를 한 아름 안고 있는 느낌이었다.
“친구야, 미안하다. 아, 나 정신 병원에라도 가 봐야 될까 봐. 존나 인생이 지루해 죽을 거 같아. 어쩌냐.”
오늘은 아니었으면 했다. 어쩌다 설은하의 진심을 얻어들은 오늘만큼은. 저도 인간이라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고 싶었다.
“너 진짜 왜 그러냐.”
“그냥 심심해서 그랬어, 심심해서. 미안.”
되지도 않는 변명과 함께 허물어지는 정윤오를 그대로 소파에 두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면서도 문 앞에서 서성이는 몇 명에게 그를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씨발.”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태건은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 *
“어제 늦게 들어왔냐?”
“네.”
“일찍 일찍 다녀.”
“네.”
“손은 또 왜 그래.”
“길거리에서 시비 붙은 거 말리다가요.”
붕대가 감긴 오른손을 보는 아버지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어제 정윤오 앞에서 병을 깬 게 잘못되어 오른쪽 손바닥에 한 뼘 정도 금이 가 있었다. 응급실에 가서 꿰맨 후에 집에 돌아오고 보니 새벽 3시였다. 되지도 않는 변명보다는 그럴 듯한 거짓말을 하는 게 더 나았기에 태건은 대충 둘러댔다.
“먹어.”
“잘 먹겠습니다.”
대부분 아침상은 태건이 차리곤 했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아버지가 차렸다. 고슬고슬한 밥에 몇 가지 밑반찬, 그리고 갓 끓인 된장찌개가 다였지만 두 사람의 아침으로 모자람 없는 식사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밥에 숟가락을 푹 넣어 한술 뜨려던 그때였다. 바깥에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이내 현관문이 쾅쾅 울렸다.
“이거 놔!”
“엄마, 잠깐만.”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나려는 부친을 만류하고 태건이 일어나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워낙 좁은 집 안이라 밥상에서 현관까지 다섯 걸음밖에 되지 않았다.
끼익, 문이 열리면서 눈에 들어오는 건 아니나 다를까, 독이 바짝 오른 표정의 오진주와 어쩔 줄 몰라 하는 정은수였다. 짜악! 문이 열림과 동시에 태건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엄마!”
“사모님!”
깜짝 놀란 아버지가 일어나면서 밥상이 나동그라졌다. 순식간에 찌개가 엎어지고 난리가 된 와중에, 부친이 다가오는 걸 태건이 슬쩍 몸을 움직여 막았다.
“내가 그렇게 알아듣게 얘기했는데 뭐, 결혼? 네까짓 게 어디 내 딸을 넘봐!”
“엄마, 제발 좀 진정해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내미, 이따위 버러지처럼 사는 놈한테 홀랑 넘어가게 생겼는데 정신 차리게 생겼냐고!”
“엄마, 제발…….”
“너 왜 가만히 있어. 뭐라고 말 좀 해 봐! 뭐라고 떠들었길래 쟤 아빠가 갑자기 너한테 쟬 시집보내느니 어쩌느니 하냔 말이야!”
태건은 제 어깨를 툭툭 미는 오진주의 손길을 묵묵히 받았다. 옆에서 정은수가 울먹거리며 제 엄마의 손길을 막아 보았지만, 그 분노를 감당하기란 애초에 어려운 일이었다.
“사모님, 그만하십시오.”
태건의 어깨를 확 잡아챈 부친이 제 뒤로 그를 잡아 세웠다. 갑자기 공격할 대상을 잃은 오진주는 아버지를 향해 눈을 희번덕거렸다.
“차 기사가 한번 말해 봐요. 지금 차 기사 아들이랑 내 딸이 가당키나 해요? 아니면 차 기사도 동조한 건가? 아들 시켜서 한몫 잡아 보려고?”
“사모님!”
“어지간해야 말이지, 어지간해야! 학교를 제대로 나오길 했어. 직업이 있길 해. 스물여섯이나 돼서 하는 일이라곤 지 친구한테 빌붙어서 운전이나 해 주는 게 다인 놈한테 내 딸을 맡겨? 하!”
태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으니까.
정윤오나 정은수나, 그들은 어떻게든 반 발자국씩이라도 앞으로 나아갔다. 제자리에 고여 있는 건 저 하나뿐, 부친이 어떻게든 학교를 알아보라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임을 모르지 않았다.
“내가 남들한테 모진 소리 들어 가면서 대표님 내조했던 거, 다 내 딸 하나 보고 살았던 거예요, 차 기사. 대충 대표님 설득해서 어떻게 될 줄 알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라구요!”
할 말을 마친 오진주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태건에게 경고의 눈빛을 쏘아 준 후 홱 몸을 돌려 가 버렸다.
“건아, 미안. 아저씨, 죄송해요.”
정은수는 마치 사죄라도 하듯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정은수마저 가 버리고 나자 거실에는 고요함이 들어찼다.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선 태건은 말없이 쏟아진 음식을 접시에 담고 더러워진 바닥을 정리했다. 그런 아들을 부친은 착잡한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죄송…….”
“미안하다.”
길어지는 침묵에 태건이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아버지에게서 흘러나오는 사과에 태건의 손길이 멈칫했다. 아버지는 싱크대에서 행주를 가지고 내려와 바닥을 닦으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뭐 그렇게 죽을죄라고. 애비가 못나서 그것도 맘대로 못 하게 만들고.”
“아버지.”
“너 잘못한 거 없어. 어쩌다 무슨 얘기가 나왔는지 몰라서 아무 말도 못 했다만, 사람 좋아하는 건 나쁜 거 아냐.”
“…….”
“난 내 아들 버러지처럼 안 키웠어. 호구 같기는 해도 버러지는 아니야. 그러니까 상처받지 마.”
“……네.”
“아침 다시 챙겨 먹고.”
대충 마무리를 한 후 아버지는 곧장 출근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오늘따라 작아 보이는 부친의 어깨가 괜히 눈에 밟혔다.
―괜찮아?
“어.”
―미안. 아침 식사 하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셔서.
“…….”
―넌 알고 있었어?
“정윤오가 괜히 이상한 얘기 한 거야. 신경 쓰지 마.”
―진짜 미안해. 넌 여자 친구도 있는데.
힘없는 정은수의 목소리를 듣는 와중에 맞은편 횡단보도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서 있는 은하가 눈에 들어왔다.
―요즘 왜 이렇게 답답하냐. 엄마도 그렇고, 윤오도 그렇고, 이젠 아버지까지. 진짜 딱 한 달만 도망치고 싶다.
“도망칠래?”
―……어?
태건이 그렇게 말할 줄 몰랐다는 듯, 정은수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얕게 떨렸다. 앞에서는 태건을 발견한 은하가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같이 도망치자.”
딱 정윤오 약혼식 끝날 때까지만.
―하아, 내가 어떻게 그래.
그래. 정은수는 못 하지.
친아빠한테 맞고 살다 겨우 살길을 찾은 엄마의 기대에도 부응해야 되고, 어쩌다 동생이 돼 버렸지만 아직도 좋아하는 정윤오도 돌봐야 하고. 누가 강제로 끊어 주지 않으면 넌 계속 그렇게 살겠지.
“유학, 아직도 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