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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앤 라이-20화 (20/58)

20화.

나직이 묻는 태건의 말에 은수는 잠시 시간을 끌었다.

―그게 최선이긴 하지.

“그래.”

그러자. 내가 도와줄게.

신호가 바뀌고 은하가 점점 가까워졌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은하를 보며 태건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차 안 막혔어? 일찍 왔……, 읍.”

태건은 제 앞에 선 은하의 고개를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힐끔거렸지만, 태건은 눈을 감고 입술을 맞댄 채 은하의 온기를 고요히 음미했다.

“뭐야?”

짧은 키스가 끝나고, 온화한 눈빛이 태건에게 쏟아졌다.

“보고 싶었어.”

가슴속에는 정체 모를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애틋했다. 은하는 부드럽게 휘어지는 태건의 입가에 다시 입을 맞추고 그의 품에 쏙 안겼다. 행복하네, 중얼거리는 그녀의 속삭임에 태건의 가슴 한쪽이 죄책감으로 간질거렸다.

3. 거짓말 뒤의 거짓말

“너 의외로 이런 건 못하는 구나?”

“어. 집에선 잘 안 해 먹어서.”

“하긴. 생선구이가 집에서 하기는 좀 번거로운 음식이긴 하지. 이리 줘 봐.”

어느덧 태건이 은하를 만난 지 벌써 두 달을 넘어섰다. 그사이 둘은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만큼 더 친밀해져 있었다.

오늘은 교수님께 잠깐 들를 일이 있다는 은하의 말에 학교로 온 참이었다. 차를 가지고 오지 말라는 말에 느긋하게 버스를 타고 도착한 태건은 후문에 있는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일을 다 마친 은하는 태건을 한 백반집으로 데리고 갔다. 저도 선배 덕분에 우연히 알게 된 곳인데, 학교에서는 꽤 유명하다고 했다.

태건의 접시를 제 앞으로 가져간 은하가 숟가락을 세워 생선 옆면을 살살 파냈다. 가시가 깔끔하게 발라져 나오자 은하가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네.”

“그거 알아? 부잣집에서는 이런 거 도우미 아주머니들이 다 발라 준다?”

“그래?”

“응. 삼계탕이나 생선 같은 거. 아마 정윤오도 못할걸?”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근데 아시다시피 나는 집에서 구박데기니까, 알아서 잘해 먹었어야겠죠?”

“뭐야, 그게.”

헛웃음을 흘리는 태건을 보며 은하가 괜히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게 뭐라고. 그냥 가르쳐 주면 될 걸. 다들 너무 과보호하는 거지. 자, 다 됐다! 먹어.”

어느새 깔끔하게 발라진 갈치구이 한 마리가 접시에 놓여 있었다. 껍질까지 완벽하게 분리된 그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프론데?”

“좋아해서. 난 애 낳으면 생선 잘 먹일 거야.”

하얀 밥에 고슬고슬한 생선을 얹어 한입 가득 입 안에 넣는 은하의 얼굴에는 행복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유난히 따뜻해 보이는 그 모습에, 태건은 온종일 자신을 감싸던 허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좋아해.”

큭! 음식을 넘기던 은하가 갑자기 기침을 하며 황급히 물을 넘겼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태건을 흘겨보았다.

“뭐야, 진짜.”

“그냥. 갑자기 말하고 싶어서.”

“살다 살다 갈치 발라 주고 고백 받는 거 처음이네.”

“좋아해.”

“알았으니까 어서 드세요.”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태건의 고백에 그새 적응이 됐는지 은하는 피식 웃으며 다시 식사를 했다. 태건도 곧바로 수저를 들었지만 마음은 편하지가 못했다.

좋아해, 설은하. 내가 많이 좋아해 줄게.

그러니까 너도 날 더 좋아해 줘. 딱 정윤오를 버릴 수 있을 정도까지만.

“와, 너무 배부르다!”

별로 나오지도 않은 배를 통통 두드리며 은하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근처에 유명한 디저트 카페가 있다며 저를 이끄는 모습은 흡사 어린아이라도 된 듯 보였다.

“요즘엔 정윤오 일 안 해?”

“그만뒀어.”

“진짜?”

“어.”

지난번 오진주가 한바탕 하고 간 이후 태건은 정윤오의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아버지가 말했던 곳을 찾아가 진로 상담도 해 본 결과, 공부를 시작하기로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나 이렇게 사는 거 한심해 보이지 않아?”

“한심할 게 뭐 있어. 이런 저런 인생 있는 거지.”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설은하는 어떤 일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다. 길을 지나가던 중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을 보면 한마디 거들 법한데도, 은하는 모른 척 지나가거나 저 사람도 사정이 있겠거니, 그러고는 말았다. 하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니 저를 만나 주는 거겠지.

“덥지 않아? 차 가지고 온다니까.”

“별로. 오늘은 날도 선선한데 뭐. 그리고 나 걷는 거 좋아하거든.”

문득 처음 은하를 만난 날, 한 시간 동안 아무 목적 없이 길을 걷던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정윤오에게 모욕을 당하고, 제 아버지에게 호통을 듣고도 혼자서 묵묵히 끝까지 식사를 마치던 덤덤한 설은하. 그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먼저 나와도 절대로 손대면 안 돼. 사진부터 찍어야 하니까.”

“알았어.”

태건과 함께 카페로 들어온 은하는 뜨거운 커피 두 잔과 딸기 타르트를 주문한 후 자리를 비웠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잠시 밖으로 나가는 사이, 커플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은하의 곁을 지나 안으로 들어왔다.

“오빠, 저 여자 그 사람 맞지? 설은하. 직접 보니까 더 화려하게 생겼다.”

“그러게.”

의자에 앉아 별생각 없이 진동 벨을 굴리던 태건은 옆에서 들리는 은하의 이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런 태건의 시선을 눈치 못 챈 두 사람은 아직도 밖에서 통화에 집중하고 있는 은하를 흘긋대며 수다를 떨어 댔다.

“커뮤에서 보니까 평판 장난 아니던데. 그렇게 남자들을 후리고 다닌다며.”

“작년에 지욱 선배도 잠깐 만났다고 한 거 같던데. 지난번에 술자리 갔을 때 다른 형들이 말하더라고.”

“와, 지욱 선배 엄청 철벽남이잖아. 능력이 좋긴 좋네.”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게 능력인가. 저 사람, 교수한테 번역 일 받는 것도 엄청 안 좋은 소문 돌잖아.”

“에이, 그건 아니지. 일주는 사람 고윤정 교수라며?”

“혹시 아냐. 고 교수가 여자 좋아하는 사람일지.”

“너무 비약 아닌가. 어쨌든 부럽다.”

“뭐가.”

“나도 한 번은 저렇게 생겨 봤으면. 그럼 오빠도 더 좋을 거 아냐.”

“아니거든? 난 저런 걸레 같은 사람보다 우리 아린이가 더 좋거든?”

“뭐래, 갑자기.”

없는 사람을 앞에 두고 험담을 하던 두 사람은 갑자기 급발진을 하며 꽁냥대기 시작했다. 태건은 손에 잔뜩 들어간 힘을 풀기 위해 혼자 애써야 했다.

“뭐야. 왜 이렇게 심각하게 앉아 있어? 무슨 일 있었어?”

통화를 마치고 들어온 은하가 잔뜩 굳은 태건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칫하면 입술이라도 닿을 듯 가까이 다가온 은하에 태건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

은하의 얼굴에 의아함이 뜬 것도 잠시, 태건은 테이블 위에서 울리는 진동 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앉아 있어.”

음료를 가지러 가는 그 짧은 사이, 태건은 저도 모르게 과민 반응을 하고 만 자신을 속으로 탓했다. 뭐 하냐, 차태건. 진짜 비겁해 보이게.

은하를 씹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도저히 나설 수가 없었다. 차태건에게는 자격이 없으니까. 정작 그녀를 가장 크게 기만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저니까.

“아, 진짜 오랜만이다. 맛있겠지?”

매사 시크하고, 쿨한 은하의 반전 요소는 단것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꼭 초콜릿 한 조각이라도 꼭 먹어야 했고, 가끔 카페에 들를 때면 어김없이 디저트를 함께 주문했다. 이번에 주문한 딸기 타르트 역시 과일 주변으로 투명한 설탕 시럽이 잔뜩 뿌려져 있었다. 단것이라면 질색을 하고 보는 태건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예쁘네.”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은 은하가 질린 듯 보는 태건을 향해 크게 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표정 못 숨긴다니까. 싫어하는 거 티 나.”

“딱히 싫다기보다는…….”

“아.”

“응?”

“한입만 먹어.”

“아…….”

포크로 딸기 하나를 찍어 태건에게 내미는 은하의 눈가가 장난스럽게 휘어져 있었다. 심술궂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태건이 이내 입을 열어 딸기를 받아먹었다.

“맛있지? 달지?”

“어. 맛있네.”

입 안에서 터지는 과육을 천천히 씹어 삼키며 태건은 포크로 딸기를 하나 꽂아 은하에게 건넸다. 손을 들자마자 홀랑 받아먹은 은하의 눈이 번쩍 뜨여 동그랗게 변했다.

“그렇게 좋아?”

“응.”

기분 좋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은하를 보니, 괜히 웃음이 튀어나왔다. 본격적으로 디저트와 커피를 즐기는 은하의 뒤로, 험담을 하던 두 사람이 이쪽을 흘긋거리는 게 계속 눈에 들어왔다.

“오늘 학교에 온 거 일 받으러 온 거야?”

“응. 졸업하기 전부터 일 주시던 교수님이 계시거든. 급하게 돈 필요할 때가 있었는데, 우연히 그 상황 아시고 간단한 번역 일 주셨었어. 결과물이 괜찮았는지,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주시더라? 그러다 보니까 여기저기서 일도 들어오게 되고. 나한텐 약간 은인 같은 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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