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21화 (21/58)

21화.

“그렇구나.”

유학이라고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다는 은하가 번역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순전한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은하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독하게 공부를 했다고 했다. 남들 잘 시간에 밤을 새워 가며 공부하는 건 기본이었고, 번역 일을 하면서부터는 감을 익히기 위해 영어권 뉴스와 드라마 등을 매일매일 시청했다. 외국인 친구들을 주기적으로 만나 제 실력을 점검하는 것을 물론, 전문성을 요하는 학술 논문을 번역하기 위해 인터뷰를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금씩 알게 된 은하의 일상에 태건은 왠지 부끄러웠다. 문득, 자신은 이렇게 열심히 살아 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이 정도로 바쁘게 살면서 연애까지 열심히 했다면, 이건 비난을 하는 게 아니라 상을 줘야 할 일 같은데. 쓸데없이 드는 생각에 태건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까부터 이상하네? 혼자 우울해했다가, 이번엔 또 혼자 웃고.”

“날이 더워서 그래.”

태건은 의아하게 저를 보는 은하의 손을 꾹 잡아 쥐었다.

미안해, 설은하. 내가 고작 이 정도 인간밖에 못 돼서.

태건의 마음속에 내뱉지 못할 사과가 계속 쌓여 갔다.

* * *

“이제 그만 가 봐. 오늘 너무 피곤하겠다.”

“난 남는 게 체력밖에 없잖아.”

카페에서 나온 뒤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두 시간을 걸었다. 발이 시큰거리고 목도 아팠지만, 생각 외로 그 시간은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히 가. 나중에 통화하자.”

“설은하.”

들어가려는 은하를 불러 세운 태건은 돌아본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 쥐었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하얀 손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자, 은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를 지었다.

“찐하게 키스라도 해 줄 줄 알았더니?”

“그냥. 가끔은 이런 것도 좋으니까.”

평소의 은하는 아주 쾌활했지만, 집에 도착하고 작별 인사를 할 때에는 어딘가 멈칫하는 기색이 있었다. 혹시 집에 들어가기 싫은 건 아닐까. 어떨 땐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려서 괜히 은하의 손을 붙잡고 시간을 끌곤 했다.

“저기, 있잖아.”

“응?”

“사실은…….”

“설은하?”

평소답지 않게 뭔가 머뭇거리던 은하가 어렵게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끼익,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은하보다 조금 앳된 얼굴의 여자 한 명이 안에서 나왔다.

“어. 은진아.”

은진이라고 불린 여자는 싸늘한 눈초리로 은하를 보다 곧바로 태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까지도 은하의 손을 잡고 있던 태건은 당황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손을 슬며시 놓아주었다.

“내 동생이야. 설은진. 여긴 내 친구, 차태건.”

“안녕하세요.”

“아, 네.”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설은진은 무례한 눈길로 태건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계산이 끝났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어디 나가는 거야?”

“잠깐 앞에.”

“차도 없이?”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 저기 오네.”

마침 집 앞으로 오는 컨버터블 차량을 발견한 설은진이 태건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하고는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부웅. 설은진을 태운 차는 굉음을 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은하가 태건을 향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진짜 가. 너무 늦겠다.”

“설은하.”

“응?”

태건은 은하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았다. 두 시간 동안 걷느라 배어난 땀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 왔지만, 그 정도는 은하의 체향에 가려져 아무렇지도 않았다.

“잘 자. 좋은 꿈꾸고.”

“그래. 너도.”

태건의 뺨을 붙잡고 입술에 짧은 뽀뽀를 해 준 은하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태건은 뻐근한 가슴을 잠시 느끼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탁.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는 태건의 손길이 거칠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지난번 집 앞까지 은하를 데려다준 후 그녀와 제대로 연락이 되지 않은 것이. 닷새 전까지는 드문드문 문자로 메시지도 남기더니, 그저께부터는 아예 전화가 꺼져 있었다. 혹시 집 앞에서 동생을 만난 게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태건은 걱정으로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저도 은하랑 연락한 지 꽤 돼서요. 전화 오면 연락드릴게요.] 오후 3:06

혹시나 효주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그쪽도 신통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집 앞으로 찾아갈 수도 없어 태건은 입이 바짝 말랐다.

“건아.”

“어, 왔어?”

“미안해. 뒤에서 차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괜찮아. 넌 다친 데 없고?”

“어. 병원에서 검사 다 받았어. 엄마가 좀 난리였어야지.”

사흘 전, 집 앞 대로변에서 접촉 사고를 당한 정은수는 새로 뽑은 지 이 주일 된 차량을 정비소에 맡겼다. 그동안 운전면허를 따 놓고도 태건이 운전하는 차를 주로 타고 다녔는데, 지난번 결혼 이야기가 나온 이후 오진주가 강력하게 반대를 해 혼자 다니게 된 것이었다.

“나 혼자 택시 타고 가도 되는데.”

“그냥 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걸 알게 된 오진주는 그렇게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태건에게 오늘 정은수의 스케줄에 동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

큰일은 아니었고 중요한 자리에 입을 드레스를 맞추러 가는 일이었는데, 오늘 정호승의 중요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부부 동반으로 만나는 자리라 자리를 비울 수 없는 까닭이었다.

청담동의 복잡한 골목에 있는 드레스 숍은 규모는 작지만 알짜배기들만 오는 곳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해외 유명 브랜드의 드레스는 웬만하면 다 이곳을 거쳤고, 피팅부터 착의까지 완벽하게 관리를 해 주기 때문에 평판도 뛰어났다.

“나 먼저 들어가 있을게.”

“어.”

워낙 복잡한 지역이라 주차가 쉽지 않았다. 5분 정도 떨어진 주차 구역에 차를 세우고 돌아온 태건은 반갑게 맞이하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화려하게 꾸며진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2층으로 되어 있는 건물은 왼쪽과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나뉘어, 한 타임당 딱 두 명의 고객을 받고 있었다. 직원을 따라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간 태건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에 길게 늘어진 커튼 앞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설은하. 휴대폰을 꺼내 다시 은하의 이름을 화면에 띄워 보았지만, 쉽게 그 이름을 누르기는 힘들었다. 몇 번이고 받지 않는 전화가 뭘 의미하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준비되셨나요?”

“네?”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태건에게 직원이 다가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뭐라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 그의 앞에 있던 커튼이 활짝 열렸다. 환한 불빛에 태건의 동공도 있는 대로 다 열렸다.

“너무 예쁘세요! 약혼식 드레스로 진짜 딱이에요!”

직원의 말대로, 단상 위의 설은하는 정말 아름다웠다. 몸에 착 붙는 긴 드레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실루엣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고, 머리카락으로 가려지지 않은 한쪽 어깨의 여린 선은 유려하게 떨어졌다. 유독 그녀가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비단 드레스에 박힌 보석이나 조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설은하 자체가 빛나는 것이었다.

“어떠세요?”

뭔가 단단히 오해한 직원이 태건을 보며 한껏 미소를 지었다. 그런 직원에게 태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는 은하처럼 그저 그렇게 돌처럼 굳어 있을 뿐이었다.

* * *

“차태건.”

태건은 정은수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고 메시지를 남기고 먼저 숍을 나섰다. 준비도 없이 머릿속에 들어온 은하의 이미지에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혼자 정처 없이 떠돌다 한참 후 집으로 갔을 땐, 은하가 태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왔어.”

그는 은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아직 제 감정을 뭐라고 명명해야 할지 정확히 판단 내릴 수 없었다. 걱정과 불안감이 동시에 솟았는데, 그게 잘되어 가고 있던 일에 재가 뿌려진 것에 대한 걱정인지, 아니면 은하 자체에 대한 불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얘기 좀 하자.”

오래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희미하게 웃는 은하의 얼굴은 조금 지쳐 보였다.

“타. 데려다줄게.”

태건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차에 태우고 거칠게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 그가 이끈 곳은 한적한 공원 옆 주차장이었다.

“화났어?”

“내가 그럴 입장이 되나.”

말 그대로, 태건은 제가 은하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둘의 관계는 서로의 잠자리 상대였을 뿐. 약혼식을 파투 내야 하는 미션은 오로지 태건의 것이었고, 은하로서는 굳이 일을 어그러뜨릴 이유가 없었다.

“그동안 연락 못 받아서 미안해. 일이 좀 있어서.”

“그래. 괜찮아.”

언젠가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은하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담담해 보이는 태건의 표정에 은하의 눈가가 아주 조금 풀어졌다.

“커피 한잔하러 갈래? 지난번에 괜찮은 카페 알아 놓은 데 있는데…….”

“할까?”

“……어?”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잖아. 나 차 안에서 하고 싶어.”

벨트를 풀어낸 태건이 덮치듯 은하의 입술을 감쳐 물었다. 태건의 거구에 꼼짝없이 갇힌 은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에게 안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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