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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앤 라이-22화 (22/58)

22화.

“으읍, 잠, 깐! 으……읍!”

저를 밀어내려는 두 손을 한 번에 올려 잡고 태건은 은하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잠깐……, 아파, 아……파. 차태건!”

예민한 살갗을 함부로 만지는 손길에 은하가 온 힘을 다해 태건의 상박을 밀어냈다. 안 그래도 열이 올라 있던 태건은 저를 거부하는 듯한 은하의 몸짓에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왜. 너 하는 거 좋아하잖아. 내가 만져 줄게. 다 핥아 줄…….”

찰싹!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뜨거운 기운이 뺨에 닿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아보니 은하가 차갑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켜.”

눈빛은 한없이 싸늘한데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그제야 태건은 제가 무슨 짓을 하려 했는지 깨달았다. 얼른 비켜난 태건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은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입 열지 마.”

주섬주섬 제 몰골을 추스른 은하가 떨리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달칵 문이 열리고, 바로 내리려던 은하는 그대로 한마디를 남겼다.

“내가 전화할 때까지 아무 연락도 하지 마. 찾아오지도 말고.”

쾅, 이윽고 닫힌 차창 너머로 은하가 점점 사라졌다.

“하아. 이 쓰레기 새끼.”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린 태건이 주먹으로 세게 핸들을 내리쳤다.

실은 아까부터 저를 지배하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자칫하면 설은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질투심, 그리고 어쩌면 그 모든 내면의 뒤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

“아.”

핸들에 얼굴을 파묻은 태건의 머릿속에 잔뜩 얼어붙은 은하의 눈빛이 계속 떠올랐다. 그는 문득 깨달았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단단한 껍질을 두르고 살던 은하가 방금 전 저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음을.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을 거부해 본 적 없던 그녀가 정말 진심으로 저를 쳐 낸 것임을.

“씨발.”

저에 대한 혐오감이 끝도 없이 피어올라 태건은 그저 욕만 씹어 댔다. 하지만 몇 번을 자괴감에 머리를 찧어도 은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태건은 그 사실이 진심으로 가슴 아팠다.

* * *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뻔하디뻔한 이 명제는 며칠 동안 태건을 괴롭혔다.

눈을 감으면 상처받은 은하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눈을 뜨면 은하가 제 곁에 없다는 사실만 가슴에 사무쳤다.

밤마다 자책에 자책을 더하던 태건은 결국 사흘이 지난 아침, 은하의 집 앞으로 향했다.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명백하게 자신이 잘못을 했으니, 빌든지 맞든지, 아님 아예 꺼지라는 말을 듣든지 해야 했다. 아니, 실은 은하를 보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어서 온 거면서. 태건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아버지의 차를 끌고 온 태건은 새벽부터 은하의 집 맞은편에 주차를 해 놓고 은하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고용인으로 보이는 몇 명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드디어 설준호가 출근을 하면서 은하가 다른 가족과 함께 모습을 비췄다.

“다녀오세요.”

뭐 대단한 가문이라고. 은하의 집은 가장이 출근할 때 가정부까지 대문 앞에 나와 인사를 시키는 곳이었다.

“아, 오늘 마사지나 받으러 갈까.”

차가 떠난 후, 제 모친의 뒤를 따르던 설은진이 목을 살살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다 문득 표정 없이 서 있던 은하와 눈이 마주쳤다. 그때였다. 짝! 하고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거리에 울려 퍼졌다.

대뜸 벌어진 광경에 놀란 건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태건뿐이었다. 눈치를 보던 가정부는 잽싸게 들어가 버렸고, 설은진의 모친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평화로운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왜. 뭐가 맘에 안 들어?”

“어. 너 짜증 나. 좀 이따 들어와.”

그렇게 난데없이 뺨을 날린 설은진은 은하의 바로 눈앞에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이해가 되지 않아 태건의 눈에는 핏줄이 바짝 섰다.

“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 앞 계단에 풀썩 앉는 은하의 모습에 태건은 제 가슴을 강하게 짓눌렀다. 순간, 누가 손으로 심장을 꽉 쥐고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뺨 세례에 아파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 그 전에 놀라지 조차 않는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이 아팠다.

“흠, 으음.”

살금살금, 손바닥으로 뺨을 문지르는 은하의 눈빛이 텅 빈 거리로 향했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녀는 이 세상에 오직 홀로 존재하는 듯 그렇게 제 아픔을 견뎌 내고 있었다.

‘어, 설은하다.’

‘누구?’

‘있어. 우리 학교 유명한 자동문.’

‘자동문?’

‘어. 저 좋다고 대시하는 놈마다 홀랑 자 준다고 유명하거든.’

문득, 맨 처음 은하를 보았을 때 정윤오가 지껄이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제가 얼마나 무심했는지도.

‘걔 꼬시는 거 별로 안 어렵다던데? 애가 애정 결핍인가. 그렇게 안 생겨서는 엄청 치댄다더라고.’

애정 결핍. 저런 대접을 받고 사는 걸 단순히 그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봐줘야 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함부로 행동하고 다니지 마.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항상 머리에 새기고 있어.’

‘네. 명심할게요, 아버지.’

아버지라는 사람을 향한 은하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기대도, 희망도 없었다. 기댈 곳도, 제 편을 들어 주는 사람도 하나 없이 아주 오랫동안 외롭게 살아왔음은, 그 한 장면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 이럴 때 보면……. 진짜 날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 같아.’

농담처럼 흘리던, 하지만 희망이 담겨 있던 그녀의 말에 저는 뭐라고 대꾸했었나.

‘좋아해. 좋아해, 설은하.’

진심이면서도 진심이 아닌 소리를 참 여러 번 지껄여 댔다. 그날 은하가 몸을 떨어 댔던 건,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제 고백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였으리라.

“하아.”

태건은 깨달았다. 제가 은하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강제로 은하를 덮치려 했던 것보다 더 쓰레기 같은 짓은, 바로 애정을 볼모로 그녀를 이용하려 했던 것이라는 걸.

“아, 어떡하지. 너…… 어떡하지.”

불시에 흐른 눈물이 두 뺨을 갈랐다. 그렇게 한참 동안 울지 않는 은하를 대신해, 태건이 울어 주었다.

* * *

훅! 훅! 상대의 파란 유도복 깃이 한 손에 잡혔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게 중심이 온통 앞으로 쏠렸다.

“윽, 억!”

유도를 할 때 태건의 가장 큰 장점은 기다릴 줄 아는 것이었다. 흐지부지 끌고 가는 경기를 완벽한 한판승으로 끝내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인내심이 중요했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버티던 태건은 상대가 아주 잠깐 빈틈을 보인 순간,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태건의 어깨 위로 비슷한 체급의 상대가 넘어가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체육관 안에 관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판!”

숨을 몰아쉬는 얼굴 위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상대에게 인사를 하고 도복을 정리하고 있자니, 태건의 뒤로 관장이 다가와 등을 툭 쳤다.

“뭐야, 오늘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해.”

“그러게요.”

승부는 이겼지만 내용 면으로는 지지부진했다. 오랫동안 태건을 봐 온 관장은 번민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장난 식으로 말을 던졌다.

“실연당했냐?”

아무 뜻 없이 내뱉은 말에 태건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걸 실연이라고 해야 하나. 잘못은 저에게 있는데.

“저녁 먹고 가라. 오랜만에 후배들 보는데.”

“죄송합니다. 선약이 있어서요.”

“자식, 요즘 계속 뺀다?”

“다음에 제가 제대로 모실게요.”

아쉬운 듯 보는 관장에게 허리를 숙이고, 태건은 서둘러 유도관을 벗어났다. 오후 7시 30분. 아직 책방이 닫기까지 한 시간은 더 남은 시간이었다.

홀로 남은 은하의 모습을 목격한 이후, 태건은 매일매일 은하수 책방에 들렀다. 은하의 앞에 나설 수는 없었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태건 씨 왔어요?”

“네,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선 태건은 무심히 고개를 돌리다 한쪽에 서 있던 은하를 발견했다.

“나 아직 너 보기 싫은데.”

팔짱을 낀 채 삐뚤게 선 그녀를 보며 그는 잠시 입술을 들썩였다.

“무릎 꿇고 사과하고 싶은데, 안 되겠지?”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얕게 한숨을 뱉어 낸 은하는 책방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태건을 이끌었다. 새벽에 비가 내린다더니 벌써부터 공기가 습했다.

“효주가 너 매일 오는 거 불편해해. 이제 그만하라고, 그 말 하려고 온 거야.”

“미안해.”

아무런 변명도 수식어도 없이 태건은 최대한 담담하게 잘못을 시인했다.

“뭐가 미안한데.”

“너한테 나쁜 짓 한 거. 아무리 화가 나도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왜 화가 났는데?”

은하의 질문에 태건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답이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기가 막혔기에.

“차태건.”

“질투가 나서.”

“…….”

“진짜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결국 이렇게 돼 버렸네.”

씁쓸하게 웃는 태건을 은하가 말없이 바라보았다. 잠잠한 호수 같던 은하의 눈빛이 조금씩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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