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너 진짜 나 좋아하니?”
“미안. 좋아해서.”
아버지는 말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 죄가 아니라고. 그런데 왜 항상 자신은 이런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걸까.
“정말이야?”
“응.”
이유는 알 수 없다. 언제부터인지도 알 수 없다.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되었을 뿐. 잠자리가 되었든, 연민이 되었든 그냥 설은하가 가슴에 콕 박혀 버렸다.
“뭘 바라고 하는 말은 아냐. 그냥…….”
“내 진짜 이름은 은하수야. 설, 은하수.”
“어?”
태건이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은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설준수, 내 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 우주보다 더 예쁘고, 우주만큼 큰 사랑 받으라고 은하수라고 지었대.”
태건을 바라보는 은하의 눈가가 이지러졌다. 동시에 뭔가를 회상하는 듯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내 이야기 들어 줄래?”
태건은 알 수 있었다. 은하가 지금껏 누구에게도 해 준 적 없는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줄 것임을. 그리고 그 무게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두려웠지만, 기꺼이 그 무게를 짊어질 생각이었다. 좋아하니까. 멍청한 차태건이 이제야 설은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그래, 다 해 줘. 너의 상처, 슬픔, 고민. 내가 다 들어 줄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다 없애 줄게.
“내 엄마는 창녀가 아니야.”
은하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렀다. 그렇게 한참 동안, 태건은 은하의 고백을 들어 주었다.
* * *
내 엄마는 창녀가 아니야. 은하는 말했다.
“처음 아빠가 고백을 했을 때, 엄만 시큰둥했대. 낡은 책방에서 일하는 고아원 출신 여자랑,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로펌의 차남은 누가 봐도 안 어울리는 그림이었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그냥 만나 줬대. 몇 번 만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은하의 아버지 설준수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은하의 모친인 유소은에게 청혼까지 했다. 차석으로 사법 연수원을 수료하고 일찌감치 판사의 길을 갔던 그는, 절연까지 불사하겠다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했다.
일부 사람들은 몇 년이 지나면 그들이 저절로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년 만에 딸을 얻은 그들은 일이 많지 않은 지방으로 전출을 신청해 아담하고 아기자기하게 지냈다.
그런 그들에게 불행이 닥쳐 온 것은 은하가 일곱 살이 될 무렵이었다.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 지인들과의 모임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던 두 사람이 아주 큰 교통사고에 휘말린 것이었다.
“갑자기 혼자가 돼서 아무 준비 없이 지금 집에 들어가게 됐어. 그땐 할아버지가 병상에 계실 때였는데, 유산이나 그런 것 때문에 문제가 좀 있었나 봐.”
은하의 조부인 설수호는 언젠가 작은아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병상을 오래 지키면서도 그 뜻은 굽히지 않았기에, 설준수가 유류분 포기 각서를 쓰겠다고 의사를 타진해 왔을 때에도 강력하게 거부했다.
결국 설수호가 사경을 헤매던 중 설준수의 교통사고가 일어났고, 혹시나 제 동생의 아이인 은하에게 유산이 돌아갈까 걱정했던 설준호는 은하를 아예 제 양자로 들여 버렸다.
“처음엔 괜찮았어. 아무리 구박을 받아도 내 머릿속에 분명히 엄마, 아빠와 함께 행복했던 기억이 있었으니까. 근데 나이를 점점 먹으니까 기억이 희미해지더라. 정말 계속됐거든. 날 선 말들, 끊임없는 냉대, 아니면…….”
이유 없는 폭력. 태건은 은하가 마치지 못한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일곱 살 여자애가 뭘 알았겠어. 툭 내뱉는 말에 희미한 웃음이 묻어 있었다.
“내가 말했지. 나 가볍다고.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았어. 마음속에 든 게 너무 무거워서, 몸이라도 가볍게 굴리면 좀 괜찮을까 했거든. 딱히 효과가 있는 것 같진 않지만, 순간순간 답답한 건 해소가 되더라.”
어설프게 미소 지으며 말하는 은하의 표정에 물기 따위는 없었다. 덤덤하고 허탈한 그 얼굴에 오히려 태건의 가슴에 우울이 쌓였다.
“이런 나라도 누굴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은 있거든. 근데 처음엔 첩 딸이라고 무시하고, 두 번째는, 난 딱 잠자리 상대까지래.”
은하의 첫 경험을 가져간 사람은 그녀의 대학교 선배였다. 은하보다 세 살 위인, 집안끼리 아는 사이라 모임에서도 몇 번 만났던 그는 잠자리 후 저희들의 관계에 대해 묻는 은하에게 그딴 말을 지껄였다.
너는 내가 딱히 책임질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 정도까지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잠자리는 잠자리일 뿐이라고.
“누가 날 좋아한다고 하면 일단 의심부터 들어. 이게 진짜일까. 내 얼굴이나 몸만 보고 좋아하는 건 아닐까. 근데 계속 그렇게 의심을 하다 보면 너무 지치거든. 그래서 나중엔 생각을 안 해. 그때그때 좋으면 좋고, 아니면 아닌 거야. 그래서 잠자리와 약혼은 나한테 별개였어.”
은하가 태건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 그녀의 나직한 고백으로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기대 같은 걸 안 하고 살아서 소원이랄 것도 딱히 없는데, 그래도 진짜 바라는 거 한 가지는 있었거든. 그 집에서 나오는 거.”
“…….”
“정윤오랑 약혼하면, 그래서 결혼까지 하면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을 거 같았어. 나중에 이혼을 하든 뭘 하든, 일단 결혼만 하면 내 할 일은 끝나는 거니까.”
“설은하.”
“좋아해, 차태건.”
예상치 못한 순간, 은하의 고백이 흘러나왔다. 놀란 태건의 얼굴에 떨리는 은하의 눈빛이 쿡 박혔다.
“내 이름 은하수를 걸고, 온 우주를 걸고. 너를 좋아해.”
두 손으로 태건의 뺨을 감싼 은하가 살포시 발을 들어 제 입술을 태건의 입술 위로 겹쳤다.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온 입맞춤엔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하듯, 혹은 신앙심 깊은 신자가 신에게 하듯 경건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지금 보니까 알겠다. 네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날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하는지. 그런데……, 나 진짜 이번엔 그 집에서 나와야겠거든.”
툭, 툭.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의 사이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문득 태건은 이 빗방울이 은하가 흘려야 하는 눈물을 대신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좋아해.”
“…….”
“근데 이제 그만하자.”
태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는 정윤오와의 내기를 진행할 수 없음을. 제 모든 것을 걸고 마음을 쏟아 내는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은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뿐임을.
멀어지는 은하를 잡지 못했다. 앞으로도 제가 먼저 손을 뻗지는 못할 것이다.
* * *
―너 뭐 하냐.
“…….”
―듣고 있어?
“…….”
―야, 차태건.
정윤오의 목소리를 들은 게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클럽에서 본 후 일도 그만두고, 여기저기 일을 보느라 바쁘게 다녔으니 집에서도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약혼 축하한다.”
태건의 시선이 문득 하늘로 향했다. 그땐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비만 뚝뚝 내리더니, 오늘은 별자리가 아주 선명하게도 보였다.
오늘 정은수에게서 정윤오의 약혼 날짜가 정확히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실은 그때 숍에 가서 맞춘 드레스가 그날을 위한 것이었다고. 대충 눈치를 채고 있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날 참석은 못 할 거 같다. 요즘 내가 바빠져서.”
―너 어디야. 일단 만나서 얘기해.
“정은수 포기해.”
―…….
은하와 헤어진 후, 태건은 많은 생각을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뭘 바로잡아야 하는지. 모든 것의 시작은 그래, 그날이었다.
‘야, 태. 나 부탁 하나만 하자.’
‘쟤 내 옆에서 떼 줘.’
정윤오가 이런 게임을 제안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별로 좋지 않은 머리로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것들을 궁금해 하는 건 다 쓸모없는 일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정윤오는 정은수를 포기 못 할 테니까.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태건은 이제 제 친구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 그게 네 대답이야?
“그래.”
―존나 재미없게 구네. 그래, 끊어라.
한마디 부연 설명 없이 정윤오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들어오는 메시지에 태건은 성의 없는 손길로 메시지를 훑었다.
[성진에서 진수가 올라와서 한잔하고 들어가마.] 오후 8:49
아버지의 메시지였다. 몇 년 만에 서울에 올라온 곽 씨 아저씨와 회포를 풀 작정인 듯했다. 문자를 잠시 보던 태건은 이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아버지. 어디세요?”
태건이 고깃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와 곽 씨 아저씨는 얼굴이 불콰해져 있었다. 문자를 받은 지 고작 삼십 분밖에 안 됐는데. 오늘 친구가 올라온다는 얘기에 오래전부터 휴가를 신청해 놓은 부친은 오랜만에 과음을 한 듯했다.
“아저씨.”
“어! 태건이 왔냐.”
“잘 지내셨죠?”
“그럼, 그럼. 얼른 앉아.”
숙취 음료를 준비해 온 태건이 테이블 위에 그것을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눈이 한껏 풀린 부친이 그런 태건을 보며 씽긋 웃었다. 표정이 확연히 드러나는 걸 보니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