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24화 (24/58)

24화.

“언제 이렇게 드신 거예요?”

“느 아부지 운전한다고 술 안 마신 지 오래됐잖냐. 한 잔 두 잔 먹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취한 거지, 뭐.”

내 아들. 장한 내 아들 왔네. 태건의 등 뒤로 뭉툭한 손길이 툭툭 느껴졌다. 태건은 그런 부친을 바닥으로 눕혀 방석을 머리 밑에 괴어 주었다. 그런 태건을 보던 곽 씨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아들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너 오기 전에도 그렇게 아들 자랑을 하더라.”

“제가 자랑할 게 뭐 있다구요.”

“왜 없어. 착하지, 인물 좋지. 유도 잘하지.”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태건은 슬쩍 웃고 말았다. 제가 생각해도 알맹이 없는 허울 좋은 말뿐이었다.

“요즘 공부한다면서. 힘들지?”

“안 하던 거 하려니까 머리 아프네요.”

어렸을 때부터 글자와는 담을 쌓았다. 할머니와 살 때는 매일 들판을 뛰어다니거나 TV를 주로 봤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공부보다는 몸으로 부딪쳤으니까. 그나마 유도로 풀리려던 게 한 수였다면 한 수였는데.

그래도 은하수 책방에 다니면서 예열을 좀 했다고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인 수준은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 봤자 한창 공부 중인 수험생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완전히 까막눈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래, 여자 친구는 잘 있고?”

“네?”

뜬금없는 곽 씨의 말에 태건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 제가 언제 여자 친구 운운한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아버지가 말하던데? 너 여자 친구 있다고.”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야?”

아무래도 정은수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씁쓸하게 미소 짓는 태건을 보며 곽 씨가 괜히 통박을 주었다.

“사내새끼가 여자 마음 하나 못 잡아서는.”

“그러게요.”

별안간 은하의 생각이 떠오른 태건은 앞에 있는 물 잔을 들어 조용히 입을 축였다. 그때 누워 있던 아버지에게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야야, 네 아부지 얼른 모시고 가라. 저러다 입 돌아가겠다.”

“네.”

태건은 얼른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고 아버지를 챙겨 들었다.

“이거 받아.”

“아이구, 됐다니까.”

한사코 거절하는 곽 씨에게 부친은 택시비와 여가비가 든 흰 봉투를 찔러 주었다.

“그리고 아까 내가 말한 거…….”

“알았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

부친은 옅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태건은 곽 씨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뒤,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

“태건아.”

“네, 아버지.”

“아들.”

“예.”

“사람 좋아하는 거 죄 아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그냥 잡어.”

취한 김에 하는 소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알고 있는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하지만 태건은 아버지가 해 준 말이 지금 가장 듣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당장 잡으러 갈 수는 없지만.

“……기다릴래요.”

결국 미련한 차태건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 기다리는 것. 언젠가 은하가 행복해지기를. 그런 뒤에는 조금 더 마음을 써서 저에게 돌아오기를.

지금 태건이 부릴 수 있는 욕심은 딱 여기까지였다.

* * *

시간은 빨리 흘러 어느덧 약혼식을 일주일 앞둔 날이 되었다.

이름을 바꾼 계절은 얼른 제 모습을 찾았고, 태건도 새로운 일상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더 이상 정윤오와 접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 진짜 짜증 나 죽겠어. 무슨 봉사 활동을 하라는 거야.”

정호승이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고아원에 방문한 태건은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은하의 동생이라던 설은진이 한쪽에서 휴대폰을 붙들고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언니라는 거 하나 있는 게 진짜 도움이 안 돼. 결혼한다는 집안도 무슨 졸부 주제에 사회 공헌 활동이니 이상한 건 다 챙겨요.”

대외적인 이미지를 잘 챙기는 정호승은 종종 제 지인들을 한데 모아 봉사 활동을 다니곤 했다. 본인들은 사진만 찍고 정작 일은 각자가 데려온 직원들이 했지만, 사회 공헌 활동이라는 명제를 핑계 삼아 저들끼리의 친목을 다지는 것이었다.

원래 정호승의 일정은 아버지가 수행해야 했지만, 오늘은 갑자기 볼일이 생겼다는 부친의 말에 태건이 차를 몰고 온 참이었다. 태건은 옆에서 빨래를 개고 있는 정은수에게 입을 떼었다.

“오늘 세운 쪽에서도 와?”

“어? 어. 이제 약혼식 얼마 안 남았잖아. 좋은 일 같이하자고 아빠가 초대하신 것 같던데.”

이렇게 은하와 마주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태건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서 꺼져 버려야 했지만, 한편 멀리서라도 은하의 얼굴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 그의 바람을 들어주듯, 은하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아이들을 씻기다 물벼락을 맞았는지 앞치마가 완전히 젖은 은하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걸어가려던 태건은 뒤로 멈칫 물러나는 은하의 몸짓에 황급히 발걸음을 거두었다.

“은하야, 괜찮아? 완전히 다 젖었네.”

“네, 괜찮아요, 언니.”

“애들이 장난이 좀 심하지?”

“이맘때 애들이 다 그렇죠.”

정은수와 대화를 하면서도 자신을 신경 쓰는 게 확연히 티 났다. 태건은 그런 은하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뒤쪽에 다른 일 없나 보고 올게.”

“어, 그럴래?”

두 사람을 남겨 두고 돌아선 태건은 마지막 모퉁이를 돌기 전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어렵게 고개를 돌려 본 그곳에는 서글픈 눈빛으로 저를 보고 선 은하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오늘 고생들 하셨습니다.”

워낙 작은 곳이라 그렇게 많은 일손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마당에는 차가 그득그득했다. 정호승의 말을 마지막으로 차가 한 대씩 빠져나가고, 북적이던 마당은 금세 썰렁해졌다.

“건아, 나 먼저 갈게.”

“어.”

은하가 사라진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중간에 아버지가 찾아와 제 소임을 다한 태건은 정은수의 인사에 무심히 대답했다. 그렇게 모든 차가 떠나고, 태건은 마당에 홀로 남아 쓸쓸해진 그곳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하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태건이 저도 모르게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동안 얼굴을 가리고 앉은 태건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와, 이거…….”

아예 안 보고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한번 얼굴을 보고 나니 그리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생각보다 힘드네.”

“……그러게.”

불쑥 튀어나온 대답에 태건의 고개가 화들짝 위로 들렸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향한 곳에 은하가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환영인가 싶었는데, 진짜 설은하였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그냥.”

“그냥 뭐.”

“혹시라도……, 네가 와 줄까 봐.”

태건이 말을 마치기도 전, 은하가 그의 머리를 폭 감싸 안았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그 포근함에 태건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보고 싶었어, 차태건.”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그렇게 꼭 껴안은 두 사람 위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직은 훈풍이었다.

* * *

“차태건.”

차태건.

설은하가 부르는 이름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정은수가 건아, 부르는 것처럼 부드럽지도 않았고 정윤오가 태! 차 기사, 차 경호, 부르듯이 친근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성과 이름을 함께 붙여, 있는 그대로 그를 불렀다.

“차……태건.”

하지만 태건은 은하가 부르는 방식이 좋았다. 자기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해 준 이후부터였다. 은하수라는 이름 하나에 자신의 모든 마음을 엮어 고백했던 그녀가, 제 이름도 꼭 그만큼의 무게로 여겨 주는 것 같았다.

“따뜻해. 네 품 안에 계속 있고 싶어.”

“안아줘. 더 꼭 끌어 안아줘.”

“하아……, 좋아. 좋아해, 은하야…….”

“해 줘. 이제, 그만…….”

태건은 은하의 상박을 꼭 껴안고 거세게 몸을 겹쳤다.

“아, 아! 으으…… 읏!”

경직된 은하의 몸을 꼭 껴안고 태건은 제 욕망을 쏟아부었다.

“하, 하아…….”

힘겨움에 떨리는 은하의 눈꼬리에 태건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이어 짙게 땀이 밴 이마에도, 붉게 물든 뺨에도. 민감한 귓가, 이어지는 목선, 온습한 입 안까지. 그의 자잘하고 다정한 입맞춤은 끊이지 않았다.

“좋아해. 좋아해.”

입맞춤 한 번에 고백 한 번씩. 태건은 차마 내보이지 못했던 마음을 참 열심히도 고백했다.

“어젠 그런 생각이 들었어.”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워 스며들어 오는 달빛에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였다. 감긴 은하의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덧그리던 태건은. 담담히 흘러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지금 완전히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감옥에서 나오겠다고 해 놓고서는 다른 감옥으로 들어가는 건 아닐까.”

“…….”

“매일매일 꿈을 꿨거든. 집에서 도망쳐서 혼자 비행기를 타는 꿈. 미국이든 아프리카든 어디로든 떠나는 꿈.”

속삭이듯 말하는 은하의 목소리는 잠꼬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너무 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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