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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앤 라이-27화 (27/58)

27화.

‘엄마 살려 주세요.’

그날은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다.

엄마와 아빠 모두 집을 나갔는데 오기로 한 지 세 시간이 지나도 집에 오지 않았다. 누구에게 전화를 해 봐야 할지 모르겠어서 발만 동동 구르는데, 다음 날 설준호가 찾아왔다.

그는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주었다. 울먹이는 나를 두드려 주거나 위로하는 제스처는 없었다. 그저 해야 할 일만 한다는 듯 아버지의 죽음과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일곱 살 꼬맹이라고 해도 죽음이 어떤 건지는 알고 있었다. 그건 이제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온화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던 낮은 목소리도, 심술이 날 때마다 내 뺨을 비비적거리던 수염 돋은 얼굴의 온기도, 이제는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아직 살아남은 엄마가 너무 소중했다. 그래서 빌었다. 내 엄마 살려 달라고. 제발 좀 살려 달라고.

눈물을 철철 흘리며 주저앉은 내 앞에 설준호가 무릎을 굽혀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래. 내가 네 엄마가 죽지 않게 해 줄게. 그럼 내가 하자는 대로 할래?’

‘네. 할게요.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내 머리를 설준호가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 영악한 위로의 스킨십을 마지막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설준호가 내 몸에 손을 댄 적은 없었다.

‘이제부터 우리가 네 가족이 될 거야. 날 엄마라 부르고, 여기 이분을 아빠라 불러야 해. 집에 가면 네 동생도 있어.’

‘네? 근데 전…… 전 엄마가 있는데요.’

‘네 엄마는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어. 식물인간이 뭔지 아니?’

고개를 젓는 내게 강유화가 인자한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이제 네 엄마는 널 지켜 줄 수 없다는 뜻이야. 네 밥을 챙겨 줄 수도, 널 위해 돈을 벌어 줄 수도 없어. 그냥 침대 위에 누워서 숨만 쉰다는 뜻이야.’

‘…….’

‘그래도 걱정 마. 아직 살아는 있으니까.’

너무나 자상하게 잔인한 말을 내뱉던 그녀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설준호는 내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유산을 포기하는 대신, 엄마를 최고 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병원에 데려다 놓고 간병인까지 붙여 주었다.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지만 일주일에 한 번, 엄마를 보러 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내일 엄마 보러 가는 날이지? 날도 좋은데 같이 가자.]

상념을 깨는 효주의 문자에, 한참 동안 들고 있던 커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메시지를 확인하다 설준호에게서 온 문자를 뒤늦게 확인했다.

[주말에 윤오 군이랑 자리 마련했다. 가서 잘 달래 봐.]

그래. 애초에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까라면 까는 거지.

언제나 그랬듯, 깊이 생각하는 건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 * *

“또 너냐.”

“안녕.”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가 막힌다는 듯 웃고 있는 정윤오를 맞닥뜨렸다. 평소와는 달리 왠지 좀 지친 표정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어쩐지. 웬일로 호텔에서 만나자고 하나 했네.”

“누가 불러서 왔는데?”

“있어. 그런 사람. 네가 알 건 없고.”

창 너머에서 때 이른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다가오던 웨이터가 가라앉은 분위기에 눈치를 보며 말을 건넸다.

“주문하셨던 코스, 준비해 드릴까요?”

나는 당장이라도 정윤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진짜 어디 아픈가. 심드렁하게 비 오는 풍경을 보고 있는 옆모습이 묘하게 느껴졌다.

“비 오는 거 좋아해?”

“뭐?”

고개를 돌린 정윤오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너무 뚫어지게 보길래.”

“좋아하는 게 아니라 짜증나는 거지.”

“…….”

“엄마가 비 존나 많이 오는 날 뒤졌거든. 그것도 자기가 직접 손목 그어서.”

정윤오의 친엄마가 일찌감치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저런 개차반이 됐나. 동정은 아니지만 아주 조금 이해는 갔다.

“왜, 불쌍해? 불쌍하면 한번 자 주든가.”

잠자리는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짧게는 십 분, 길게는 두 시간. 두 인간이 몸을 섞고 체액을 나누는 행위일 뿐.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고 모럴을 적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 가자.”

레스토랑 위가 바로 호텔이었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날 나는 정윤오와 뜨겁지만 건조한 잠자리를 가졌다.

“너 존나 잘한다?”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

머리카락까지 적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간단히 몸만 적시고 나왔다. 가운만 걸치고 있던 정윤오가 소파에 걸터앉아 담배를 씹어 대고 있었다.

“야, 너 나랑 내기 하나 할래?”

“내기?”

“어. 내가 요즘 존나 심심해서. 뭐라도 안 하면 다 부숴 버릴 거 같거든.”

살살 달래 주라고 했으니 일단 얘기라도 들어 보자 싶었다. 그런데 막상 나온 이야기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내 친구 중에 26년 동안 동정인 애가 있거든. 걔 동정 좀 떼 주라.”

“뭐?”

순간, 열일곱 살 때 기억이 떠오르면서 뒤통수가 당겼다. 창녀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얘가 나를 진짜 이상하게 보네. 정윤오와 몸을 섞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내 무덤을 팠다는 생각만 들었다.

“너 정도면 그 새끼 넘길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어때, 할래?”

“하. 하다 하다 별…….”

“네가 해내면 약혼해 줄게.”

툭 내던진 정윤오의 말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솔직히 난 약혼하나 마나 상관없거든? 근데 넌 꼭 해야 하잖아. 저번에 보니까 꼰대들 눈치 엄청 보드만. 아니야?”

그렇게 티가 나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일단은 가장 익숙한 표정을 만들었다.

“그냥 하는 말 아냐. 내가 쓰레기라도 약속 하나는 잘 지켜. 그리고 이거 쉬운 것도 아니다? 그 새끼 존나 어려워. 10년 넘게 한 여자만 보고 살아서, 절대 안 넘어올걸.”

일부러 살살 긁는 듯 정윤오는 시비를 걸어왔다.

“그 친구 싫어하니?”

“아니, 사랑하는데?”

“친구 아닌 거 같은데.”

“맞아. 존나 베프야.”

“근데 이런다고?”

“어. 혼자 청승 떨고 있는 거 지랄 맞아서.”

10년 넘게 순애보를 간직하고 있는 게 지랄 맞다는 걸까. 그게 어때서. 난 좋을 거 같은데. 정윤오가 일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정말 신기한 종자이긴 했다.

“정윤오.”

“아파트 준다고 했다며.”

“…….”

“그거 내가 줄게. 걔랑 한 번만 자면.”

설준호의 집에 묶여 있는 이유는 단지 돈 때문이었다. 냉대를 받고, 뺨을 맞아도 어찌 됐든 그들의 돈으로 엄마가 숨을 쉬고 있으니까.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그 정도 숨이라도 붙여 놓을 수가 없으니까.

“와……. 이게 흔들리네.”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몰려 있었는지.

이런 비인간적인 제안에 사정없이 흔들릴 만큼, 나는 미치도록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 *

‘잘 생각해 봐. 너한테는 완전 이익이잖아. 잘만 하면 아파트도 받고, 약혼식 때문에 꼰대들한테 잔소리 안 들어도 되고.’

‘…….’

‘근데 이왕 하는 거 재밌게 좀 하자.’

‘뭐?’

‘내기면 내기답게. 승자와 패자가 있어야지.’

정윤오는 차태건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하겠다고 했다. 그의 미션은 나를 유혹해 약혼식을 파투 내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도저히 정윤오의 저의를 알 수 없었지만, 내게는 오히려 득이 되는 일이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걔한테는 뭘 걸 건데?’

‘글쎄? 이 정도면 되려나?’

지갑 옆에 놓인 차 키를 무심히 가리키며 정윤오가 씩 웃었다.

‘너한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게임이야. 너는 이게 내기인 걸 알고, 그 새낀 모르니까. 딱 한 번, 한 번만 자면 돼.’

악마가 현신하면 이런 모습일까. 아마 진짜 악마가 이런 제안을 하며 나에게 영혼을 팔라고 했대도 나는 팔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렁이를 문 물고기처럼 덥석 정윤오의 제안을 물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그동안 내 욕구에 맞춰 잠자리를 가졌던 것과 뭔가를 대가로 받으며 잠자리를 가지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니까. 그런 나를 정윤오는 한동안 건드리지 않았다.

나를 건드린 건 설은진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조잡하고 짜증나는 방식으로.

―내가 진짜 그년 머리채 한 번 잡아 줄까?

“하, 아냐. 됐어.”

―어딘데.

“학교 가려고. 교수님 직접 뵙고 얘기해야지.”

―갔다가 여기 들러. 집에 가서 밥 먹다 또 체하지 말고.

“알았어.”

번역 작업을 하면 USB와 클라우드에 언제나 이중으로 백업을 해 놓았다. 하지만 정윤오와의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클라우드 계정이 로그아웃 되어 있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하늘이 도왔는지, 어떻게든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 애쓰는 설은진의 노력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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