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29화 (29/58)

29화.

동정인 것치고, 아니, 동정인 주제에 차태건은 잠자리를 너무 잘했다. 한번 흥분을 끌어내면 쉽게 끝내주지 않았고, 정말 죽기 직전까지 쾌감을 이끌어 냈다.

저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해서만 관계를 갖는 느낌이었다. 끝난 후에 쉬는 시간을 주었다가 다시 느릿하게 쾌감을 일으키는 바람에 시간도 길어졌다.

잠자리에 지쳐 잠든 건 처음이라서, 눈을 떠 새벽빛이 들이치는 창밖을 확인했을 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차태건이었다.

“안 갔네? 먼저 갔을 줄 알았는데.”

“깨는 거 보고 가려고.”

“다정하네.”

응. 차태건은 다정했다. 나에겐 조금…… 해로울 정도로.

한 번 잤다고 그새 몸 정이라도 든 건가. 애틋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차태건의 시선을 피하려 괜히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잠자리는 끝났으니 더 이상 볼일은 없었다. 옷을 입고 나가면 되는데 왠지 행동이 굼떠졌다.

“나 좀 도와줄래?”

“응?”

그렇게 애틋하게 보더니, 이제는 혼란스러워한다. 표정이 다 드러나는 남자다. 착하네.

“나 정은수 좋아하는 거 맞아. 근데 이제 그만하려고. 어차피 안 될 거 알거든.”

“…….”

“잊을 수 있게 네가 도와줘.”

“내가? 어떻게?”

“나랑 자자. 너 약혼하기 전까지만.”

정윤오가 차태건의 동정을 떼 달라고 했던 것보다 차태건의 파트너 제안이 더 서글펐다면, 내가 조금 이상한 걸까.

“……재밌네.”

몇 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태건은 나쁜 놈이 아니라는 걸. 그럼 뭘까. 그가 정윤오에게 받기로 한 건. 문득 그게 궁금해지고 말았다.

* * *

“쌤,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좋은 기회가 있어서 간다는데.”

“그래도.”

“가서 적응 잘하고. 혹시라도 힘들어서 수다 떨고 싶으면 선생님한테 연락해.”

“네.”

열세 살부터 3년 동안 공부를 봐주던 정은이가 미국에 유학을 간다며 작별 인사를 고했다. 1년 전 부모님의 이혼으로 잠시 방황하다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엄마를 따라 이민을 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이제 나 없으면 선생님 심심해서 어떡해요.”

“그러게. 우리 정은이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선생님, 식사하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여러 사람의 공부를 봐주었지만 유독 정은이에게 더 마음이 가는 이유가 있었다. 오래된 사이이기도 했고, 나를 많이 따르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항상 과외가 끝나고 함께 먹는 집밥이 아주 따뜻했다.

“선생님, 이거 받으세요.”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커피까지 내준 정은 엄마는 테이블 위에 뭔가를 내려놓은 후 정은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이게 뭐예요?”

“그동안 정은이 잘 봐 주셔서 준비했어요. 비싼 건 아니고, 그냥 헤어지기에는 섭섭하니까.”

리본으로 예쁘게 묶인 상자를 풀어 보니, 안에는 샛노란 오리 인형 열쇠고리가 들어 있었다. 쨍한 색감에 기분이 좋아져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거봐. 내가 쌤이 좋아할 거라고 했지?”

“그러네? 난 진짜 몰랐는데.”

“쌤 완전 차도녀같이 생겨서, 은근히 귀여운 거 좋아한다니까?”

“응. 귀여운 게 짱이야. 그래서 내가 정은이 좋아하잖아.”

배시시 웃는 정은이의 얼굴을 보며 갑자기 속에서 튀어 오르는 어떤 감정을 애써 참아 내렸다.

“감사해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끝까지 웃으며 인사를 나눴지만, 돌아서는 순간 발걸음에 힘이 빠졌다.

아무래도 정신과 상담을 한번 받아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작은 이별 하나에도 속울음이 치고 올라와 버리니. 병명은 심각한 애정 결핍. 치료법은…… 있으려나?

정은이가 가 버리는 게 너무 섭섭해서, 집에 돌아와 한참 동안 멍을 때렸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윤오의 전화를 받았다.

“온 김에 술이나 한잔 따라 주고 가라.”

“뭐?”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피는 못 속인다는데.”

제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윤오는 또 같은 수법을 썼다. 그쯤 되니 그의 패턴이 눈에 읽혔다. 차태건에게 내가 불쌍하게 보이게끔 하려는 시도겠지. 근데 어쩌나. 내기는 끝났는데.

정윤오에게 이미 차태건과 잤다는 걸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사실 나도 잘 몰랐다. 차태건이 나를 어떻게 꼬시는지 보고 싶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명색이 내기라는데 이렇게 쉽게 끝나 버리면 싱겁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자리를 박차고 나온 나는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차태건의 말에 조용히 차에 올랐다. 적당히 거절하고 혼자 갈 수도 있었지만, 왠지 피곤했다.

“이 차는 계속 네가 가지고 다니는 거야?”

“거의.”

문득 차태건에게는 차 한 대 정도면 되지 않겠냐는 정윤오의 말이 떠올라 은근히 떠보았다. 하지만 그는 욕심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럼 그렇지. 얜 이런 거에 넘어갈 애 같지는 않아. 나랑은 다르게.

효주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와서 책방까지 들르게 됐다. 내 유일한 쉼터인 그곳에 어색하게 서 있는 차태건을 보고 있자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운동했다는 말을 핑계로 눈을 굴려 대는 모습이 조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우리 집 말고 너희 집으로 가자.”

“어?”

“정윤오한테 할 말 있어서.”

“무슨 말. 지금 가도 그 새끼 없어.”

“일단 가.”

생일이라는데, 마지막까지 정윤오의 뒤치다꺼리나 하다가 마무리 짓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집에 데려다주고 깔끔하게 굿바이 인사를 해야지, 그땐 진짜 그런 마음이었다.

“이제 5분밖에 안 남았다. 오늘 하루 잘 보냈어?”

그때, 잠시 입을 다물고 그날 하루를 반추하는 차태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수런거렸다. 언제나 무뚝뚝하기만 하던 얼굴이 한순간 계면쩍어졌다가 이내 쓸쓸함이 깃들었다. 저도 모르게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끝에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기까지 했다.

아, 어떡하지. 얘 되게 외로워 보인다.

“생일 선물 줄까?”

“……무슨 뜻이야?”

“생일 선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

“자자. 나 약혼하기 전까지만.”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잘됐지 뭐. 내기에는 이미 이겼으니까. 약혼 전까지 이런저런 사람 만나는 것보다 한 사람 만나는 게 낫지. 애가 따뜻하기도 하고.

아마 그땐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속절없이 차태건에게 빠져들고 말리란 걸. 알면서도 그냥 그러고 싶었다는 걸, 지금은 인정해야 할지도.

4. 침식 ⑵

“와, 날씨! 진짜 장난 아니네.”

안으로 들어오는 효주의 이마에 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냉동실에 넣어 놓았던 캔 맥주를 꺼내 주자, 효주가 씩 웃으며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러다 소문나게 생겼어. 은하수 책방 주인 술꾼이라고.”

“아직도 안 났나? 난 이미 다 퍼진 줄 알았는데.”

죽는다, 장난스럽게 눈을 흘긴 효주가 시원하게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는 은하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괜찮겠어? 너 어제도 일하느라 밤새웠다며.”

“그럼 오늘이 어떤 날인데. 당연히 괜찮지.”

지난 6개월 동안 기획했던 효주의 두 번째 책이 드디어 빛을 보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아예 출판사와 날을 잡고 북 토크를 하기로 했던 터라 오전부터 일정이 꽤 빠듯했다. 오늘 하루 책방 문을 닫고 세팅을 하기로 한 효주는 나에게 의상 등을 체크받기로 했다.

“이게 뭐야? 무래리 시외버스 터미널?”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 화면을 보던 효주가 의문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미처 화면을 닫을 생각을 못 했던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충 얼버무렸다.

“아, 뭐 검색 좀 하다가. 이거 도수 없는 거 맞지?”

핑크색 무알코올 샴페인 여덟 병, 카나페용 치즈가 두 통. 혼자서 품목을 체크하며 중얼거리니 효주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그냥 지나쳤다. 5분 정도가 흘러 효주가 신경을 돌리자마자 나는 노트북 화면을 자연스럽게 닫아버렸다.

문득 할머니 기일 때문에 고향에 내려간다는 차태건의 말이 떠올라 검색창에 무래리를 쳐 본 게 시작이었다. 생각보다 정보가 없어서 백서읍을 쳤다가, 그도 신통치 않아 성진군의 역사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음, 바짝 말린 조기로 유명하고, 1970년대에 인구가 급감해서 시에서 군으로 내려왔고. 그 와중에 무래리에 대해 나와 있는 거라곤, 5년 전 누가 포스팅 해 놓은 시외버스 터미널 시간표 사진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검은색, 빨간색 매직으로 손으로 일일이 적은 옛날 시간표였다.

이것만 봐도 차태건이 얼마나 깡촌에서 올라왔는지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서울깍쟁이 스타일은 아니지. 그렇다고 완전 시골 촌놈 같은 것도 아니지만.

“은하야. 이게 어울려, 이게 어울려?”

본격적으로 의상을 몸에 대보는 효주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오른쪽.”

“오케이.”

다시 한번 거울을 보며 의상을 점검하는 효주를 보던 그때, 테이블 위에서 진동이 울렸다.

[8시 30분 버스.]

서울에 언제 오냐는 메시지에 이십 분 만에 온 차태건의 답장이었다.

“무뚝뚝하기는.”

피식 웃음을 흘리다 문득 창밖으로 시선이 향했다. 초여름의 햇살이 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아.”

네 시간 후면 차태건을 볼 수 있다. 그 사실에 왠지 가슴이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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