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30화 (30/58)

30화.

북 토크가 끝난 후 차태건과 나눈 잠자리는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마음대로 하라고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줄은.

게다가 저는 끝까지 하지 않고 나를 재워 버리다니. 그렇게 푹 잔 것도 오랜만이라 웃음이 났다. 별장에 같이 가자는 은수 언니의 말을 거절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별장에서 직접 목격한 정은수와 정윤오, 차태건 세 사람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아, 진짜 심각한데. 정윤오가 차태건의 순애보를 왜 지랄 맞게 생각했는지 이해가 될 듯도 했다.

먼저 서울로 올라가 버린 정윤오와 정은수, 그리고 혼자 남게 된 차태건. 굳이 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이래 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차태건이 혼자 남았을 것이라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외로움이 외로움인 줄도 모르는 이 아이만 떨어져 나왔으리라고.

차태건은 그랬다. 스스로는 무던한 성격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언뜻언뜻 그 얼굴에 쓸쓸함이 배어나왔다. 왜 그렇지 않겠어. 10년 동안 바라본 사람이 저에게 눈길도 안 주는데. 아니,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만을 안기고는 곁을 떠나지도 못하게 하는데.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에 따라오는 부작용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안아 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뭐, 결국 기절할 듯 군 건 나였지만. 그 와중에도 차태건은 몹시 자상했고, 따뜻했다.

* * *

“한번 생각이나 해 봐.”

“제가 졸업한 지가 언젠데요.”

“재학생, 졸업생 다 포함이라니까. 너 아직 공부 욕심 있잖아.”

그즈음에는 뭔가 생활이 안정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잠도 푹 잤고, 그러다 보니 마음도 퍽 여유로워졌다. 그 와중에 교수님이 말해 준 미국행 제안은 또 다른 탈출구가 되는 기분이었다.

내가 졸업한 대한대학교는 오래전부터 뉴욕에 있는 U대학과 학점 인정이 되는 교환 학생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원래는 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올해부터 교수님의 추천에 한해 졸업생 세 명에게 더 기회를 부여한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조교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게 관례였는데, 고맙게도 고윤정 교수는 나를 끼워 주었다.

“다음 주까지 말해 주면 돼. 좋은 기회니까 이왕이면 긍정적인 대답 부탁해.”

“네, 감사합니다.”

“그래. 난 이제 수업. 조심히 가.”

갑자기 다가온 기회에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유학. 유학이라. 정말 이곳을 떠난다면 기분이 어떨까.

어떻게든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될 것도 같은데. 지금보다 더 작은 병원으로 엄마를 옮기고 간병인을 구하면. 그것도 안 되면 눈 딱 감고 효주에게 부탁을 하든 어쩌든. 1년, 1년이면 그렇게 오랜 시간은 아닐 거 같은데.

“하.”

밖으로 나오니 웃음부터 나왔다. 뭔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어서. 엄마 때문에 갈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래도. 그냥 길이 하나 보이는 것 같아서.

위이잉.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얼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강인자 선생님. 엄마의 간병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은하 학생, 오랜만이에요.

“네, 잘 지내셨죠? 근데 어쩐 일로.”

―다른 게 아니라……. 아, 이 말을 할까, 말까 좀 고민하긴 했는데.

머뭇거리는 말투에 괜히 걱정부터 앞섰다. 뭐지.

―그게, 어제 환자가 손가락을 잠깐 움직였거든요.

“네?”

―별건 아니고, 진짜, 잠깐! 한 3초? 그 정도밖에 안 되기는 한데…….

“아…… 엄마가요? 엄마가 손가락을 움직였다구요?”

―괜히 신경 쓸까 봐 말할까 말까 고민하긴 했는데, 그래도 처음이니까.

처음이었다. 20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가 아주 조금이라도 자의로 움직인 것은. 그래서일까. 말문이 막힌 나는 오히려 너무 담담해서 놀라울 지경이었다.

―내가 경황이 없어서 동영상 같은 것도 못 찍었네. 혹시 괜한 말 한 건 아니죠?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후에도 머리는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엄마가 움직였다. 엄마가 움직였다. 그 말만 되 뇌이며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3초도 안 된다는 그 의미 없는 움직임은, 상상 속에서 점점 부풀어 올라 내 가슴을 펑 터뜨려 버렸다. 그 3초가 30초가 되고, 30초는 또 30시간이 되어 언젠가는 눈을 뜨고 목소리를 들려줄 것만 같은 환상을 안겨 주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알코올의 힘을 빌린 상상은 평소 가라앉아 있던 내 기분을 허공에 두둥실 띄워 놓았다.

“안주 먹으면서 마셔.”

차태건은 참 열심히도 내 끼니를 챙겼다. 내가 그렇게 마른 것도 아닌데. 어딜 가든, 그는 꼭꼭 내 접시부터 채웠다. 이쯤 되니 눈에 보였다. 다정함은 이 아이의 천성이라는 것을.

누구에게나 내려지는 자상함이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잘생겼다는 말에 수줍어하는 그 모습도 보기 좋아서 계속 놀려 댔다.

“똑바로 좀 걷지?”

“똑바로 걷고 있는데?”

“두 번만 똑바로 걸었다간 전봇대랑 키스할 거 같은데.”

아주 오랫동안 걷고 싶었다. 차태건의 손을 잡고 집이 아닌 곳으로, 끊이지 않는 길을 걷고 싶었다.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걸어가면서 오늘 하루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말해 주고 싶었다.

아아. 도대체 언제 이렇게 돼 버린 걸까.

어느 순간부터 차태건이 내 속에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따뜻함이 갈라진 내 마음속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다는 것도.

비록 나를 만나는 차태건의 목적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의 이 온기가 좋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차태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늘 뭐 좋은 일 있었어?”

“좋은 일이라…… 있었지. 만세!”

갑자기 꽥 내지른 소리에 차태건이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덩치는 큰 게 쫄기는. 그게 또 귀여워서 냅다 그 입술에 뽀뽀를 해 버렸다.

“설은하.”

“미안. 내가 오늘 진짜 기분이 좋아서.”

놀란 차태건의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나는 그런 차태건을 모르는 척했다.

“아……. 벌써 다 왔네. 이제 내가 데려다줄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짧았다. 헤어지기 싫은데.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됐어. 그만 들어가.”

“왜. 내가 데려다줄게. 가자.”

“기분 좋을 때 이불속에 들어가. 그래야 좋은 꿈꾸지.”

덩치는 산만 한 게, 차태건은 이상한 데서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 오늘은 네 말을 듣는 게 좋겠네.

“차태건.”

“응?”

“지금 기분 같아선 너한테 진짜 죽여주는 잠자리를 선물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러지 않을래.”

“…….”

“그냥……, 이 기쁨만 가져가. 그리고 너도 좋은 꿈 꿔.”

집에 들어가기 전, 눈이 마주친 차태건에게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기쁨을 나누어 주었다.

소중히 다뤄 줘. 이거 되게 귀한 거야.

* * *

한 달에 한 번 엄마를 방문하는 날이 다가왔다. 엄마가 3초 정도 움직였다는 이야기를 효주에게 들려주자 그 큰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진짜?”

“응. 그래서 내일은 좀 일찍 가 보려고.”

“오, 나도 같이 가자.”

“넌 가게 봐야지.”

“왜, 잠깐 닫으면 되지.”

“너 진짜 장사 이따구로 할래?”

“으으, 잔소리.”

효주가 책방을 운영하게 된 건 아주 우연히 시작된 일이었다. 일찌감치 직장을 때려치우고 글을 쓰겠다고 천명한 효주에게 효주의 부모님은 다 낡은 중고 서점이었던 은하수 책방을 소개해 주었다. 상표며 뭐며 바꾸기 귀찮았던 효주는 그대로 인계받아 인테리어만 바꿨다. 그런 다음 출판업을 등록하고 사장 자리에 앉았다.

준비하는 과정에 어째 내 손이 더 들어가는 것 같아 힘들었지만, 막상 책방이 생기니 좋았다. 가끔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에는 일을 핑계로 여기 쪽방에서 잠을 자고 갈 때도 있었다. 물론 위험해서 자주는 못 했지만.

“같이 갈 사람 있어.”

“누구. 차태건?”

눈치가 빠른 효주는 내가 차태건에게 다른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쉽게 알아챘다. 하지만 뭐든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내가 크게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현실도 잘 알았다.

“누구라고 하게?”

“그냥 뭐.”

딱히 설명할 말을 정해 둔 건 아니었다. 친구라고 해도 되고, 예전에 신세 진 분이라고 해도 되고. 아니면……. 걘 어디 가서 함부로 입 열고 다닐 애는 아니니까, 엄마라고 고백을 해 봐도 되고.

“그래. 간 김에 데이트나 하고 와라.”

이왕 보여 주는 거 멀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 멋진 옷을 입고 오라고 차태건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검은 슬랙스에 하얀 셔츠를 입었다는 얘기에 너무 멋있어 보여도 곤란한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내가 드디어 미쳤구나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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