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약속 시각보다 삼십 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마음이 수런거려서 도저히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늦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한 게 먹혀들었는지, 멀리서 본 카페 안에서 차태건이 책을 읽고 있는 게 보였다. 기특하네.
하지만 잠시 후 누군가의 전화를 받은 차태건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다급히 어딘가로 전화를 돌리던 차태건은 바로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무슨 일이지. 표정으로 봐서는 꽤 심각해 보이는데.
약속이 깨져 조금 속상했지만, 그보다 차태건의 표정이 더욱 마음에 남았다. 큰일 아니어야 할 텐데.
하지만 큰일은 나에게도 일어났다. 엄마가 사라졌다.
“어딨어요.”
“…….”
“엄마 어디 있냐구요!”
“옮겼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했잖아. 결혼 진행 제대로 안 되면 옮길 거라고.”
“아버지!”
차태건 없이 혼자서 병원을 찾아갔을 때 병실은 이미 비어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간병인에게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수납 창구에 가서 물어보려던 때, 마침 마주친 설준호의 비서가 나를 회사로 이끌고 왔다.
“결혼할 거예요. 약혼 날짜 잡으면 되잖아요.”
“정 사장 아들이 아직 거부하고 있다던데.”
“…….”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한다고? 이 결혼이 뭐라고. 나를 팔아먹을 곳이 그 집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제대로 일 진행된다는 얘기 들리면 네 엄마 어디 있는지 말해 줄 테니, 그런 줄 알고 나가 봐.”
“아버지.”
“나가라니까.”
“이대로는 못 나가요. 이유 제대로 말씀해 주세요. 아니, 어딨는지 말해요.”
“나가.”
“제대로 말하라구요!”
팍! 둔탁한 뭔가가 뺨에 날아들었다. 순간 골을 울리는 느낌에 사고가 멈췄다.
설은진에게 발로 차이고 강유화에게 뺨을 맞아도, 설준호가 직접 내게 손을 댄 적은 없었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그나마 이 사람은 나와 피가 이어져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가족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근데 그것도 아니었네.
아직도 충격 받을 게 남아 있다는 게 더 충격이었다. 무슨 기대라도 남아 있었던 거야? 대단하다, 설은하.
그대로 나와서 책방으로 갔다. 늘 하던 대로 좁은 쪽방에 몸을 눕히고 한쪽 벽을 끊임없이 노려보았다. 그러다 사위가 어둠에 잠기면 몸을 웅크리고 귀를 막았다. 그렇게 있으면 잠시나마 고요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가지 못했다.
“함부로 행동하고 다니지 마.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항상 머리에 새기고 있어.”
설준호는 웬만하면 직접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여기까지 온 걸 보면, 그만큼 이번 결혼이 저에게 중요하다는 얘기겠지.
“네. 명심할게요, 아버지.”
어차피 엄마의 행방을 모르는 이상, 그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 까라면 까야지.
* * *
“언제 왔어?”
침울하게 서 있는 차태건을 보고 가장 먼저 들었던 마음은 안도감이었다. 그냥, 보니까 안심이 돼서. 안아 주니 좋아서. 살결을 쓸어 주는 게 따뜻해서.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와 버렸다.
“너 이럴 때 보면……. 진짜 날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 같아.”
“…….”
“되게 소중하다는 듯이 만져 주잖아. 사실 나 그런 느낌 받아 본 적 없거든.”
하지 말걸. 하지 말걸.
“좋아해.”
은수 언니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면서,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차태건의 눈빛은 너무나도 흔들리고 있었다.
뭔데. 너 무슨 일이 있었는데. 왜 이렇게 절절한 건데.
“좋아해, 진심이야.”
다정하고 착한 네가 이렇게까지 거짓말하는 이유가 뭔데.
“좋아해. 그러니까 안아 줄게. 계속 이렇게 쓰다듬어 줄게.”
아팠지만 좋았다. 처음이라서. 누가 온몸으로 나를 껴안고, 그렇게 절절하게 좋아한다고 말해 준 게 처음이라서.
그래서 그냥 믿기로 했다. 비록 아닌 걸 알면서도 그게 진심이라고. 눈빛은 떨리지만, 그래도.
나도 너를 좋아하니까. 결국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됐으니까. 좋아해, 차태건. 나도 너를 좋아해.
속울음을 참으며 나도 함께 고백했다. 다행히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차태건과 함께 하는 순간순간이 소중했다. 이기적이지만, 그때만큼은 엄마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음이고, 몸이고 주고 싶은 것은 다 주었다.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주고, 그 와중에 나는 그의 추억 한 자락을 얻었다.
차태건을 유독 따르던, 정윤오가 다른 곳으로 보내 버리려던 강아지를 차태건의 아버지가 시골로 빼돌린 이야기였다. 별거 아닌 이야기인데도 이상하게 가슴에 오래 남았다.
“좋다. 해피엔딩이네.”
우리의 이야기도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일에 대한 걱정 없이, 그저 행복하게만 지낼 수 있다면.
고백하고 싶었다. 정윤오와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하고, 진심으로 너를 좋아하고 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사실은 네가 내 발뒤꿈치에 밴드를 붙여 주었을 때부터 반했노라고, 그런 작은 손짓에 넘어갈 만큼 그렇게 춥게 살아왔노라고 모조리 말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아주 잠깐 해피엔딩을 꿈꿔 본 것뿐인데,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모든 것에 제동이 걸렸다. 정윤오의 전화 한 통이 걸려 오면서.
* * *
“웬일이야?”
지난번 몸을 섞었던 호텔방으로 나를 부른 정윤오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평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그 표정이 더 의뭉스러웠다.
“우리 한번 할래?”
“미쳤니?”
“왜, 못 하겠어? 차태건이랑 한 게 너무 좋아서?”
“……뭐?”
“씨발, 얼마나 좋았으면 말도 안 하고 몇 번씩이나 자냐. 존나 앙큼하게.”
어떻게 알았지. 설마 차태건이 말했나.
“그래도 명색이 약혼자 친군데 너무 붙어먹지는 말지.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어.”
씽긋 웃는 정윤오에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식간에 머리가 하얘진다는 게 어떤 건지 그때서야 알았다.
“암튼 네가 이겼으니까 약혼 날짜 잡아.”
“……아.”
얼떨떨한 기분으로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정윤오에게 불쑥 말을 꺼낸 건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근데 차태건은?”
“어?”
“걘 졌잖아. 원래 뭘 받기로 했는데?”
“아, 정은수 유학.”
“뭐?”
“그 새끼가 이기면 정은수 유학 보내 주기로 했다고.”
“아.”
그랬구나. 끝내 차태건이라는 사람의 옆에는 정은수의 이름이 걸릴 수밖에 없구나. 너의 절절했던 고백의 끝에는 결국 내가 아니라 은수 언니가 서 있었구나.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가슴이 저렸다.
“……우리 없던 걸로 할까.”
“뭐?”
“내기. 없던 걸로 하자고.”
의아하게 보는 정윤오를 뒤로하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그냥, 그냥 꺼져 버리고만 싶었다.
“결혼 안 해요. 안 할래요.”
“설은하.”
차갑게 굳은 눈빛이 얼굴에 쿡 박혔다. 매서운 눈길로 나를 보는 설준호의 곁에서 손톱을 다듬던 설은진이 피식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가서 해결을 봐야지. 오랫동안 머릿속에 세웠던 계획을 담담히 읊었다.
“엄마 병원도 이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빚을 지든 몸을 팔든, 제가 다 감당할 테니까 엄마 어딨는지만 말해 주세요.”
“…….”
딱딱하게 굳은 설준호의 표정이 낯설었다. 왜 저렇게 보는 걸까. 팔아야 될 물건이 제 손을 빠져나가서 그렇게 아까운가?
“쟤 지금 남자에 돌아서 그래요, 아빠.”
“뭐?”
“저번에 보니까 집 앞에 이상한 놈 하나 끼고 있더라고. 평소랑 좀 다르던데?”
깐족거리며 참견하는 설은진의 첨언에 설준호의 얼굴이 일변했다. 잠시 후 흘러나온 그의 말에 설은진도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가 천한 고아 년 딸 아니랄까 봐.”
“…….”
“제 엄마 닮아서 몸 파는 줄은 알았다만, 뭐? 남자? 네까짓 게, 겨우 그딴 걸로 지금 내 말을 거역해!”
“아!”
갑자기 눈이 돌아 버린 설준호가 내 머리채를 잡고 지하실로 질질 끌고 내려갔다.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훈육을 한답시고 강유화가 자주 가둬 놓던 곳이었다. 지난번 뺨을 한 번 후려친 이후 제 본색을 드러내기로 했는지, 바닥에 날 내팽개치는 설준호의 힘은 무지막지했다.
사흘 동안 휴대폰을 뺏기고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마지막 날, 지하실로 내려온 설준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협박의 말을 지껄였다.
“이혼을 하든 뭘 하든 딱 1년만 버텨. 그 후엔 네가 뭘 하든 상관 안 할 테니. 네 엄마 찾으려면 내 말 듣는 게 좋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