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아, 안 되는데요. 그런 말씀 하시면…….”
“…….”
“전 자격이 없는데.”
그래, 난 자격이 없다. 널 속인 것도 모자라 결국 이별까지 고하고 말았잖아. 그러니까 난.
“내 아들 보고 싶지 않아요?”
“…….”
“…….”
“……보고 싶어요. 너무 보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제가 좋아해도 될까요.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그동안 속에 차 있던 눈물이 모조리 터져 나왔다. 그렇게 울음이 멈출 때까지 차태건의 아버지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 * *
아침부터 집이 소란스러웠다.
정윤오의 아버지가 소개시켜 준 사람들과 함께 봉사 활동을 가는 날이었다. 이런 일에는 영 관심이 없는 설은진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가는 내내 귓가에 박혀 들었다.
“언니, 저 이거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보육원의 아이들은 매사 너무 조심스러웠다. 예쁜 인형을 눈앞에 두고도 다른 아이들처럼 확 가져가는 게 아니라 눈치를 먼저 보고, 질문을 먼저 했다. 그 모습이 어렸을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은하 씨, 혹시 괜찮으면 아이들 목욕하는 거 도와줄 수 있어요?”
“네.”
세 살 되는 아이들을 한 명씩 씻기다 보니 온몸에 물이 튀었다. 이리저리 장난을 하는 아이들이 성가시기도 했지만, 보드라운 살결은 기분이 좋았다.
“어, 은하야. 쫄딱 젖었네? 괜찮아?”
눈앞에 선 차태건을 보는 순간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눈을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어떤 감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
애타는 그 마음을 숨기지도 못한 채, 잘 지냈냐는 듯 서글프게 웃는 그 얼굴을 도저히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 더 했다간 정말 못 참을 것 같았으니까. 당장이라도 차태건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만큼 몰려 있었으니까.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 모든 일이 정리되고, 맨 처음으로 차에 올랐다. 그렇게 차를 타고 가는데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왔다. 아, 설은하. 이 나쁜…….
“저 잠깐만 내려 주세요. 휴대폰을 놓고 온 거 같아서.”
“아, 진짜! 넌 그냥 따로 와.”
설은진의 짜증내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보육원으로 미친 듯이 달렸다. 덜컥거리던 차태건의 눈빛이 계속 맘에 걸렸다. 아마 이번에도 넌…….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
“……그러게.”
아무도 없는 텅 빈 공간에 그를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오랜 시간 뒷모습만 봐 왔을 네가 나 때문에 또 쓸쓸해지는 건 싫어.
“보고 싶었어.”
그렇게 참고 참았는데도, 한번 보니 무너져 버렸다. 숨결을 나누고, 사랑을 고백했다. 도망가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설마 산 사람을 죽이겠어. 엄마, 미안. 한 번만 버리고 갈게요.
* * *
어설프게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약혼식 당일까지 아무 내색 않고 지냈다.
메이크업까지 완벽하게 받고 드레스도 입었다. 식장에 가서 잠깐 시간을 달라고 한 뒤에 효주에게 부탁해서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우, 걘 어떻게 지 엄마 죽은 지 한 달이 다 돼 가는데 모를 수가 있어? 그래 놓고 저 안에서 하하호호 웃을 거 생각하니까 징그러워.”
죽어? 누가?
“입조심해. 안 그래도 결혼 전에 그거 탄로 날까 봐 아버지가 노심초사하고 있으니까. 결혼해서 1년 정도만 버티면 돼.”
“그때까지 속일 수 있겠어?”
“지금까지 버틴 거 보면 몰라? 지 엄마 숨 붙어 있게 하겠다고 어떤 꼴을 당하고 살았는데.”
우연히 듣게 된 설은진과 강유화의 대화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갔다.
지금 저들이 말하는 사람이 과연 내 엄마를 말하는 걸까? 아무렇지 않게 엄마의 죽음을 말하고, 내 효용 가치를 떠드는 저들이 인간이 맞기는 할까?
머릿속에서 간단한 셈법이 계산되었다.
엄마가 죽었다. 이제 더는 매인 게 없다. 애써 결혼하려고 할 필요 없이 차태건과 함께 행복하게 살면 된다.
해답은 나왔는데,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난…… 그동안 뭘 위해서 살아온 거지.
질문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 공항으로 갔다. 멀리서 서성거리는 차태건을 보면서 조금씩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지금 그와 함께 떠나면 따뜻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나만의 가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년이고, 2년이고 그는 나를 사랑해 주겠지. 근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랑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고작 만난 지 3개월밖에 안 됐는데, 너무 성급한 건 아닐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래서 그냥 생각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나야, 정윤오. 만나자.”
* * *
비가 온다. 너무도 많이.
정윤오의 엄마도, 나의 아버지도 이런 날 유명을 달리했다. 엄마는……, 정확히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하. 내가 미친년이지.”
엄마를 버리려고 해서 그랬나보다. 나 혼자 살겠다고 마음먹어서.
정윤오와 정리를 하고 나와 거리에 서 보니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차태건을 사랑하던 마음도, 지금껏 버티고 섰던 날들도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응, 다 부질없다는 게 딱 맞는 표현이었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익숙한 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잠시 후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실려 있었다.
―너 어디야.
“효주야…….”
―어디냐고.
“엄마가 죽었대.”
―……뭐?
“나 어떡하지. 이제 갈 데가 없다.”
―네가 갈 데가 왜 없어. 당장 여기로 와!
“아……. 진짜 다 귀찮다. 나 너무 피곤해.”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제 더는 애쓰고 싶지 않았다.
5. 은하수를 위하여
“효주 씨! 은하, 은하 왔어요?”
공항에서 혼비백산 달려온 태건은 책방 문을 열자마자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대답도 듣기 전에 알 수 있었다. 효주는 완전히 패닉 상태였다.
“태건 씨, 은하 어떡해요. 우리 은하 어떡해요.”
“연락 왔어요? 어디 있대요? 집에 들어갔대요?”
고개를 젓는 효주의 눈에 눈물이 그득 들어찼다.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투명한 액체에 태건의 가슴도 내려앉았다.
“엄마가 죽었대요. 은하 어머니가 돌아가셨대요.”
“……네?”
“설준호 그 개새끼가 갑자기 병원을 옮겼다고 했는데, 그게 그래서일 줄은…….”
횡설수설하는 효주의 말에 태건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마저 이성을 잃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태건은 효주를 다독여 차마 은하가 다 얘기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아들 하나 낳아 주면 아파트를 준댔다고……. 집에서는 결혼 못 하면 평생 엄마 못 찾을 줄 알라고…….”
그동안 그 집에서 은하가 당해 왔던 일과 왜 그렇게 그 집에 묶여 있었는지, 정윤오와의 약혼이 은하에게는 정확히 어떤 의미였는지. 하나하나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을 듣는 동안 태건은 마음이 휘청했다. 설은하, 넌 도대체…….
“어디 다른 데 갈 데 없어요? 학교 선배나, 아니면……, 어디 잠깐 기댈 사람이라도.”
말을 하면서도 깨달았다. 자신이 은하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좋아하는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끝없는 죄책감에 속 깊은 사정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없어요. 은하, 진짜 갈 데 없는데.”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효주의 목소리에, 태건은 언젠가 집 앞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있던 은하를 떠올렸다.
텅 빈 눈, 달아오른 뺨, 축 처진 어깨. 은하는 지금 그때보다 더 지쳐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지쳤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서서히 가슴속을 죄어 오는 불안감에 태건은 눈앞이 아득했다.
위이잉. 그때 태건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황급히 발신자를 확인하던 그는 맥 빠진 모습으로 숨을 내뱉었다.
‘정은수.’
깨진 휴대폰 화면 사이로 비친 글자였다.
―건아, 어디야?
“왜.”
―그냥. 좀 답답해서. 바람 쐬러 가지 않을래?
예전이었다면 이런 요청에 마음에는 훈풍이 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여유가 없었다.
“정윤오는?”
―아, 그게.
정은수는 곤란한 목소리로 은하가 약혼식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을 전했다. 갑자기 사라진 은하 때문에 그 집도 난리가 났다는 얘기를 들어 보니, 은하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을 리는 만무했다.
“알았어.”
중요한 건 은하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드라이브 가자는 정은수의 말에 대답도 않고, 태건은 전화를 끊었다.
하아, 태건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머리를 감싸고 눈을 감은 채,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잡아야 할지 가늠해 보았다.
‘네가 이겼어. 난 졌고.’
결국 모든 것이 시작된 그 지점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정윤오. 어디야.”
전화기를 든 태건의 목소리가 몹시도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