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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앤 라이-35화 (35/58)

35화.

이 세상에 나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 가을 하늘은 몹시 높고 푸르렀다. 따스한 햇빛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태건의 얼굴로 시원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은하 모친의 간병인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처음 은하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전화를 끊어 버렸던 여자는, 은하가 사라졌다는 메시지를 줄기차게 보내자 이틀 후 전화를 걸어왔다.

“어르신, 오늘은 아드님이 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시네요?”

옆에 앉아 살갑게 말을 붙이는 요양 보호사에게 노인은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보호사는 짧은 순간 노인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슬쩍 닦아 주었다.

“왜 울고 그러세요. 이렇게 좋은 날에.”

“날이 좋아서. 그냥 눈물이 나네요.”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요양 병원은 치매 환자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환자들의 건강을 위해 마련된 너른 마당에는 키 큰 나무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뜨거운 햇빛을 막아 주었고, 군데군데 마련된 동물 모양 나무 벤치는 기꺼이 사람들의 쉼터가 되어 주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마실을 나온 열댓 명의 환자들과 요양 보호사들은 모두들 표정이 밝았다. 푸른 하늘과 가을빛을 담뿍 머금은 단풍에 대해 담소를 나누는 얼굴에는 하나같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하지만 태건은 웃을 수 없었다. 오후 2시의 나른한 햇빛, 그 밑에서 평화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평소라면 한없이 마음을 느슨하게 했을 이 모든 풍경이, 그에게는 몹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저…….”

태건은 조심스럽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혹시 은하 학생 때문에 전화 준 사람 맞아요?”

간병인은 앞머리가 희끗한 중년 여인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태건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세요. 차태건입니다. 제가 전화 드린 거 맞습니다. 앉으세요.”

“네.”

착잡한 얼굴로 태건을 보던 여자가 강인자라며 자신을 소개하고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혹시 은하한테 연락 받으신 거 없으신가 해서요.”

“그게, 몇 번 안 받고 끊으니까 그다음부터는 연락이 안 오더라구요. 그쪽 전화 받고 전화를 걸었더니, 휴대폰은 아예 꺼져 있대고.”

“네.”

“어휴, 내가 미쳤지. 돈 몇 푼에 눈이 멀어서.”

입술을 사리문 여자에게서 끄응,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느 때와 같이 평온하게 누워 있던 은하의 모친은 점심 식사 시간이 되기 5분 전, 갑자기 쇼크를 일으켰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숨을 거둔 건, 의사가 온 지 몇 분 되지 않아서였다.

당황한 강인자는 제 고용인인 설준호에게 먼저 전화를 돌렸고, 설준호는 곧바로 병원으로 사람을 보냈다. 강인자에게 수고비 명목으로 목돈을 쥐여 준 설준호는 은하에게 제 엄마의 죽음을 함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말도 안 되는 그 부탁에 강인자는 기함했지만, 막상 손에 든 목돈을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그 주책이나 떨지 말걸.”

“네?”

“돌아가시기 전에, 환자가 손가락을 움직였거든요. 의학적으로야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어쩐다 해도, 내가 2년 동안 봐 왔는데 그런 적은 처음이라서. 그날 기분 좋으라고 은하 학생한테 전화까지 했는데.”

“아.”

“처음엔 얼떨떨해하더니, 나중엔 감사하다고 몇 번을 인사했게요.”

“혹시, 그게 언제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짐작 가는 날이 있었다. 은하가 유독 환하게 웃던 날. 과음을 하고, 만세를 부르고, 마지막에는 제 기쁨을 태건의 이마에 낙인찍던 날.

“은하 학생이 광복절에 찾아오기로 했었으니까 그 4, 5일 전쯤이겠네. 아휴,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네?”

자책하는 강인자의 얼굴에 착잡함이 어려 있었다. 얼빠진 태건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는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제 간다고 마지막 인사라도 했던 건가 싶기도 하고.”

“그다음 날…… 돌아가셨다구요?”

“네.”

하, 태건은 맥이 턱 빠졌다.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은하가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던 것. 멋있게 입고 오라고, 절대 늦으면 안 된다고 당부했던 것.

‘도대체 누굴 만나는 건데 그래.’

‘이따 말해 준다니까.’

유난히 들떠 있던 은하의 목소리가 참 의아했었는데. 그때 넌, 내게 네 엄마를 소개시켜 주려고 했었구나. 네 엄마가……, 이미 죽은 줄도 모르고.

그때 저는 정은수에게 뛰어간다고 약속을 어겼다. 그러고는 삼일 뒤 나타나 성급하게 그녀를 안았다.

‘저번에 보려고 했던 사람 누구야?’

‘어? 아, 그냥 친구.’

‘친구?’

‘응.’

‘되게 친한 사람인가 보네. 소개까지 시켜 주려고 한 거 보면.’

‘응. 근데 어차피 그날 못 봤어. 그 사람도 일이 생겨서.’

‘그래? 그럼 다음 주에 볼까?’

‘아니.’

‘왜. 그때 인사 못 한 거 하고 싶은데.’

‘나중에. 나중에 보자. 그 사람도 바쁘대.’

효주는 그날 은하가 설준호에게서 뺨을 맞고 한동안 책방에서 지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태건이 찾아간 날은 마침 설준호가 그런 은하를 데리러 온 날이었다.

사실은 제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그저 설준호가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고만 생각한 은하는 또다시 그 집으로 기어 들어가야 했다. 엄마를 찾기 위해서.

뒤돌아 누워 있던 은하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던 게 생각났다. 잠시 후 흘러나왔던 말 또한.

‘너 이럴 때 보면……. 진짜 날 좋아하기라도 하는 것 같아.’

‘…….’

‘되게 소중하다는 듯이 만져 주잖아. 사실 나 그런 느낌 받아 본 적 없거든.’

그때 태건은 은하에게 고백했다. 그렇게 하면 은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애정 결핍인 그녀에게 무차별적인 고백을 쏟아부어 약혼식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제 친구들을 살리려고.

지옥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은하에게 차태건이 나타나 그 속을 휘저었다. 좋아한다고. 안아 주겠다고. 계속 쓰다듬어 주겠다고.

그날 심하게 몸을 떨던 은하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차태건, 이 비겁한 놈이 저를 진심으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친구들을 위해 고백했다는 것을.

“학생, 괜찮아요?”

태건은 뺨에 흐르는 눈물을 무성의하게 닦아 냈다. 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가 않았다. 너무 미안해서, 너무 아파서. 제 고백이 얼마나 비수가 되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아서. 그렇게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눈물을 쏟았다.

* * *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나 너 보기 싫은데.”

“…….”

“이제 보지 말자고 했잖아.”

“건아.”

하, 테이블 위에 차려진 밥상을 보는 태건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얼굴이 꺼칠하다며, 밥이라도 제대로 먹으라며 정은수가 데리고 온 곳이 하필 생선구이 백반집이었다.

“설은하랑 나랑 같이 도망치기로 했거든. 비행기 타고 태국으로 가서, 거기서 좀 버티다가 다시 돌아오든 다른 곳으로 떠나든 하자고.”

“…….”

놀란 정은수의 눈이 태건의 얼굴에 쿡 박혔다. 내기를 하다가 설은하를 좋아하게 됐다는 정도만 알았지,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을 테니까.

“비행기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데 왠지 안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빨리 떠나야 하는데, 누가 쫓아올 거 같은데, 이런 초조한 느낌도 안 들고 그냥 담담했어. 그게 너무 이상해서, 설은하가 안 올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담담한 태건의 목소리에 반해 정은수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설은하한테 그 약혼은 그냥 약혼이 아니거든. 진짜, 엄청나게 뭐가 많이 걸려 있는 거거든. 그래서 안 와도 괜찮았어. 그나마 자기가 원하는 건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건아.”

“근데, 내가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느낀 게 언젠지 알아?”

“…….”

“설은하가 나를 태건아, 이렇게 불러.”

“어?”

“마지막엔 건아, 이러더라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정은수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걘 나 그렇게 안 부르거든. 언제나 차태건, 딱 내 이름으로 부르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그 애가 날 사랑하는 방식이거든.”

태건에게서 흘러나온 사랑이라는 단어에 정은수의 입이 다물어졌다.

‘좋아해, 차태건. 내 이름 은하수를 걸고, 온 우주를 걸고. 너를 좋아해.’

은하가 제 마음을 드러낸 날, 태건은 온 우주를 선물로 받았다. 비록 그날의 끝은 이별이었으나, 그 마음만은 세상 무엇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값어치만큼 은하는 태건의 이름도 온전히 사랑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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