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36화 (36/58)

36화.

“정은수.”

“응?”

“생선 바를 줄 알아?”

갑작스러운 태건의 말에 당황한 것도 잠시, 툭 떨어지는 그의 눈물에 정은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얀 쌀밥 위에 턱을 타고 흐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건아.”

“…….”

“울지 마, 건아. 그만 울어.”

눈물이 철철 흐르는 태건의 모습에 어느덧 정은수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한창 바쁜 점심시간, 밥상을 앞에 두고 눈물 바람인 두 사람의 모습에 가게 안은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씨발, 갈치구이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사람을 패…….”

쾅! 테이블을 내리치는 태건의 주먹에 그릇들이 달그락거렸다. 뜨거운 국물이 손에 쏟아졌지만, 그는 아픈 줄도 몰랐다.

“건아, 손!”

황급히 물수건을 대 주려는 정은수의 손을 피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애처롭게 저를 보는 그녀에게 말했다.

“차태건 죽었어. 그러니까 다신 나 찾지 마.”

“건아!”

정은수의 애타는 외침을 뒤로 하고 태건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밥 같은 건 필요 없고, 한시라도 빨리 은하를 찾으러 몸을 움직여야 했다.

어디든 좋다. 은하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눈빛이 형형한 채로, 태건은 제 모든 의식을 은하를 찾는 데에 다 쏟아부었다.

* * *

“후우……, 하아…….”

무작정 퍼부은 술 때문에 숨을 내쉴 때마다 알코올 내가 강하게 풍겼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신 차려야 하는데. 가물가물한 정신을 붙잡으려 태건은 제 머리를 퍽퍽 쳤다.

“태건 씨.”

“아, 효주 씨.”

비틀거리는 태건을 보는 효주의 얼굴에 착잡함이 어렸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태건은 오늘도 은하에게서 별 연락이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일 다시 올게요.”

“은하 괜찮을 거예요.”

“…….”

“약한 애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

알고 있다. 설은하가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버텨 왔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이 어느 순간 부러지면 답도 없는 거니까. 태건은 가슴속에서 점점 커지는 불안감의 정체를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효주 씨,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의아하게 보는 효주에게 오늘 하루만 쪽방에서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언젠가 딱 한 번 들어갔던 그곳에서 은하의 흔적이라도 느껴 보고 싶었다.

“그래요.”

어차피 문은 자동으로 잠기니 내일 문단속은 걱정할 필요 없다며, 효주는 먼저 자리를 피해 주었다. 어두운 쪽방 안으로 들어선 태건은 불도 켜지 않고 자리에 누웠다.

아무렇게나 누웠는데, 다리 밑에 동화책 하나가 널브러져 있었다. 태건은 그것의 정체를 금세 알아차렸다.

‘뭐…… 하는 거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읽어 주던 건데 너한테도 소개해 주고 싶어서.’

‘…….’

가벼운 내기를 하자면서 대가로 소원권을 내밀었던 은하는 야릇한 방법으로 태건을 흥분시키는 대신, 제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 주었다. 몹시 다정한 목소리로.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제이콥이라는 아주 큰 고릴라가 살았습니다.’

그날 밤, 저를 허벅지에 눕히고 동화책을 읽어 주던 은하를 떠올리며 태건은 동화책을 품속에 꼭 껴안았다.

‘제이콥, 너를 위해 저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을 물어다 줄게. 활강할 때의 짜릿함과 오로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을. 그러니 기억해. 넌 혼자가 아니야.’

‘외롭다고 느껴질 땐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봐. 내가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제이콥, 넌 혼자가 아니야.’

애초에 내기 같은 건 없었다. 차태건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설은하가 처음부터 지고 들어왔을 뿐. 차태건을 좋아하는 데에 설은하는 단 한 순간도 재고 따지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혼자 두지 않는대 놓고.

“어디 있어.”

나 혼자 내버려 두고 어딜 간 거야.

“소원 아직 남았는데…… 어디 갔어.”

며칠간 제대로 잠도 못 잔 데다 술까지 마시고 나니, 의식이 금방 꺼져 들었다. 쌕쌕, 큰 덩치를 모로 눕히고 잠든 태건의 모습이 마치 몸에 맞지 않는 관에 누운 것과도 같았다.

* * *

“환자분, 정신 들어요?”

가물거리는 눈을 채 뜨기도 전, 은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실패했구나. 마지막에 그렇게 버둥대더니, 결국 살아 버렸구나.

“설은하.”

엄마는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는데, 내 목숨 하나 끊기는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은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제 앞에 선 인물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왔어.”

하얗게 질린 친구의 얼굴에 은하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성대가 눌린 탓인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온통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던 효주가 이내 은하의 손을 잡고 척척한 얼굴을 묻었다.

“울지 마. 안 죽었잖아.”

“네가 왜 죽어. 네가 뭘 잘못했다고 죽어. 벌은 그 인간들이 받아야지!”

울분에 차 소리 지르는 효주의 말에 은하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래야 되나 보다. 그러라고 아직 안 죽었나 봐.

어떤 강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 건 아니었다. 그저 며칠을 아무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몹시 피곤했고, 지쳐 있던 차에 잡아탄 버스의 종점이 우연히 산을 오르는 입구였을 뿐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린 뒤라 땅이 척척했다. 그 때문인지 산행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 정장에 구두를 신은 은하는 아무 방해도 없이 조용히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손에는 가는 길에 철물점에서 산 주황색 로프가 들려 있었다. 어디선가 목을 매는 건 살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다른 예외는 있을 수 없다던 얘기가 떠올라 충동적으로 구매한 것이었다.

은하는 등산로 옆 한쪽으로 난 샛길을 따라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제 키보다 높고 비교적 올라가기 쉬운 나무를 고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산에는 널리고 널린 게 나무였다. 결국 적당한 것을 찾은 은하는 제 목에 로프를 걸고 나무를 올랐다.

어렸을 때 아빠와 함께 마당에 심었던 나무에 곧잘 올라가곤 했었는데. 왕년의 솜씨를 이런 데 부릴 줄이야. 실없는 생각과 함께 밑으로 몸을 날렸을 때, 은하는 당황했다. 곧 자유로운 느낌이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던 탓이었다.

막상 목이 달랑달랑하고 보니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는다는 것이, 이제 정말로 이 세상을 뜬다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 발버둥을 쳤다. 살아 보겠다고.

결국 어떻게든 생을 견뎌 내라는 하늘의 뜻이 있었는지 은하는 살아 버렸다. 수상한 그녀의 모습에 걱정이 된 철물점 주인이 뒤늦게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을 효주가 말해 주었다.

“아무한테도 알리지 마.”

“…….”

“차태건한테도.”

무언으로 묻는 효주의 눈빛에 은하는 정확히 답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참 이상하네. 몸에 힘은 없는데, 신기하게도 어떤 의지 같은 게 솟아오른다. 복수해야지,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모조리 다 망가뜨리고 싶다는 정도? 나를 파괴하지 못했으니, 다른 무언가라도 파괴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야. 은하야.”

저를 부르는 효주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은하는 다시 잠에 빠졌다. 그러고서 일주일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 * *

“다녀오세요.”

설은하가 없이도 세상은 잘 굴러갔다. 지금껏 그녀가 가족이라고 부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불안해서 죽을 것 같은데, 그들은 뻔뻔하게도 아주 잘 지내고 있었다.

“하아.”

며칠 동안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하고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성인이라 신고가 쉽지는 않았지만, 매일 가서 깽판을 놓는 통에 일단 접수는 되었다. 은하의 학교와 과외했던 곳 등, 효주가 아는 곳은 일단 모조리 알아내서 돌아다녀 봤지만, 성과는 없었다. 며칠째 잠도 못 잔 태건의 눈에는 핏발이 벌겋게 서 있었다.

위이잉.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한 태건은 효주의 이름을 보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태건 씨, 잠잠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거렸다.

―은하 찾았어요.

“하.”

그 순간 할 수 있는 거라곤, 성급하게 모인 숨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뿐이었다. 벌벌 떨리는 손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태건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 있어요?”

―미안해요. 그건 말해 줄 수 없어요.

“효주 씨.”

―자기 만났다는 것도 얘기하지 말랬는데, 태건 씨 걱정할까 봐 연락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만 알아요.

“잠시만요! 잠시만요, 효주 씨.”

애타게 부르는 태건에 효주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일단 시간을 번 태건은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잠깐만, 아주 잠깐 얼굴만 볼게요. 다른 거 안 해요. 은하가 보기 싫어하면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요. 그냥, 얼굴만 보게 해 줘요.”

긴 침묵이 이어졌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에 태건은 제발, 제발요, 를 하염없이 되뇌었다.

―주소 보내 줄게요. 도착하면 전화해요.

잠시 후 효주가 보낸 주소를 확인했을 때, 검색을 통해 그곳이 병원임을 알게 된 태건은 가슴이 몹시 뛰었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 아니기만을 바랐는데.

하지만 결국 은하는 돌아왔다.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되든, 가장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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