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왔어요?”
“…….”
병상 위의 은하를 보는 태건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은하가 힘없이 누워 있었다. 목에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상처를 매단 채.
“어디서 찾았대요?”
“북한산 중턱에서 발견됐대요. 은하 휴대폰에 마지막 통화한 사람이 나라서 내 쪽으로 연락이 왔어요.”
“……다행이네요.”
은하라면 이런 제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이기 싫을 것이다. 그게 설준호나 그의 가족이라면 더욱 더. 물론 차태건 자신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은하 회복하려면 오래 걸릴 거예요. 그러니까 당분간 시간을 좀 가져요. 이해하죠?”
“그럼요.”
애초에 다시 은하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무릎 꿇고 용서를 빌고 싶었을 뿐. 하지만 지금 이렇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그것도 다 제 욕심임을 깨달았다.
“조금만 더 있다 가도 될까요?”
고개를 끄덕인 효주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렇게 병실 안에 고요가 쌓이고, 태건은 은하의 하얀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왜 이렇게 손이 차가워.”
손끝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태건은 그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은하야, 일어나 봐. 일어나서 나 좀 봐 줘.”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세게 쥐었는데도 은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 마치 죽은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에 태건은 숨이 막혔다.
“미안해. 내가 정말……미안해.”
잠든 은하의 얼굴은 몹시도 평온했다. 그 평화로움에 빠져 다시는 눈을 뜨지 않을까 봐, 태건은 사랑하는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쓸고 또 쓸었다.
* * *
“정은수.”
마당을 빠져나가던 정은수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뒤돌아본 곳에 정윤오가 삐딱하게 선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얘기 좀 해.”
“나중에. 나중에 하자.”
“지금 하자고.”
“정윤오.”
“…….”
“나 지금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차갑게 응수하는 정은수의 대답에 정윤오의 얼굴에는 금이 갔다. 그런 그를 잠시 보던 정은수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기다려!”
정은수는 제 몸을 홱 잡아 돌리는 정윤오의 팔을 탁 쳐 버렸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완강하게 거부하는 건 처음이라 그의 눈빛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뭐?”
“나랑 한번 잘래?”
“무슨 개소리야.”
“이렇게까지 해야 나랑도 끝을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야.”
“왜, 완전히 다 끝내려고 한 거 아니었어? 그러려고 그딴 짓 한 거 아니냐고.”
“정은수.”
“태건이야. 차태건! 10년 넘게 봐 왔던 우리 친구라고! 그런 애한테 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그동안 참아 왔던 무언가가 터져 나왔다. 삽시간에 번지는 들불처럼, 정은수는 제 안에 정체 모를 감정이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어린애같이 구는 네 말, 행동 다 참았어. 내 엄마가 잘못했으니까. 너한테 분명 상처가 됐을 테니까! 근데 이건 아니잖아. 진짜 이건 아니잖아.”
“…….”
“뭐라고 말 좀 해 봐. 변명이라도 해 보라고!”
하지만 정윤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오히려 저에게 따지는 정은수가 원망스럽다는 듯, 입술을 사리물고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난 진짜 모르겠다. 도대체, 도대체 어쩌려고 그런 짓을…….”
“걔들도 잘못했잖아.”
“뭐?”
“왜 나한테만 그러는데. 애초에 내가 말한 거 안 들어먹었으면 된 거잖아. 근데 지들이 응해 놓고, 왜 나한테만 지랄이냐고!”
“너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잖아. 걔들 약점이 뭔지.”
“뭐?”
“은하한테 필요한 게 뭔지, 태건이가 약한 게 뭔지, 다 알고 있으면서 그거 잡고 뒤흔든 거잖아.”
“그래. 알고 있었어. 근데 그게 뭐?”
“정윤오.”
안하무인으로 나오는 정윤오의 모습에 피가 다 식는 느낌이었다. 하, 꾹 다물고 있던 정은수의 입에서 숨이 짧게 토해졌다.
“그냥 나 하나로는 안 되는 거야?”
“…….”
“약점 쥐고 사람 이용하는 거, 나 하나로는 부족하냐고.”
진심으로 정윤오가 저 하나만 괴롭혔으면 했다. 그렇게라도 속에 있는 뭔가를 해소하고 세상에 조금 유해졌으면 했다. 그런데.
“난 더 이상……, 널 이해할 수가 없어. 이렇게 하다가는 정말……. 결국 너 혼자 남을 거야.”
“안 그러려고 그런 거야.”
“……뭐?”
“씨발, 안 헤어지려고 그런 거라고. 너랑 나! 언제까지나 쭉 이렇게 살자고 그런 거라고!”
“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정윤오에 정은수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평소엔 잘 넘어갔잖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넘어가 줬잖아. 근데 이번엔 왜 이렇게 날 밀어내는 건데!”
정윤오가 어린 날의 어딘가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은 다 컸지만, 마음은 아직도 어린아이같이 유치하고 이기적이라는 것도. 그래서 더 노력했다. 갇혀 있는 그를 꺼내기 위해. 혼자 그곳에 남겨 두지 않기 위해.
“이게 대체, 이건 도무지…….”
하지만 정은수는 실패했다. 어느 것 하나 놓지도 못하고, 움켜쥐지도 못했던 지난 세월. 그 시간 동안 차태건을 포함한 세 사람의 관계는 쳇바퀴 돌아가듯 관성처럼 서로에게 생채기만 남겼다.
“하아.”
결국 정은수는 정윤오를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고개를 떨구는 그녀의 모습에 정윤오는 한 발짝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정은수는 다시 멀어졌다.
“그냥 다 내 잘못인 거 같아.”
“씨발, 왜 또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그때 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냥 꺼지랄 때 꺼질걸.”
“…….”
“어렵다, 윤오야.”
너무 어려워. 허망한 정은수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부서졌다. 비틀거리며 돌아서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기 전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이제 그만할래. 너 더 이상 내 약점 아니야.”
마치 사형 선고처럼 내리는 정은수의 이별 통보에 정윤오는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은 완전히 갈피를 잃은 표정이었다.
* * *
“춥지 않아? 머리는 안 어지럽고?”
“응. 괜찮아.”
일주일 만에 일어난 은하는 바깥 공기를 자주 쐬어 주는 게 좋다는 의사에 말에, 병원 밑 산책로에 나섰다. 공기 중에 어려 있는 찬 기운이 긴 잠을 자고 깬 은하의 의식을 명료하게 밝혀 주었다.
“집에 좀 다녀와. 어머니 며칠째 계속 전화 오잖아.”
“됐어. 대충 둘러대 놨어.”
“그러지 말고.”
집에도 가지 않고 제 곁을 지키는 효주에 은하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책도 써야 하고 책방 문도 열어야 할 텐데. 괜히 제가 허튼짓을 하는 바람에 친구 앞길만 방해하는 느낌이었다.
“미안.”
“그딴 소리 하지 말고. 아니다, 미안해해. 그래야 다신 이딴 짓 안 하지.”
일부러 통박을 주는 효주의 말에 잠잠하던 은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나마 휘어졌다.
“자. 네가 말한 대로 번호는 그대로 두고 데이터만 다 백업했어.”
“아, 고마워.”
효주가 건넨 것은 새로 산 은하의 휴대폰이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제 휴대폰을 찾던 은하는 액정이 다 부서진 그것을 보고 꽤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효주에게 부탁의 말을 건넸다. 휴대폰을 하나 사다 달라고.
뭐 중요한 자료라도 있는가 싶었지만, 정작 전화기를 손에 든 은하는 별 표정 없이 화면을 매만질 뿐이었다. 효주는 친구에게 조금씩 일상을 회복할 의지가 생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퇴원하자마자 오피스텔부터 알아봐야겠다.”
“오피스텔?”
“응.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갈 순 없잖아.”
“일단 우리 집에 들어와 있어. 이 몸으로 어딜 혼자 있겠다는 거야.”
“괜찮아.”
“은하야.”
“다신 그런 짓 안 해. 진짜 무서웠거든.”
“…….”
“약속할게. 그러니까 화내지 마.”
효주는 힘 빠진 은하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울컥하는 기분에 고개를 돌리고, 괜히 딴청을 피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다녀올게. 금방 올 테니까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응. 운전 조심하고.”
돌아서는 효주의 뒷모습을 보던 은하의 시선이 문득 한쪽으로 돌아갔다. 가을의 색을 잔뜩 입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시간 빠르네.”
이렇게 시간이 더욱 더 빨리 흘러서, 눈 한번 깜빡이고 나면 한 일흔쯤 돼 있으면 좋겠다. 그럼 세상 살기도 조금은 쉬워질까. 씁쓸하게 웃는 은하의 손이 하염없이 제 전화기를 만져 댔다.
* * *
“은수가 찾던데.”
“…….”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태건은 그대로 고개를 수그리고 흰쌀밥만 묵묵히 퍼 올렸다. 모처럼 휴일을 맞은 부친의 전화를 받고 잠시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낮이나 밤이나 은하의 곁을 지키고 있던 터라, 태건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운전석에서 쪽잠을 자고, 근처 사우나에 들러 샤워만 겨우 하는 생활을 한 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비록 은하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라도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게 태건은 좋았다. 은하가 병원에 있을 때만이라도 이런 바보 같은 생활을 계속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