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동안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데, 이제야 정리가 됐어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은하를 정호승은 담담히 쳐다보았다. 옆에 앉은 오진주의 눈은 은하의 기색을 살피느라 아주 바빴다.
“가족들도 모르는 피치 못할 사정이 뭔지, 이해가 안 가는데.”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엄마?”
순간 정호승과 오진주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그런 그들을 보며 은하는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전 설준호 대표가 고아원에서 입양해 온 자식이 아닙니다. 밖에서 낳아 온 혼외자는 더더욱 아니구요.”
건조한 목소리로 은하는 간략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설준수의 딸인 자신이 어떻게 설준호의 입양아로 적을 올렸는지, 왜 자신이 약혼식 날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지 등등.
은하의 목소리는 비교적 덤덤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두 사람의 얼굴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적어도 세운 일가 사람들보다는 인간적인 반응에 은하는 슬쩍 미소를 흘렸다.
“그날 처음 알게 된 사실이라, 충격을 꽤 크게 받았거든요. 사정을 말씀드리면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직접 뵙고 사과드리고 싶어서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오늘 온 목적은 그게 다다?”
“아니요.”
정호승은 장사꾼이었다. 기민한 감각을 타고난 그는 은하가 그냥 이곳에 찾아온 건 아니라는 것을 쉽사리 알아챘다.
“제안을 하나 드릴까 해서 왔습니다.”
“제안?”
“네. 굳이 안 좋은 소문까지 돌았던 절 며느리로 삼으려고 하셨던 거, 그때 말씀하셨던 손주 문제 때문이잖아요? 소문만 빼면 공부 머리도 있고, 신체적 조건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래서?”
“정윤오와 결혼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
생각지도 못한 은하의 발언에 정호승도 오진주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어차피 바뀌는 건 없습니다. 단지 제가, 혼외자가 아니라 세운로펌 정식 자손이라는 사실만 수정되는 것뿐이죠.”
“설 대표도 동의한 건가?”
“아뇨. 근데 굳이 반대는 하지 않겠죠. 손해 볼 리 없는 거래니까요.”
거래. 아들을 낳아 주겠다며 찾아온 은하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는 무척 이질적이고 무례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다 뿐이지, 그동안 두 사람의 결혼을 둘러싸고 어떤 의미가 오가는지 다 알고 있었으니까.
“지난번 봉사 활동 할 때 보니까 정 대표님 인맥이 정말 어마어마하시더라구요. 설 대표가 왜 대표님을 못 놓는지 알 정도로요.”
돈도 돈이지만, 그동안 정호승이 부동산 거래를 통해 쌓아 놓은 정치계 인맥이 대단했다. 설준호가 정호승에게 원하는 것은 정치로 넘어가기 위해 그런 인맥을 소개받는 것이었다.
“그 집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래 주시면, 원하시는 손주 낳아드리고 깔끔하게 손 털고 나가겠습니다.”
미간을 좁힌 정호승이 은하를 뚫어져라 살폈다. 몇 번 만나면서 느낀 바지만, 은하는 조용한 듯하면서도 배포가 두둑했다. 계산적이지만 즉흥적인 성향의 정호승에게는 분명히 플러스 요인이 되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륜지대산데,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진행할 수야 있나.”
옆에서 지켜보던 오진주가 슬쩍 말을 던졌지만, 은하는 아무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잠시 침묵에 잠겨 있던 정호승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다른 조건도 있겠지.”
“전에 말씀하셨던 거, 그것만 주세요.”
아들을 낳아 주면 받기로 했던 것. 아파트 한 채. 이런 정신 나간 짓의 목적이 돈은 아니었던지라, 은하는 대충 그들이 수긍할 정도로만 조건을 던졌다.
정호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원하는 건 제 아들의 아들이었다. 외모 좋고, 능력 좋은 데다, 이제는 출신까지 명확해진 은하가 먼저 청을 해 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윤오랑 쭉 잘 지내 볼 생각은 없고?”
그 순간, 정말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은하의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저보다 아드님이 더 질색할걸요?”
그동안 모른 척 눈 감고 있었을 뿐, 정호승도 정윤오가 정은수에게 가지는 집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흠.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은하의 표정에 정호승은 잠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정리된 거면, 이만 일어나도 될까요?”
“그러지.”
“설 대표 쪽에는 적당한 때에 대표님께서 기별을 넣어 주셨으면 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연락하긴 좀 그래서요.”
그동안 그런 꼴을 당하고 살았다니 함께 지내기는 어렵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운로펌의 조건을 들어주라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정호승은 정확히 제 이해득실만 따지기로 했다.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는지 물어봐도 되나?”
“오피스텔 하나 구했습니다.”
“내가 거처를 마련해 줄 수도 있는데.”
“결혼 후에 부탁드릴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정중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은하는 밖으로 나섰다. 산뜻하게 거래를 마친 방 안의 공기는 꽤 쾌적했다.
* * *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지.”
초조한 얼굴로 응접실을 보던 정은수가 다시 한번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지 이내 미간이 구겨졌다.
“메시지는 본 건가.”
안에서는 한창 부모님과 은하가 대화 중이었다.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인지, 세 사람이 들어간 지 삼십 분이 지났는데도 나올 기미가 없었다.
“하아.”
혹시 몰라 태건의 부친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메시지를 남겨 놓았지만, 태건이 연락을 받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은하가 가 버릴까 봐 초조했던 정은수는 괜히 제 손만 만지작거렸다.
“언니 뭐 해요?”
“은하야.”
문이 열리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은하가 정은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뭔가 머뭇거리는 듯한 정은수의 표정에 은하의 고개가 모로 기울여졌다.
“뭐 할 말 있어요?”
“어. 조용한 데서 잠깐 얘기 좀 할까?”
“그래요.”
정은수는 은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조심스레 은하를 살피는 정은수에 반해, 마당 안에 늘어선 단풍나무를 바라보는 은하의 얼굴은 산뜻하기만 했다.
“여긴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나네요. 아, 그때 별장도 가을에 가는 게 더 좋다고 했죠?”
“응.”
“언제 시간 한번 맞춰서 가요. 결혼식 올리기 전에.”
“결혼식?”
“네. 정윤오랑 결혼하려구요.”
은하의 말간 시선에 정은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그녀의 모습에 은하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언니 아직 유학 안 갔네요?”
“어? 아…….”
은하가 내뱉은 유학이라는 단어에 필연적으로 정윤오의 과오가 떠올랐다. 순간 고개를 푹 숙인 정은수는 되는 대로 헛숨을 들이켰다.
“아직 알아보는 중이에요? 하긴, 그게 그렇게 금방 준비될 리는 없으니까. 아무튼 축하해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돼서.”
“내가 미안해, 은하야.”
황급히 터져 나오는 정은수의 사과에 은하의 고개가 갸웃했다.
“언니가 뭘요?”
“윤오가 이상한 이야기해서, 너한테 상처 준 거.”
하, 피식 웃음을 흘린 은하가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언니가 저한테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정윤오랑 내기 벌인 건 저도 마찬가진데.”
“그래도.”
“사과할 필요 없어요. 저도 다 똑같은 인간이라 그런 거니까.”
“…….”
“그래도 언니가 굳이 사과하고 싶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차태건한테 해야죠.”
“어?”
“저야 제가 원하는 게 있어서 그랬다 쳐도, 차태건은 언니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 정윤오에게 농락당해서 미안한 거라면, 언니가 미안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차태건 쪽이에요.”
“물론 건이한테도 미안해. 충분히 사과하고 있고. 근데 너한테도 그런 마음이 있어서 말하는 거야.”
“흠, 언니 참 착하네요. 너무 착해서 사람 질리게 할 정도로.”
“응?”
지금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직설적인 은하의 말에 정은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이런 느낌이 들지.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난 이 순간에도 언니가 정윤오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여요. 내 착각인가요?”
“윤오는…….”
어렵게 말을 꺼내는 정은수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윤오는 감정의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어.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윤오에게 신경을 못 써서, 외롭다거나 쓸쓸하다는 감정을 말로 잘 표현 못 해. 실은 마음이 힘든 건데도, 심심하다 지루하다 이렇게 말하는 거야. 그러다가 이번에도 이렇게 엇나가 버린 거고.”
“역시 언닌 정윤오에 대해서 정말 잘 알고 있는 거 같아요. 그만큼 그 앨 좋아해서겠죠?”
“아, 나는…….”
결혼을 하겠다는 사람 앞에서 무슨 말을 한 거지. 자책하는 표정으로 버벅거리는 정은수를 은하가 애처롭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