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41화 (41/58)

41화.

‘선배님, 정말 감사합니다.’

1년 전, 술자리에서 한 여자를 폭행해 피소를 당한 이운형은 그 뒤처리를 부탁하러 직접 설준호에게 찾아왔다. 적당히 합의를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생각보다 완강한 피해자 측의 입장에 지지부진 길어지던 상황이었다.

설준호는 현란한 말솜씨로 피해자의 부모를 설득했다. 아직 앞길도 창창한 아가씬데 괜히 더럽게 소문이 돌아서 좋을 것 없다는 둥, 앞으로 직장 생활도 해야 되는데 그때마다 걸림돌이 되지 않겠냐는 둥. 교묘하게 피해자를 위하는 척 가증을 떠는 그의 노력에 결국 피해자 측은 거액의 돈과 함께 이운형과 합의를 봤다.

녹취는 감사 인사차 이운형이 방문했을 때 이뤄진 것이었다. 대화를 하는 내내 설준호는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은근히 이운형을 떠보았고, 결국 그는 그 이유를 털어놓았다.

‘몇 번을 말해도 수술을 안 하겠다고 해서……. 순간 이성을 잃었습니다.’

결국 그 일은 부하 직원과 외도를 한 이운형이 제 애를 가진 여자를 떼어 내기 위해 저지른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악질적인 방법으로.

‘선배님도 제 마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은근히 동조를 구하는 이운형에 설준호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고생이 많았겠다며 다독일 뿐.

은하를 통해 녹취본을 받은 이운형은 그야말로 분노를 쏟아냈다. 애초에 설준호가 그 녹취본을 남겼다는 것 자체가 수상한 일이었으니.

‘딱히 복수하려는 건 아니구요.’

가볍게 말을 꺼내는 은하를 이두현은 아주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렇게 그를 만난 게 일주일 전이었다.

신도 완전한 절망은 주지 않는다던가. 결국 이운형은 은하가 내건 거래에 응했다.

“생각보다 더 어마어마하네요.”

“아버지도 보고 놀라시더라고. 설 대표님, 이렇게까지 욕심 많으신 줄은 몰랐는데.”

“고마워요.”

“와인 할래?”

“네.”

잔에 담긴 것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새로운 술을 받았다. 그런 은하를 바라보던 이두현이 은근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아버지가 계속 말씀하시더라. 그러고 보면 너랑 설준수 판사랑 많이 닮았는데, 이제야 알았다고.”

“그래요?”

“은진이랑 결혼까지 시키실 기세더니, 네 얘기 듣고 당장 헤어지라던데?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랑 사돈 맺을 수 없다고.”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죠?”

“뭐.”

어깨를 으쓱하는 이두현의 표정에 착잡함 따위는 없었다.

“그나저나 그건 어떻게 쓰려고?”

“글쎄요. 언젠가 쓰일 때가 있겠죠.”

이운형이 건넨 것은 은하가 가진 패 중 가장 쓸 만한 물건이었다. 이런 걸 막 쓸 수는 없지.

“바로 엿 먹어 봐라, 공격하려는 건 아니에요. 나중에라도 나 건드리면 가만히 안 있겠다, 이 정도 무기로나 여기는 거지.”

“그래, 너답네.”

지금 뭔가를 터뜨리기엔 설준호의 위치가 너무 미미했다. 정치 맛도 좀 보고, 한참 단꿈에 빠져 있을 때 바닥으로 거꾸러뜨려야 제맛이지. 정윤오와의 결혼을 그대로 추진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물론 세운로펌이라는 회사를 가진 이상, 그가 완전히 나락까지 떨어질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만도 없는 거니까. 은하는 그저 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차근차근 준비해 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도와줬는데 뭐 없어?”

“이거 내가 살게요.”

“겨우? 예전에 약속한 거 있잖아.”

은근한 이두현의 눈짓에 은하의 입가에 실소가 머금어졌다. 다음번엔 질내 사정을 하게 해 달라는 이두현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하, 피식 새는 웃음과 함께 와인을 들이켜는 은하를 이두현이 진득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생각 없어?”

“이제 문란녀 타이틀 좀 벗어 보려구요. 저도 정착해야죠.”

“그 말은 정착할 사람이 생겼다는 거야? 아니면 앞으로 정착하겠다는 거야?”

“글쎄요.”

“나한테 해.”

툭 내뱉어진 말에 은하의 눈이 이두현에게 향했다. 재밌다는 듯 보는 그녀의 미간이 얕게 구겨져 있었다.

“첩 딸 아니라니까 좀 달리 보여요?”

“아, 타이밍 진짜 쓰레기 같긴 했다.”

이두현이 손을 내저으며 급히 말을 이었다.

“까칠하게 반응하는 거 이해하는데, 그냥 하는 말 아니야. 너 약혼 잘못됐다는 말 들으니까 내심 기쁘더라. 나도 모르게 널 마음에 두고 있었나 봐.”

“오빠.”

“응?”

“제가 다른 건 못 해도, 설은진 뺨은 한 대 꼭 때리고 싶거든요? 근데 오빠랑 자면 명분이 사라져요. 그래서 오빠랑은 이제 안 자요.”

딱 잘라 거절하는 은하에 이두현은 입맛만 다셨다. 단호하기가 원. 하긴 이런 게 설은하의 매력이었지.

“그래, 그럼 술이나 마시자. 대신 아주 비싼 거 시킨다?”

“그래요.”

이두현은 깔끔하게 물러섰다. 그래, 이 정도 관계가 나한테는 적당하지. 질척거리지도, 매달리지도 않는 이두현과의 관계에서 은하는 오히려 안도감을 얻었다.

* * *

“정윤오.”

오랜만에 들리는 친구의 목소리에 정윤오의 고개가 힘없이 들렸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드러났다. 다 어디 간 거지. 시끌벅적하던 분위기는 어느덧 가라앉아 있었고, 친구라고 불렀던 것들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였다.

“웬일이야? 평생 안 볼 것 같이 굴고 가더니?”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정윤오의 손짓은 아주 느릿했다. 술에 취한 눈동자에는 영혼이 없었다.

은하와 헤어진 태건은 집으로 돌아가 정호승과의 독대를 청했다. 그리고 말했다. 다시 정윤오의 일을 하겠다고. 이번에는 정말 아무 사건, 사고 없이 결혼식 장소까지 잘 집어넣겠다고.

욕심으로야 당장이라도 은하를 데리고 사라지고 싶었지만, 아까 은하를 만난 후 알 수 있었다. 일은 어떻게든 이렇게 굴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태건은 정윤오의 곁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누군가 생각하기에는 한심하고 멍청한 결정이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일어나. 집에 가자.”

“뭐야. 왜 또 이상하게 굴어.”

피식 웃음을 흘린 정윤오가 소파 헤드에 머리를 기댔다. 술이 취해도 이렇게까지 늘어진 적은 없었는데, 요즘 매일 술에 절어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모양이었다.

“업혀.”

태건은 묵묵히 정윤오의 앞에 등을 가져다 댔다. 흐느적거리는 몸이 몹시 무거웠지만, 줄곧 하던 일이라 익숙했다.

그렇게 정윤오를 차에 태우고 시동을 걸자니, 자연스럽게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잠든 줄 알았던 정윤오의 눈이 뜨였다.

“차태건.”

“…….”

“배신자 새끼.”

하여튼 넌 존나 쉬운 새끼야. 개새끼.

제가 무슨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걸까.

인사불성으로 취한 정윤오의 고개를 창가로 돌려놓고 태건은 조용히 차를 몰았다. 날렵한 차체가 한밤중의 거리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 * *

비싼 와인을 세 병이나 시킨 이두현은 한 병이 채 동나기도 전, 자리를 떴다. 은하는 제 잔에 남은 와인만 들이켜고 책방으로 돌아왔다.

“후우.”

한 꺼풀씩 옷을 벗어 내는 은하의 몸 위로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옷을 갈아입고, 벽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숨을 들이쉬는 사이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새로 마련한 오피스텔에서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잠들기 위해 노력해 봤지만,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잠을 못 자니 자연스레 입맛도 없고, 살은 그에 비례해 형편없이 빠졌다. 수면 유도제를 처방받으러 가고 싶었지만 다른 생각이 들 것 같아 그것만은 참고 있었다.

그나마 조금 익숙한 장소에 들어오니 마음이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동안은 차태건이 오간다는 얘기에 오지 못했지만, 이제 알아듣게 잘 얘기했으니 더는 볼 일 없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은하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하아.”

다시 한번 깊은숨을 들이 쉰 은하가 저도 모르게 목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목을 푸르게 물들였던 상흔은 엷어진 지 오래였다.

‘언니, 사람 그렇게 쉽게 안 죽어요. 정윤오 같이 한번 죽었다 깨난 애들은 특히 더.’

‘언니랑 차태건이 보살펴 줘서 안 죽은 게 아니라, 무서워서 안 죽은 거예요. 아픈 거 알았거든. 죽는 게 얼마나 아픈 건지, 무서운 건지.’

은하가 정은수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 은하의 상태가 딱 정윤오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죽는 걸 한 번 실패하고 나니 모든 것이 무서워졌다. 어떻게든 여기서 꺼져 버리고 싶은데, 또 그럴 수는 없어 그냥 눈앞에 보이는 건 모조리 다 망가뜨리기로 한 것이었다. 설사 그게 저 자신이라도.

‘도와줄게.’

‘어디 갈 일 있으면 말해. 데려다줄게. 짐들 일 있거나 뭐 다른 거 필요할 때라도…….’

문득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던 태건이 떠올랐다. 바보 같은 표정으로 떠듬떠듬 내뱉던 말들도.

“하, 차태건 진짜 멍청이 같아.”

내가 뭘 할 줄 알고. 하다하다 애를 낳아 주겠다는 제안까지 들이미는 이 망가진 여자에게 뭘 도와주겠다고.

‘괜찮아?’

안부를 묻는 그의 얼굴에 분노나 원망 따위는 없었다. 어떻게 그러지.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으니 한 번쯤 왜 그랬냐고 물어볼 만도 한데.

실제로 은하는 그랬다. 태건을 보는 내내 입이 썼다. 동정과 애정과 연민이 한데 섞인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얼굴이라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 게 맞느냐고 소리치며 울부짖고 싶었다.

0